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그럼..안계시면 그냥 돌아..갈게요.
길태는 뒤돌아서서 쏜살같이 도망갈 태세다.
- 아, 잠깐. 그러지 말고 잠깐 들어올래요?
여자는 길태의 팔을 붙잡으며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앙상한 팔목의 길태는 휘청인다.
- 박길례 할머니는 이제 여기 안와요. 전할 말이 있으면 저에게 하셔도 됩니다.
여자는 초록대문의 비밀번호 1212를 누르고는 길태를 이끌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거절이란 걸 해본 적 없는 길태는 여자의 손에 의해 어물쩡 집안으로 들어섰다.
- 아, 들어오기 전에 이 덧신 신으시고, 여기 이걸로 손 소독하고 들어오셔요.
손소독젤을 듬뿍 펌핑해서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를 애절한 남녀의 손장난처럼 세세히 문질문질 하던 여자가 손소독젤을 기태에게 건네줬다. 집안은 봄 온기로 가득했고 기품 있는 벽화가 천정까지 이어져 있어 더욱더 신비롭게 느껴졌다.
- 이번에 새로 인테리어 했어요. 그림 볼 줄 아세요?
여자는 우유 한 잔을 따라서 마시며 소파에 앉아 웅장한 거실모습에 압도당한 길태를 세세히 훑어본다.
- 아참, 나만 마시고 있었네. 마실 거 한잔 줄까요?
- 아, 감사, 고맙습니다.
길태는 목이 탄지 받자마자 우유 한잔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 옛날 추성도 교수가 따라 준 그 초유 맛이다. 여자는 입술에 하얀 초유를 촉촉이 적시며 다시 한 번 길태에게 어떻게 왔냐며 묻는다.
- 저 이거. 박길례 어르신.
청년은 신라에셋생명 가좌지점의 문자메시지를 열어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 2년 전부터 이런 게 와서 제 통장에 모여 있었어요. 아무래도 박길례 어르신 부금 같은데 연락이 없으셔서.
청년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어눌하게 더듬고, 두서없이 말하던 청년이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아주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 몇 달 전에 알게 되었습니다. 박길례 어르신 댁이 여기 같아서 혹시 이런 연금을 갖고 계신 게 아닌가 하고 찾아왔어요. 연락처는 몰라서요. 가좌동에 80세 박길례 어르신은 흔한 게 아니라는 생각에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 어머, 정말이요? 박길례 생일 쿠폰도 왔네요. 와우, 돈이 꽤 많이 들어와 있었네요. 아마 그 4백만 원 부금은 먼저 떠난 남편이 박길례 할머니에게 남겨준 연금이었을 거예요. 그 돈이 당신한테 그동안 쭉 잘못 입금되었나 보네요. 이걸 하나도 빼서 쓰지 않고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요? 와, 대단하네요. 인정, 인정. 아마 그 옛날에 박길례는 은행, 적금, 연금 그런거 잘 몰라서 그 돈이 당신 통장에 잘못 들어갔었는지, 어쨌는지도 몰랐을 거예요. 근데 처음부터 은행에 알리지 않은 이유가 뭐죠?
- 어..그건, 처음에는 좀 욕심이 났고,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워졌습니다. 이제야 돌려드리게 돼서 죄송합니다.
- 이해가 되요. 나라도 그랬을 것 같아요. 이렇게 안 쓰고 가져오셨으니 멋진대요.
여자는 조심스럽게 청년을 살피며 혹시 추성도 교수를 아느냐며 작은 액자 하나를 보여주었다. 길태가 아는 그 추성도 교수다. 생명공학교수. 가좌도서관에서 강의를 하던 그 교수님.
- 알고 있습니다. 교수님. 가좌도서관에서 뵈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집안을 살피며 교수나, 그의 부인 박길례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집안에는 어디에도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3~40대처럼 보이는 활동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여자가 박길례 할머니를 대신해서 길태 앞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여자는 길태를 곁눈질로 살펴보다가 처음 볼 때부터 어디서 만난 것 같아 궁금했으나 이제야 궁금증이 풀린 듯 놀라움에 입을 담지 못하고 무릎을 탁 쳤다.
