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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jury time Jan 04. 2024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3.

낚싯바늘에 걸린 늙은 숭어

그녀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늦은 아침이나 깊은 저녁에 만나자며 연락을 해왔다. 와이프의 슴슴한 밥을 먹다가도 나는 서둘러 숟가락을 내려놓고 운동화를 질질 구겨 신으며 그녀에게로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아파트 입구 가로등 밑에서 보도블록을 툭툭 치며 서있던 그녀가 나를 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근처 작은 칼국수집으로 향했다. 늦은 밤이라 대부분의 식당은 문을 닫았고, 손맛 하나로 동네에서 살아남은 할머니표 손칼국수집은 그나마 손님 하나 없이 구수한 멸치국물 냄새를 풍기며 우리를 맞이했다.

작은 철제테이블에 그녀와 나는 마주 앉았다. 며칠 전에 보았던 목 늘어난 회색 후드티에 초록색 맥시 니트스커트를 입은 그녀가 가지런히 다리를 모으고 앉아 다소곳이 할머니표 겉절이를 사각사각 맛보는 중이다.    

화장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늘 그녀의 발그레한 볼에서는 수줍음이 묻어났고, 그 터질 듯이 통통한 볼이 이상하게도 그녀의 탄탄한 젖무덤처럼 보여 음탕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씩씩하게 신념을 지키고 살아가는 여리고 여린 그녀가 당당하고 멋졌고, 가엾은 생각이 들어 내가 뭐라고, 호기롭게 그녀를 지켜주고 싶기도 하고, 호기롭게 갖고 싶기도 했다.


철제테이블 밑으로 그녀의 무릎이 닿을락 말락 내 무릎을 위태롭게 간지럽혔다. 그게 의도적인 행동인지 아닌지 나는 알 수 없는 숙맥이다. 그냥 낚싯바늘에 걸린 늙은 숭어처럼 그녀의 낚싯대에 사정없이 파닥거릴 뿐이었다. 주인 할머니가 주방 뒷정리를 마치고 가게 밖으로 나가자 예쁜 애가 뾰족하게 입술을 만들어 후루룩 칼국수 자락을 입에 넣으며 소곤거렸다.


- 샘은 언제 마지막으로 키스해 봤어요?
- 흡


뾰족한 그녀의 붉은 입술이 장난기 넘치는 모습으로 나를 꽉 움켜쥐었다가 흔들었다가 하고 있었다.


- 하하하. 설마 몇 년 된 건 아니죠?


나는 예쁜 애의 질문에 당황했지만 숙련된 바람둥이처럼 요령껏 나의 사생활을 들키지 않을 정도의 답변으로 갈무리했다.     


- 글쎄, 키스도 그 깊이와 가벼움이 있어놔서...
- 푸하하하. 근데 멋있어요. 그 말. 깊이와 가벼움...


뭔가를 상상하는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칼국수 국물을 호로록거렸다.

그때 마침 식당 밖에서 옆집 철물점 주인이랑 이야기를 나누던 할머니가 훅~문을 열고 들어왔다. 순간, 명지바람 하나가 그 틈을 타고 함께 들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감싸 안았다. 그녀의 검은 머리칼은 바람에 아무렇게나 날려 하얀 목덜미를 휘어 감았다.

귀밑머리며 목덜미며 이마 사이사이 촘촘히 박혀있는 그녀의 잔머리는 하얀 살결에 탐스러운 복숭아처럼 보였다.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휘감긴 그녀의 탐스런 머리칼을 조심히 들어 그녀의 좁고 가냘픈 어깨에 가지런히 정리해 주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눈동자 속에 별이 박혀 반짝였다. 그 눈은 호기심 터지는 눈빛인지 불안한 눈빛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냥 그녀가 마냥 예뻐 보였고, 만져보고 싶었고, 안아보고 싶을 뿐이었다. 콜라겐으로 꽉 찼을 까만 머리칼은 묵직하고 부드러웠다.    




돌아오는 길에는 아파트 주변을 조금 더 벗어나 산책하기 좋은 자전거 도로로 밤길을 뚜벅뚜벅 걸렀다. 이따금씩 밤 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열심히 팔을 휘저으며 우리를 지나쳤다. 그녀는 양쪽 겨드랑이에 손목을 끼운 채 팔짱을 끼고 걷고 있었고, 나는 여전히 뒷짐을 지고 그녀 옆을 지켰다. 예쁜 애의 가슴이 물컹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J가 러시아로 간대요.


J, 그녀가 그토록 말했던 J. 친구이자 동료이자 애인이자, 아무것도 아닌 자. 예쁜 애가 구름다리에 올라 난간에 팔꿈치를 기댄 채 물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예쁜 애의 옆에 바짝 다가가 어깨를 맞대고 기대 서서 그녀와 눈을 맞췄다.    


- 그 애랑 뭘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막상 준비 다 하고 한국을 떠난다고 통보하니 좀 기분이 별로예요.


예쁜 애가 촉촉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콧방울이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주변에는 앞 뒤로 누구 하나 지나가는 사람 없이 조용했다. 오가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용기를 내어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윗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녀에게 위로의 스처가 되고 싶었다. 그녀가 내 입술에서 입을 떼고 엄지손가락으로 통통한 입술을 훑어냈다. 하지만 그녀의 어깨는 여전히 내게 더욱 다가와 있었다.

나는 한 손으로는 가슴과 가슴이 맞닿을 듯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부드러운 턱을 들어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을 한껏 베어 물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그녀의 입술이 내 온몸을 빨아 들리는 것 같았다.

침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그녀에게 나는 살뜰히 위로의 말을 건넸다. 예쁜 애는 내 손가락 사이를 집요하게 하나하나 파고들어 휘감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온몸이 쭈뼛 섰고, 아무것도, 누구도 끼워 넣고 싶지 않을 만큼 이 구름다리, 이 길에, 예쁜 애와 나만 서있는 것만 같았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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