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식이 사랑에 빠지다. 10
터키커피와 스파클링 와인, 그리고 카나페
by injury time Dec 20. 2024
# 이 글은 100% 허구로 지어진 단편소설임을 밝힙니다.
민식의 눈꺼풀을 몇 번이나 쓰다듬었는지 모른다. 영애는 목구멍 안으로 마지막 작별 인사를 꾸역꾸역 삼켰다. 민식의 우람한 가슴 위로 영애의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영애는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에는 자꾸만 눈물이 고였다. 이제는 서로가 사랑 없는 감정이 되었다는 자괴감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때는 식어버린 사랑인 줄 알았다. 이제 막 떠오르는 신예 영화배우는 만인의 연인이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손등에 자라난 거추장스러운 사마귀였을지도 모른다. 앞만 보고 달리는 민식을 위해, 각자 다른 길을 택한 그들을 위해 오래된 연인은 말없이 온 힘을 다해 헤어지는 중이다. 영애는 민식의 속눈썹과 쌍꺼풀과 부드러운 머릿결과 땀으로 끈적이는 손가락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며 열심히 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민식이 멜버른으로 올 로케 영화를 찍으러 떠다던 날, 그녀는 민식의 아파트에서 자신의 작은 소지품을 챙겨가지고 나왔다. 민식은 알아채지 못하는 은밀한 이별이었다.
갈 곳을 잃어 막막해진 영애는 그동안 한 번쯤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던 히든바 더 서클로 향했다. 오다가다 그곳의 작은 간판을 보긴 했는데 번번히 입구를 찾지 못해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민식과 함께 가보자고 약속했던 기억이 났다. 더 서클은 근처에 스타벅스 매장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고, 곳곳에 프랜차이즈 카페와 술집이 즐비했으나 영애는 굳이 그 어둡고, 가파른 계단을 더듬더듬 올라가 히든바 더 서클의 입구를 열었다.
더 서클은 묵직한 통나무 미닫이 문으로 되어 있었다. 뿌연 격자 창문이 4개 있었는데 그 안으로 주황색 조명이 띄엄뜨엄 흔들리는 게 보였다. 평범해 보이는 매장 안에는 혼자 앉아 있는 창가 손님과 반대편 귀퉁이에 남녀 커플이 앉아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디에 앉을지 두리번거리고 있는 영애에게 바텐더 앞에서 노닥거리던 주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눈인사를 하며 편한 자리에 앉으라고 안내를 했다. 여인은 구부정한 어깨에, 얼굴에선 창백할 정도로 빛이 나고, 가닥가닥 발레이아주 염색을 한 듯 희긋희긋한 긴 웨이브를 하고 있었다. 헨젤과 그레텔에 나올법한 마귀할멈이 요즘 시대에 살았다면 그런 모습일 것 같은, 늙거나 청초한 여인이었다. 루프탑으로 나가는 쪽이 눈에 띄었다. 영애는 이파리가 무성한 올리브 나무를 지나 테라스로 나갔다. 그리고 2인용 나무체어에 앉아 여인이 넘겨준 메뉴판을 살폈다.
다양한 와인, 그리고 간단한 핑거푸드들이 메뉴판에 보기 좋게 나와 있었다. 영애는 신중히 메뉴를 고르다가 메뉴판 끝자락에 '오늘의 특별 메뉴 터키 커피'를 발견했다. 원두를 곱게 갈아서 필터 없이 끓여내어 놓는 커피라니 생소하고 궁금했다. 영애는 터키 커피 한 잔과 스파클링 와인, 그리고 무화과 카나페를 주문했다. 주문을 받은 여인은 커피를 마신 후 커피잔 점술을 봐준다는 약속을 하고 사라졌다. 영애의 탁자 옆에 알록달록한 페브릭이 저물어가는 태양빛을 반쯤 가리고 서서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휘날렸다. 민식과 함께 자주 속삭이던 그런 테라스였다.
잠시 후 신화 속 용과 불사조가 정교하게 핸드페인팅이 되어 있는 청록색 웨지우드 커피잔 세트에 진한 터키 커피와 방울방울 기포가 터지는 스파클링 청포도 와인, 고소한 풍미가 나는 카나페 한 접시가 영애의 테이블에 세팅되었다.
영애는 민식이 없는 시간들을 어떻게 보낼지 궁리하며 커피잔을 들었다.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늘 함께 할 것을 염두하며 지냈던 연인들의 습관들은 이제 모조리 청산해야 한다. 이제 혼자 뭐든 고민하고 해결해야 한다. 기쁨과 슬픔과 노여움과 즐거움을 그와 함께 공유할 수 없다. 오롯이 혼자 그 많은 감정들을 소진해야 한다. 지금 마시고 있는 이 신기한 터키 커피도 이제는 그와 나눌 수 없다. 영애는 최대한 기쁘거나 슬프거나, 화나거나, 즐겁지 않게 지내리라 다짐하고 다짐했다. 그 감정들이 생길 때마다 민식이 그리울게 뻔했다. 영애는 이제 웃고 싶지 않고, 울고 싶지 않은 기계인형처럼 살리라 다짐하며 터키 커피를 후루룩 조심스럽게 목 안으로 넘겼다. 아메리카노보다는 진하고, 에스프레소보다는 부드러운 터키식 커피는 한 모금 마실 때마다 그의 정액을 삼킬 때처럼 입안이 알싸해졌다.
그리고 어느덧 커피잔이 바닥을 보일 때쯤 늙거나 청초한 여인이 영애 앞에 다가와 다정하게 앉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