낯이 익다 생각하여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는데, 이제야 생각이 났다. 남편과 함께 다니던 급식봉사에서 마주쳤던 어린 길태에게 매번 갈빗대 하나씩을 더 얹어주던 그날들을 여자는 기억해냈다.
- 가좌 고등학교 다녔지요? 기억이 나요. 거기 급식 봉사를 자주 나갔어요. 아, 여전하시네요. 한 7~8년 전쯤 된 것 같은데. 갈비탕 한 국자 듬뿍 얹어주면 맛있게 먹던 학생이었어요. 당신은.
길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해내는 여자가 신기하고 놀라웠다. 전혀 기억에 없던 자신의 일을 자신도 아닌 사람이 그토록 상세히 기억하고 있다니 당황스러웠다. 또 한편으로는 아무도 알리고 싶지 않는 찌질한 학창시절, 그때의 기억들을 다시 돌이켜보는 게 치욕스럽기도 했다. 길태는 교수님 이야기를 꺼냈다.
- 저는 가좌도서관에서 만나 뵌 교수님 생각이 나요. 신비로운 생명과학이야기, 나노리터 분할 이야기, 그 교수님의 인공초유도요.
그 당시 길태는 추성도 교수의 강의를 인상 깊게 들으며 추성도 교수의 연구 논문까지 찾아보곤 했었다.
여자도 그날을 기억해냈다. 남편이 집에 오자마자 처음으로 어느 청년에게 초유를 조금 따라줬다고 흥분하며 말했던 적이 있었다. 어쩌면 외로운 아내를 위한 추성도 교수의 거대한 플랜은 그날부터 시작되었던 건 아닐까. 청년을 대추나무 집으로 오게 만들 수 있는 거대한 플랜. 지하에 있는 배합기를 이용해서 그의 연구를 마무리하길 바라지 않았을까. 그가 만든 초유와 극도의 무균이 박길례를 젊은 아르테미스로 만들 수 있다는 걸 당시는 아무도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 이제 모아놓은 잔액으로 당신이 원하는 걸 하세요.
부금 4백만 원은 앞으로 또다른 다른 사람에게 쓰일 것 같네요.
젊어진 박길례는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시간들을 어떻게 재밌게 보낼까 생각했다. 그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연금으로 재밌는 덫을 새롭게 시연할 것이다. 젊어진 아르테미스 박길례는 오늘 거리에서 만난 어느 가난한 시인을 떠올렸다. 시인은 맹랑하게도 비록 가난하더라도 평생 시를 쓰며 살고 싶단다. 시인은 원래 가난하다며 딱 먹고 살만큼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시상에 집중하며 살고 싶어했다. AI가 스스로 작사 작곡을 하고, 가수로 데뷔한다는 21세기에 시인이라니.
이제 한없이 늙지 않을 박길례는 부금 4백만 원을 이용해서 가난한 시인에게 어떤 덫을 놓을까?
재밌는 생각에 그녀는 80수 샤틴 침구에 누워 깔깔거리며 밤새 이불킥을 했다.
한편, 길태는 그동안 말 한 번 건네지 못한 가좌도서관 어여쁜 사서와 함께 신라호텔 더파크뷰 뷔페에 앉아 도란도란 나노리터 분할과 인공 락토페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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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 발신]
카카오 533****1250
08/11 12:12 입금
부금 1
4,000,000원
잔액 –3,00123원
낮과 밤이 바뀐 가난한 시인은 밤마다 머릿 속을 떠도는 시상의 사정을 찾느라 아침에서야 잠이 든다. 먹다남은 컵라면과 소주병 사이로 배터리 3 %밖에 남지 않은 시인의 핸드폰에 알 수 없는 문자 메시지가 깜박이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