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타이타닉 1

다래끼

by injury time

하얀 바다에 나는 서있었다. 파도가 어찌나 거칠게 몰아치던지 푸르던 바다는 하얗게 거품을 일으키며 내게 달려들다 사그라들었다. 문득 대왕조개 한 개가 삐죽 고개를 내민다. 대왕조개를 두 손으로 으짜, 집어 본다. 꽤 묵직하다. 큰 입을 벌린 대왕조개 속 진주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동글동글 진주를 굴리던 나는 눈을 비비며 부스스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니 그때서야 내 눈에 매달린 다래끼가 만져진다. 눈 다래끼가 마치 꿈속에서 만졌던 진주처럼 동글동글 했다. 사실 이놈의 다래끼는 일주일째 내 눈에 매달려 꼼짝도 안 하고 있었다. 좁쌀만 한 것이 눈꺼풀 안에 돋아나더니 어느새 그놈이 점점 커져 꿈속에서 본 대왕조개의 진주처럼 콩알만 하게 자라 있었다.

내 눈두덩이는 퉁퉁 부어 반쯤 감은 모습이다. 안약을 넣어 보고, 병원에 다녀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실은 안과에서 다래끼를 칼로 찢어 고름을 짜내야 한다고 했었다. 얇디얇은 곳의 살을 찢어 억지로 안에 있는 염증을 짜내야 한다는 의사의 소견에 나는 기겁을 하고 차선책으로 약을 먹고, 주사를 맞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래서인지 치료가 늦어져 눈 다래끼는 일주일째 내 눈에 매달려 대왕조개의 진주알처럼 꼼짝도 안 하고 자라고 있다.

하는 수 없이 오늘 약국에 가서 눈 다래끼를 가릴 만한 안대를 하나 사서 끼웠다. 요즘 귀찮아서 면도를 안 하고 수염까지 길렀더니 거울에 비친 모습이 심술궂은 후크선장 같다.

집안에서는 아내와 아들놈이 다래끼 옮는다며 수건을 따로 쓰는 등 유난을 떨었다. 꿈속에서 본 하얀 바닷속 대왕조개가 내 눈이라면 아마 이 놈의 다래끼는 더없이 희고 빛나는 진주알이 되었을 텐데.


나는 정오가 훨씬 지나서야 고름인지 눈곱인지 모를 짓무른 것들이 덕지덕지 잔뜩 붙은 눈꺼풀을 두 손가락으로 잡아 뜯으며 일어났다. 하루 종일 자도 모자라듯 나는 잠이 항상 쏟아졌다. 퇴직하고 난 후 그동안 직장 생활하면서 부족했던 잠을 원 없이 자고 있다.

정오가 지날 즈음 전화벨이 울렸다. 질지게도 계속되는 벨소리에 억지로 일어나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신도시에 좋은 땅이 있으니 한번 투자해 보라는 기업부동산의 세일즈 전화다. 일관된 톤으로 떠드는 멘트 1절을 듣자마자 툭 끊어 버렸다. 2년을 놀면서 터득한 건 단지 연락 오는 전화가 누구의 전화인지 점치는 일이다. 처음 퇴직을 했을 때는 직장 동료나 선․후배들에게서 안부 전화가 그런대로 끊이질 않고 왔었다. 그러나 그런 안부 전화도 6개월이 지나면서부터 뜸해졌다.

정오를 지나 1시가 넘어서야 모자란 잠을 털고 일어났다. 티끌하나 없이 깨끗이 치워진 주방에서 인스턴트 전복죽을 꺼내 아침인지 점심인지 모를 끼니를 챙겨 먹었다. 그리고 다시 아내가 해놓고 나간 상태로 티끌하나 없이 깨끗하게 주방을 정리하고 집을 나섰다.

퇴직을 하고 나름대로 루틴을 만들어놨는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책을 가는 것도 루틴 중의 하나이다. 처음 퇴직했을 때는 한동안 집안에서 꼼짝도 않고 있었는데 그렇게 있자니 아내 눈치도 좀 보이고 점점 더 늘어지고 한심해지는 것 같아서 무슨 일이 있든 하루에 한 번씩은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한다.

산책을 나와서는 동네 뒷산도 오르고, 새로 오픈한 마트도 좀 가보고, 동네 고양이들과도 좀 어울린다. 목적지도 없는 외출을 아주 정성스레 준비하고 집을 나선다. 외출은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