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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다슬기 Sep 05. 2022

야간산행 중 만난 천사

인생이 그렇듯 누구나가 자신만이 넘어야 할 산이 있다.



얼이 나가버린 나는 주위를 살피며 도무지 알 수도 없는 무언가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나와 팻말 그리고 나를 비추는 백색의 가로등이 전부였다.





 2022년 초봄 어느 날, 나는 야간 산행 중에 천사를 만났다. 그로부터 내게 그 장소는 어쩐지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거나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찾게 되는 장소가 됐다. 이곳을 알게 된 지는 겨우 육 개월 남짓이었다. 하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처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나는 그날의 장소와 특별한 인연을 간직하며 지금도 긴밀함을 쌓아가고 있다.



 등산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어두운 밤에 산을 오를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산을 오르게 된 이유는 오픈 준비에 매진했던 쇼핑몰의 부진으로부터 시작된다. 나의 하루 일과 중 오전에는 작은 규모의 쇼핑몰 업무를 처리하며, 오후에는 프리랜서의 업무가 시작된다. 본래 운영하고 있던 쇼핑몰을 지속하기에는 한계점이 드러났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지속할 수 있는 카테고리의 품목을 찾아 새로운 쇼핑몰 오픈을 결심하게 됐다. 그렇게 사 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고군분투하며 새로운 쇼핑몰 오픈에 열을 올렸다.



 대망의 오픈 날이었다. 나는 프리랜서 업무 시간이 되면 책과 노트북만을 챙겨 매번 다양한 카페에서 일하기를 좋아했다. 내게 단칸방의 작은 사무실이 있었지만, 쇼핑몰의 재고만을 쌓아두는 창고와도 다름없었다. 사무실에 들어서기 앞서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노후된 미닫이문과 씨름해야 했고, 힘겹게 문을 열면 곰팡이와 같은 쾨쾨한 냄새가 나를 반겼다. 엄마는 멀쩡한 사무실을 방치하는 배부른 행동이라며 날 꾸짖었다. 하지만 유독 창업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다른 생각이었다. 카페를 창업한 사장님들의 차별된 성향과 섬세함이 담긴 서비스에는 배울 점이 많았다. 이 말고도 커피를 즐겨 마시길 좋아했던 내게 정당화 거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내게 돈이 없는 이유가 이런 뻔뻔스러운 정당화 거리를 늘어놓는 기질을 타고나서 일지도 모르겠다.



 광진구 아차산역 근방에 위치한 카페를 찾았다. 역시나 처음 와보는 카페였다. 초입에는 작은 정원과 테이블이 어우러진 테라스가 눈에 띄었다. 바깥공기를 쐬며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했다. 비교적 잠잠한 실내는 무엇보다 아이보리 빛의 은은한 조명이 마음에 들었다. 부담스러운 백광색의 조명을 받으면 어쩐지 온몸이 피로하다 못해 발가벗은 느낌이라서 내게 조명은 아주 중요한 옵션이었다. 더불어 적당한 산미와 고소함과 씁쓸한 맛의 아메리카노는 나의 신경계를 자극하며 집중력을 높여주는 것 같았다. 긍정적인 기운과 열중의 기세를 드러내며 곧바로 쇼핑몰을 게시했다.







 그렇게 벅찬 마음과 함께 여섯 시간이 훌쩍 흘러버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 많은 양의 접속자가 유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건의 주문도 일어나지 않았다. 큰 기대를 품었으므로 나는 겉으로는 차분하고 속으로는 아주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러다 판매를 게시하기 전까지 드러났던 SNS 속 잠재적 고객들의 관심이 그저 알랑거림일 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함부로 기대해서 들떠있던 마음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쿵쾅거림을 쉬지 않는 심장에게도 미안했다. 사 개월 동안 쇼핑몰 창업에 필요한 강의를 듣거나 상품의 품질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최선이라는 행동은 나에게 절망으로 돌아왔다. 차라리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변명의 여지라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바다의 한가운데서 저어야 할 노를 잃고 항해하는 배와 같았다. 그렇게 모든 희망이 사라짐을 느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영업 종료를 알리는 점원의 말에 주섬주섬 짐을 챙겨 바깥으로 나섰다.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마음에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숨통이 막힐 것 같았다. 목적지가 없어도 어디론가 하염없이 걷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내 앞에 서있는 ‘아차산 둘레길’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 계단이 들어선 둘레길 입구와 맞은편에 자리한 오렌지색 가로등의 어우러짐이 어쩐지 따뜻했다. 입구에서 보이는 끝없는 어둠 또한 아늑하게 느껴졌다. 오후 열한 시가 넘어가는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단을 올랐다. 한밤중에 인적이 드문 산길을 오르다 봉변을 당하거나 길을 잃어도 그다지 억울할 것 같지는 않았다. 삶의 의욕을 상실한 낙오자라고 생각되니 두려울 게 없었다.



