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식이 사랑에 빠지다. 9

그날 그때 그 후 BMW

by injury time

# 이 글은 100% 허구로 지어진 단편소설임을 밝힙니다.


민식은 소파에 누워서 생각 없이 리모컨만 만지작거렸지만 실은 하루종일 시간을 체크하고 있다. 하루가 일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드디어 저녁 10시, 히든을 만나러 도산공원으로 향했다.

도산공원은 소싯적 단원들과 소주를 까고, 밤새 뛰어다니고 날아다녔던 곳으로 그 시절, 그 후로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곳이다. 공원 벤치나 나무들은 새롭게 바뀌었지만 작은 공중전화박스는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그 공중전화박스에서 민식은 그 옛날 영애와 한밤에 섹스를 했다. 까만 새벽녘이었는데 영애의 체크무늬 주름스커트를 걷어올릴 때 공중전화 수화기가 우당탕 떨어져 대롱대롱 흔들렸던 게 생각났다. 지금은 그 공중전화박스에 있던 전화기는 사라지고 빈 음료캔만 나뒹군다.

민식은 차 안에 앉아 몇십 년 전의 그날들을 추억하며 히든을 기다렸다. 도산공원 안쪽의 작은 호수에서 물안개가 피어나 공원 오솔길까지 하얀 안개가 반짝이며 흐르고 있었다. 가로수 불빛에 비친 물안개는 극지방의 오로라처럼 다채로운 색을 만들었다. 형형색색의 오로라 빛이 민식의 차창 속으로 들어와 민식을 어루만졌다.

2024년의 늙고 나른한 민식의 모습은 푸른 안개와 함께 젊었을 청년의 그 어디쯤에 와닿아있는 듯한 몽환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날들이 몹시도 그리웠다. 그 시절이 생각나서 히든을 찾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히든은 그 옛날 영애를 닮았다. 영애는 민식이 결혼을 할 때쯤, 불현듯 극단을 떠났고 다시는 소식을 알리지 않았었다.


민식은 선루프 버튼을 눌러 하늘의 반쯤을 열었다. 까만 밤하늘에 별이 두어 개, 아니 대여섯 개 박혀 날카롭게 민식을 향해 반짝였다. 그가 필립모리스에 불을 댕긴다. 치익 소리를 내며 마른 연초잎이 뜨겁게 타들어갔다. 히든이 올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까맣게 선팅 한 BMW 차 안 선루프에서 끊임없이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도산공원 주차장에는 드문드문 주인을 잃은 차들이 쥐 죽은 듯 졸고 있었고, 민식의 BMW는 오래된 목탄기차처럼 연기를 내뿜으며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태세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히든은 나타나지 않았다. 폰으로도 수십 번 연락이 되지 않자 민식은 기어이 기어를 D로 놓고 엑셀레이터를 조금씩 밟았다. 엔진 소리를 죽이며, 물안개를 가르며 차가 조금씩 움직인다.


민식은 갈 길을 잃었다.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민식은 생각 없이 도산공원 주차장을 빠져나와 한남대교를 한 바퀴 돌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히든은 보이지 않고 텅 빈 주차장에는 더욱 어두운 칠흑만 남아 있었다.

민식은 점점 히든이 걱정되기도 하고, 또 괘씸하기도 하고, 또 이 현실이 꿈같기도 하고, 아니 어쩌면 어젠가 겪었던 일인 것도 같은 데자뷰 같기도 한 기묘함에 빠져 정신을 잃고 테헤란로를 향해 달려 나갔다. BMW는 신호에 걸리고 싶지 않은지 직진과 우회전을 반복하며 쉴 새 없이 달려갔다. 잠시도 서서 주춤하고 싶지 않아 드넓은 대로를 돌고 돌고 돌았다. 마치 젊은 시절 술에 취해 끝도 없이 대로 한복판을 뛰고 달렸던 치기 어린 순간들이 떠올랐다.


목탄 기차처럼 필립모리스 향을 내뿜으며 그날, 그때, 그 후로 그의 BMW는 어느덧 도심 속 어느 골목을 헤매고 있었다. 가로등 밑에 어느 낯익은 단발머리 아가씨가 골목 귀퉁이에 서서 주차기둥을 툭툭 발로 차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아무도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늦은 밤이었다. 골목을 지나 한 바퀴 돌아 다시 그 자리에 도착할 때쯤 그 단발머리 아가씨가 전화기를 들고 두리번거렸다. 민식은 불현듯 차 안의 조도를 최대한 어둡게 내리고 그 아가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차창문을 조심히 조금 열었다.


- 저기,....... 시간 되면 같이 술이나..... 한잔 할래요? 만나기로 한 사람이 연락이 안 되네요. 흐흐..


민식은 끝내 이어질 인연의 끈에 묶인 듯 생전 처음 보는 젊은 여자에게 다가가 인생 최대의 얼토당토않은 미친 짓을 하고 말았다. 단발머리 젊은 여자는 검정 스웨터깃을 꽁꽁 여미며 못 들은 척 뒷걸음질로 자리를 피했다. 민식은 여자를 지나 크게 골목 한 바퀴를 다시 돌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한번 여자 옆에서 차창문을 열었다. 여자는 어두운 차 안의 민식을 알아보지 못한다.


- 아니에요. 아닙니다.


여자의 피어싱 한 하얀 귓바퀴가 달빛에 반짝였다. 영애였다. 민식이 차창문을 열어 입을 때렸는데 그녀는 빠르게 저 멀리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어느 청년의 품에 안겨 어두운 밤하늘과 함께 사라졌다. 민식은 꿈을 꾸듯 한참이나 그 골목 귀퉁이에 서서 영애가 사라진 쪽을 찾아 헤맸다. 그게 정말 영애였는지, 영애를 닮은 그냥 아가씨였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민식은 그날, 그때, 그 밤에, 분명 그 옛날 영애와 재회했다.


민식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잃었다. 한동안 망망대해에 혼자 떠있는 작은 돛단배 같이 흔들리다가, 거대한 수레바퀴에 짓눌려 헐떡거리다가, 드디어 결심한 듯 우회전 깜빡이를 켜고 도산대로를 힘차게 달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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