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100% 허구로 지어진 단편소설임을 밝힙니다.
서울 여자 영애.
영애는 여리거나 또는 당찬 여자다. 늘 가운데 가르마의 똑 단발로 대학로를 누비던 영애는 극단의 에이스다. 스무 살 때부터 기타 하나를 매고 뮤지컬 무대에서 뼈를 갈아 넣을 것처럼 살았으며 남자 선배들의 온갖 추파와 지지를 한 몸에 받은 잔다르크 같은 여자였다.
그런 영애 앞에 어느 날, 늦깎이 연기지망생 촌뜨기 최민식이 나타났다. 콧등의 깨알 같은 점까지도 섹시했던 영애에 비해 민식은 연기 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푼내기 같은 면이 많았다. 이를테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같은 옷을 닳아질 때까지 입는다던지, 시골의 바람둥이 기둥서방처럼 아무리 추워도 겉옷 단추를 채우지도 않고 낡은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폼을 잡으며 허세를 부린다던지, 서울 지리를 잘 몰라서 자주 길을 잃고 헤매면서도 재밌어한다던지, 모두가 교통카드로 결제하는 버스비를 민식은 항상 버스 안에서 허둥지둥 동전을 주섬주섬 낸다던지. 뭔가 촌스럽고, 서울살이가 어쩐지 어설펐다. 하지만 술이 한잔 들어가면 날이 저물 때까지 마시며 길거리로 나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자유를 찾은 쇼생크탈출의 주인공처럼 양팔을 벌리고 도로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돌아다니는 패기 넘치는 청년이었다. 그런 민식의 모습이 웬일인지 영애에게는 순수한 소년처럼 느껴져서 자주 신경이 쓰이고 마음의 회로가 자꾸만 민식에게로 향했다.
- 영애야, 집에 데려다줄게. 가자.
늦게까지 공연 연습이 있던 날이었다. 늘 깍듯이 영애선배로 부르던 민식이 영애에게 선배가 아닌 영애로 부르던 날,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마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영애야'가 얼마나 심장을 쿵 내려앉게 하던지. 검디 검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끝을 한번 튕기며 '영애야'하던 날, 민식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 영애는 놓치지 않았다. 유난히 깊은 쌍꺼풀과 커튼처럼 길고 짙은 속눈썹의 민식은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영애를 자신의 눈앞에 한참 동안 세워두었다.
모두가 떠난 무대 뒤에서 영애는 기름진 민식의 눈꺼풀을 검지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평상시에 한 번쯤 만져보고 싶었던 그의 눈꺼풀을 드디어 건드려본다. 촉촉했다. 그때마다 깊고 깊은 민식의 검은 눈동자가 영애를 어찌나 집요하게 따라다니던지. 떨리는 민식의 입술이 영애의 입에 닿을 때, 민식의 입술이 얼마나 흥건하던지. 영애는 그날 처음으로 무대 뒤 커튼더미에 촌뜨기 민식을 밀어 넣고야 말았다.
그날 이후 민식은 이마가 훤이 보이게 쭈뼛 솟은 숱 많은 언더컷 머리 스타일을 하고, 일 년 열두 달 입고 다니는 카키색 야상점퍼 속에 영애를 넣고 그렇게 매일 영애의 집이 있는 상계동 꼭대기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민식의 야상점퍼에서는 언제나 군고구마 냄새가 났다.
- 드디어 독립이야!
스카이원룸 102호. 드디어 부모 밑에서 독립을 하고 방을 얻어 나오게 된 영애는 신사역 근처 작은 원룸에 독립의 터를 잡았다. 그들은 이제 막 시작하는 독립의 달콤함에 빠졌고, 하늘과 맞닿는 곳의 푸른 파라솔과 알라딘에 나오는 요술 패브릭을 펼쳐놓을 그들만의 테라스를 꿈꿨다. 그러나 결국 신사역 10분 거리의 소소한 원룸을 얻으며 아쉽지만 앞으로 함께할 그들의 빛나는 미래를 도모했다. 영애는 그 당시 새로이 직장을 다니며 밤에는 극단에서 뮤지컬 배우로 한 단계 한 단계 오르고 있었기에 일거리가 많은 도심 한복판에 터를 잡아야 했다. 영애에게 직장생활이란 단순한 돈벌이 수단이었고, 무대에 서는 일이야말로 그녀에게는 숙명이었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