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틈바구니 Mar 21. 2021

전략은 현실의 나침반이다

<신조선책략>, 최영진 저

외교관계를 다루는 책은 뉴스, 혹은 '시사'로부터 멀리 떨어져서는 의미를 갖기가 쉽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다.


지구촌 나라들의 역학관계 역시 과학기술의 발전이나 그로 인한 인간의 삶 만큼이나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다. 변화의 속도는 갈수록 빠르고, 강도는 더욱 커지고 있다. 그렇다고 한 국가를 둘러싼 대외 환경의 구조마저 갑자기 바뀌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수 년전의 '처방'을 지금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해서는 곤란한 것 아닐까. 




<신조선책략>의 출간 연도를 보고, '읽을까 말까' 하고 망설였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이 책이 출간된 것은 2013년 12월인데, 내가 한 중견 외교관의 추천에 따라 책을 찾아본 것은 2020년 7월. 무려 6년 6개월이 흐른 뒤다. 과연 책이 제시한 한국 외교전략의 방향과 내용이 지금도 유효할 수 있을 것인지, 반쯤은 회의하면서 책을 펼쳤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지금도 일독의 가치를 지닌다고 본다. 우선 200쪽 내외의 짧은 책이어서 읽기에 부담이 없다. 그렇다고 얄팍하지도 않다. 외교부 차관과 오스트리아, 유엔, 미국 주재 대사까지 지낸 저자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풀어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 썼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미중 갈등 고도화, 브렉시트와 트럼프가 출현하기 이전이라는 시간적 '한계'가 눈에 띄는 부분도 있지만, 현상에 대한 분석보다는 외교전략의 큰 방향을 제시하는 데 방점이 있는 책이어선지 그리 거슬리지는 않는다.


'신조선책략'은 저자가 19세기말 청나라 황준센이 김홍집에게 전달한 <조선책략>에서 착안한 제목이다. (황준센은 '중국과 친하고(親中), 일본과 맺고(結日), 미국과는 연대하라(聯美)'는 조언 아닌 조언을 했는데, 그에 대한 평가는 일단 접어두고...) 


21세기에 우리가 취할 신조선책략은 대북교류와 억지정책의 동시 추진, 한미동맹, 한중협력, 한일교류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책략을 일관하는 원칙과 비전은 무역 패러다임이다.(p21)


당연한 말처럼 다가오지만, 그중 '대북교류와 억지정책의 동시 추진'을 설파하는 대목은 기록할 만하다고 느꼈다. 남측의 거듭된 화해 노력에도 냉담하기만 한 북측의 반응을 설명하기에 적실성이 있다고 해야 할까. 


북한이 호응해오지 않거나, 호응하기 어려운 입장에 있다면, 우리의 대북교류정책은 그만큼, 접촉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으며, 협력으로 진행하는 것은 아무리 우리가 가슴으로 원한다고 해도 진전되기 어렵다. 따라서 대북정책을 펴나갈 때, 우리가 열심히 하면 북한도 따라올 것이라거나, 우리가 좋은 정책을 개발하면 북한이 받아들일 것이라거나, 동족끼리 진지하게 마주 대하면 결국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대신 정확한 상황인식과 냉철한 판단에 의존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북한이 호응해 올 때까지 우리의 대북교류정책은 ‘환상 없는 인게이지먼트’가 될 수밖에 없다.(p55)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과연 남북관계를 '환상'과 '기대'를 벗어나서, 조금은 냉정하게 접근할 수 있을까. 남북 간 교류, 협력이 아니라 접촉 자체가 목표가 될 수밖에 없는 때가 있다는 저자의 지적아 마치 지금의 남북관계 현실을 내다본 예언처럼 들린다. 


역사적으로 국가 간의 평화는 상대국이 베푸는 선의의 산물이 아니라 힘의 균형, 즉 억지력의 산물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따라서 한쪽에서 평화를 너무 갈망한 나머지 오직 선의만으로 상대방을 대한다면 힘의 균형은 깨어지고 결국에는 평화 그 자체도 지키지 못하게 된다. 전쟁의 공포에 억눌려 평화를 지키기 위한 희생을 감수할 용기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 평화는 지키지 못하게 된다. 반면 평화를 위해 전쟁을 불사한다는 단호한 결의와 함께 억지력을 유지할 때 전쟁 없이도 평화를 지킬 수 있다.(p97)


위 대목은 국제정치학의 기본 원리나 다름없다. 누구보다도 평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매번 평화를 구호삼아 부르짖는 정부 일각의 목소리가 조금은 불편했다. 그러던 차에 이런 서술을 만나서 혼자서 괜히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국가 간 평화'의 오래된 원리가 이제는 남북 간에도 본격적으로 적용되야 하는 때가 온 게 아닐까, 남북은 민족의 동질성에 기반한 특수관계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국가 대 국가에 준하는 관계로 다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던 차였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외교야말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의 연속이구나, 싶을 때가 있다. 국익이라는 때로는 실체가 모호한 대상을 놓고 상대국과 겨루면서도 언제까지나 '적'이 아닌 '친구'로 대해야 하고,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존재하지 않는 정답을 찾아야만 할 때도 있다. 세계적으로 외교정책의 국내정치화가 가속화되는 요즘은 고려해야 할 변수도 많다. 신조선책략이 됐든, 다른 무엇이 됐든, 전략 마련이 절실한 때가 된 것이다.


어쩌면 내게 이 책을 권한 중견 외교관은 이 책을 나침반으로 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이런 회고록은 언제나 환영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