 조용했고 어두웠던 산행 길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북적하게 모여 푸른 잎사귀를 드러냈다. 삐져나온 나뭇가지들은 위협적이기보단 자신의 존재를 밝히며 인사를 건네는 모습으로 보였다. 복잡하고 어수선한 세상으로부터 잠시 멀어진 내게 나무의 푸른 손길은 인간들의 세계에서 도태될까 두려웠던 조급한 마음을 잠시나마 덮어주었다. 그렇게 작은 위로를 받다가도 필연적으로 되돌아가야 할 인간 세계를 떠올리니 희망이라는 것이 많이 어둡게 느껴졌다. 북받치는 감정을 부정하며 안간힘을 다해 마음을 다스리다가 초봄의 가시지 않은 추위를 느끼고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마침 손에 잡힌 지갑을 꺼내 들었는데, 그 속에는 작년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살아생전 작은 손주인 나를 가장 예뻐하셨던 할머니는 치매를 앓는 중에도 나만큼은 알아보셨다. 늦은 밤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나를 뜬 눈으로 기다리며, 고단하지 않으냐고 늘 물어봐 주셨던 할머니. 그녀의 빈자리가 오늘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사진 속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힘겹게 입을 뗐다.

 "할매᠁."

 말을 꺼내기 무섭게 억누르던 눈물이 두 뺨을 적셨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토해내듯 말을 이었다.

 "나 잘하고 있는 걸까?"

 홀로 남겨진 것 같은 내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돌아가신 할머니였다. 하늘에 계신 할머니에게까지 어리광을 부리는 나는 영락없는 응석받이 손주였다.



 할머니가 많이 생각나는 바람에 토할 것 같이 가슴이 미어졌다.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시선을 옮겼는데 내 옆에는 조금 전까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팻말이 우뚝 서있었다. 그리고 팻말에는 믿을 수 없는 글이 적혀 있었다.

 '걱정하지 마, 잘하고 있어.'

 얼이 나가버린 나는 주위를 살피며 도무지 알 수도 없는 무언가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나와 팻말 그리고 나를 비추는 백색의 가로등이 전부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자리 어딘가에 분명 할머니가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녀가 정말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생전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건네고 싶었다. 말하지 못해 늘 실패했던 속마음. 그 간절한 마음들을 뒤늦게라도 성공시키고 싶었다.







 팻말을 뒤로하고도 여러 가지 팻말을 마주쳤는데 모두 하나같이 응원의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우연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너무나 절묘했던 메시지들 덕분에 먹먹했던 가슴 한편이 시원하게 트였다. 노트북과 여러 권의 책이 담긴 백팩을 메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이 기세를 몰아 산의 정상으로 향했다. 혼자 오르는 야간산행임에도 불구하고 무섭거나 두려움이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산은 나를 든든히 보호해 주는 것 같았다. 어두침침한 산행 길도 내 눈에는 훤했으며, 새카맣기만 한 밤하늘마저도 내 눈에는 별이 가득했다.



 마침내 도착한 정상의 중심에는 큰 나무가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무는 긴 세월 동안 정상에 오른 이들에게 땀을 식혀줄 안락한 그늘을 베풀었을 것이다. 동시에 높은 고도에서 더욱 세찬 바람을 이겨내야 했을 나무는 보다 단단한 뿌리를 내리며 지금의 모습으로 자라왔을 것이다. 바람의 시련을 견디며 더욱 무성히 자라났을 나무. 그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거머 쥔 넓게 뻗은 가지와 울창한 잎사귀를,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에게 건넸다. 은혜로운 나무 맞은편에는 유유히 흐르는 넓은 한강과 함께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들이 빛을 내고 있었는데, 정상에 오른 자만이 볼 수 있는 그야말로 장대한 광경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서 이 밤의 눈부신 야경을 두 눈 가득히 담았다.





 뜻하지 않게 야간 산행을 했던 나는 아무도 안 시켰지만 묵묵히 산을 오를 뿐이었다. 모두의 인생이 그렇듯 세상에는 자신만이 넘어야 할 산이 있다고 한다. 그날 밤 나는 크고 작은 수십 갈래의 길에서 아주 작은 산을 만났다. 산은 내가 흘린 땀의 보상이라고 하기에는 과분한 가르침을 주었다. 내 물음에 메시지를 전했던 팻말의 위로는 다시 나아갈 용기를 주었으며, 그 날의 실패는 새싹과 같던 내가 강한 나무로 자라나기 위해 마주친 바람이었음을 깨달았다. 산을 오르며 주저앉고 일어섰을 생의 흔적을 발견했고, 그 산은 우리와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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