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으면서 늘어난 것은 체중뿐이다. 건설회사에서 20년 일한 대가로 나는 3천만 원 남짓 퇴직금을 받았다. 내 나이 50살의 일이었다. 퇴직금이 3천만 원 밖에 안 되는 이유는 중간에 집 장만을 한다고 미리 당겨 썼기 때문이다. 한창 착한 분양이라고 홍보를 했던 지금 사는 이 아파트를 평당 6백만 원에 분양받으며 우리 부부는 퇴직금을 헐었었다. 막상 퇴직하고 3천밖에 수중에 넣지 못하니 좀 허탈하고 후회도 좀 된다.
게다가 아내는 남은 퇴직금 3천을 장기신탁에 넣어버렸다. 퇴직하고 내가 작은 가게라도 하나 해볼까 했지만 위험부담 있는 자영업은 절대 안 된다며 그 3천을 한 번 보여주지도 않고는 이율 높다는 신탁에 일찌감치 넣어버렸다.
실은, 그 퇴직금으로 취미를 살려 프라모델 매장 같은 것을 해볼까 생각했던 적도 있다. 난 어릴 때부터 로봇, 배, 탱크, 비행기 등등 모형 조립에 흥미가 있었고, 지금까지 손으로 꼬물거리는 일은 뭐든 좋아하는 일명 프라모델 덕후다. 특히 선박 만들기를 좋아해서 서재에 여러 개의 모형 배들이 모셔져 있다. 하지만 가족들은 내 취미를 당연히 탐탁지 않아 한다. 아들도 안 가지고 노는 장난감 만들기를 하고 있으니 아내 속이 터질 만도 하다.
현역에 있을 때 나는 백도 없고, 학벌도 없고, 그렇다고 사회성이 좋아서 상사들에게 아부하는 체질도 아니었다. 그냥 열심히 성실하게 시키는 일만 했었다. 주말에는 상사를 태우고 낚시를 다니고, 짐 가방을 들며 그들의 출장을 따라다녔었다. 부장이 될 즈음에는 이제 그런 성실함이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나보다 뺀질뺀질하고 술만 좋아하고 아부하는 동기들이 하나 둘 나보다 먼저 승진을 하는 것을 본 후로는 별 볼 일 없는 동료 부장들과 얕은 친분을 쌓으며 지냈다. 마치 승진에는 관심 없는 사람처럼. 부하직원들은 영어를 배운답시고 인터넷 강의를 듣느라 여념이 없을 때도 나는 겨우 자리 보존을 하면서 지냈다. 허허 실실 월급 받는 재미로 여유롭게 보낸 거 같다.
퇴직 후 재취업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처음 9개월간은 실업급여를 받으며 열심히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들고 동분서주하며 돌아다녔었다. 그러나 변변한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렇다 할 재주나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닌 쉰 살 먹은 나에겐 취업의 문턱은 높기만 했다. 6개월이 지나고 1년이 되면서부터는 직장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아내가 나간 빈자리를 채우는 일로 소일거리와 취미생활을 하면서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내는 내가 자격증 같은 것이라도 따서 재취업을 하길 원했다. 처음에는 자격증을 따려고 문제집을 사서 포부도 당당히 시립도서관에 출근 도장을 찍으며 다녔었다. 의외로 도서관에는 평일에도 나처럼 퇴직한 50대 남자들이 여럿 있어 같이 담배도 피우며 눈인사도 하고 의지하며 지냈다. 그들도 나처럼 제2의 인생을 살아가보리라 마음먹고 자격증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공인중개사는 기본이고 소방, 설비, 조경기능사, 한국사지도자 과정 등등 듣도 보도 못한 자격증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번번이 자격증 책만 사놓고 몇 장 들춰보지 않은 채 먼지만 쌓일 뿐, 지금까지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현장에서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론이 영 어려워 인터넷 강의를 들으면 매번 졸면서 허송세월만 보냈다.
보다 못해 아내는 보험 회사에 취직을 했고, 이제는 현역에 있을 때의 나보다도 벌이가 좋다. 아내는 점점 남편의 존재를 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별 볼 일 없는 하숙생과 주인집 딸내미 같은 느낌으로 대면대면 지내고 있다.
내가 명예퇴직을 한 후 지금까지 2년 동안 우리 집은 멈춰 버린 듯했다. 아내와 아들놈은 내게 말을 거는 일이 점점 없어졌고, 나 역시 그들과 말을 섞으며 하루 일과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기들의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아내는 돈을 벌어오고, 아들놈은 공부를 하고, 나는 있는 듯 없는 듯 가족들 눈에 거슬리지 않게 살아갈 뿐 매일 그날이 그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