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대를 사고, 동네를 세 바퀴나 돌았다. 은행도 들르고, 슈퍼도 들르고, 서점에도 들른다. 안대를 하고 다니는 모습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끔 나를 힐끔거렸다. 한쪽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은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하얀 진주를 매달고도 자주 휘청거렸다.
시장 보고 난 후 내가 찾아가는 곳은 동네 서점이다. 하도 자주 와서 주인 영감과 나는 눈인사까지 하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잡지가 꽂힌 책장으로 가 그 앞에 쌓여 있는 책에 걸터앉고, 프라모델에 관한 잡지들을 펼쳐 본다. 주인 영감은 사지도 않고 책만 뒤적거리는 나를 처음엔 탐탁지 않아 했으나 이제는 그것도 익숙해졌다. 나른하게 하품을 하다가도 내가 서점으로 들어오면 주인 영감은 믹스커피를 타서 내게 건네며 요 근래 뉴스거리들을 늘어놓으며 잡담을 했다. 서점에서 한 시간 여를 보내고 나면 다섯 시가 다 되어간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집으로 돌아왔다. 장바구니를 정리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가족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며칠 전 큰맘 먹고 구입한 프라모델 상자를 떠내왔다. 미시시피강을 오르내린 외륜선을 변형한 미국식 패들 스팀보트 모델이다. 기둥과 돛대가 웅장하고 배 후미에는 패들이 있는 것이 이 배의 특징이다. 배의 가로길이만 60cm 정도 되니 배 하나를 만드는데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아직 배의 골격도 다 만들지 못했다. 부품이 어찌나 작고 섬세한지 자칫 잘못하다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눈이 빠질 듯이 집중을 해야 하나하나 겨우 붙일 수 있다. 아들놈은 애비가 만드는 모형 배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나를 닮았으면 손재주가 있을 법도 한데 전혀 조립에는 관심이 없다. 물론 아내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언젠가 내가 직접 만든 진짜 배를 보면 아들놈과 아내도 놀라 자빠질 것이다.
작업을 할 때 접착제를 사용해야 할 작업들이 많고 부품들을 분실하면 안 되기에 반드시 바닥에 뭘 하나 깔아놔야 한다. 재활용해놓은 종이 더미에서 판판한 종이 한 장을 꺼내 깔고 작업을 시작했다. 펼쳐보니 아들놈의 97점을 맞은 오래된 국사 시험지이다. 역사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래도 성적이 좋은 아들놈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핀셋으로 부품 하나를 꼭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며 접착제를 바를 때쯤이었다. 손과 눈에 힘을 주며 손톱만 한 부품을 돛대에 다는데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잠시 조각을 내려놓고 다래끼 돋은 눈꺼풀을 비비는데 아들의 국사 시험지 문제에 우연히 눈길이 갔다. 서른 문제에서 딱 하나 틀린 문제였다.
일제 침략기에 금괴를 수송하던 우리나라 항구는 어디인가?
아들은 인천항이라고 썼고 빨간 색연필로 가차 없이 오답이라며 빗줄이 매몰차게 그어져 있었다. 어릴 때는 아들 기죽인다고 틀린 문제도 조심스럽게 브이자로 체크만 했었는데 여지없이 틀렸다고 빗줄을 그은 선생을 생각하며 언짢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대체 녀석이 뭘 틀린 건가 싶어 나는 정답이 궁금해졌다.
일제 침략기에 금괴 수송이라니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먹고살기도 힘들었던 그 시절 외국의 다른 나라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금괴라니, 낱말퍼즐처럼 머리를 아무리 이리저리 굴려보아도 도무지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금괴라... 그 직사각형 황금빛 묵직한 그거. 금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