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한 체취 4.

붉은 살덩이

by injury time

꼬마 그레이프는 내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내 얼굴 여기저기를 핥기도 하고, 심지어 발가락 사이사이를 혀로 날름거리며 맛보다가 어느새 사라져 야무지게 식빵을 구웠다. 발끝까지 하얗고 뽀얀 그레이프는 등 두덩이 만큼은 고소한 베이지색을 띠고 있어 웅크리고 있으면 정말 맛있는 식빵 같았다. 고양이 키우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레이프는 매번 내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문 앞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기지개를 한껏 켜고 다가와 내 몸 여기저기를 까끌거리는 혓바닥으로 구석구석 핥아주었다.


그러다가 심심해지면 평소 끄적거리다가 던져놓는 4B연필을 굴리며 놀곤 했다. 4B연필은 녀석의 최애 놀잇감이었다. 녀석은 연필을 앞발로 굴리며 달려왔다가 바람처럼 도망치기도 하고, 얼굴로 내 발바닥을 애정을 담아 핥기도 하면서 나와의 삶에 잘 적응하는 듯 보였다.


그런 그레이프를 나는 틈틈이 스케치북에 담았다. 여러모로 취약한 나와 다르게 녀석의 움직임은 재빠르고 가볍고 탄력 있어 보였고, 그런 신비롭고 역동적인 녀석이 나는 부럽고 사랑스러웠다. 녀석을 자세히 관찰하여 스케치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레이프를 관찰하다 문득 든 생각이 있다. 다소 잔인한 생각인지 모르지만 그레이프의 맑은 눈동자 안에 물결이 가득 일렁일 때면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그런 끔찍한 호기심이 생기는지, 가끔 그 녀석의 찰랑거리는 눈동자에 예리한 바늘 하나 쿡 찌르면 눈동자에서 세상 그지없는 맑은 슬픔이 쏟아져나올 것만 같다는 생각. 하지만 저리 살아서 숨 쉬는 아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나는 그저 그런 생각을 그림으로 그려 남길 뿐이었다.


그레이프는 베란다 창 가까이에서 마치 저 멀리 수풀에 숨은 동료들을 지켜보듯 그렇게 물끄러미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그 시간들이 오롯이 그레이프 삶의 루틴 같아서 방해하지 않고 그 시간들을 지켜주었다. 그 흔한 캣타워나 캣휠, 숨숨집, 스크래처는 엄두도 낼 수 없었으니 나로서는 그레이프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였다.


일상이 나른한 그레이프가 베란다 가까이 다가가 앉을 때면 바깥세상의 추억을 되새기는 것 같았다. 녀석이 웅크리고 앉아 고독을 즐기고 있으면 그게 어찌나 대견하던지, 이 우주 속에 오롯이 자신밖에 없지만 아주 의젓하고 멋있는 녀석 같아서 경외감이 들곤 했다. 꼬마 그레이프처럼 나도 자주 베란다 창가에 앉아 그 시간을 같이 즐기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느 날, 침대에 같이 누워 밤새 바깥 야경을 보고 있을 때였다. 우리 둘은 함께 하지만 각각 혼자의 시간을 보냈다. 꼬마 그레이프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따라가 눈길을 두었다. 야경 사이로 저 멀리 어느 오래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집집마다 창문으로 불빛이 오종종 빛나는 모습이 마치 구멍 뚫린 화구처럼 뜨겁게 느껴지는 그런 상가건물이었다.

그레이프를 따라 한참을 바라보던 그때 작은 구멍 하나가 갑자기 크게 확대되더니 눈앞에 훅하고 켜졌다 꺼졌다.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그레이프를 내려다보았다.

순간, 녀석의 눈동자가 다이아몬드 박힌 검은 눈으로 변해 있었다.

갑자기 소머즈의 눈동자처럼 어두운 세상에 핀조명이 켜진 듯 그레이프가 바라본 어느 한 부분이 바로 앞집처럼 내게 선명하게 보였다가 사라졌다. 나는 두 손으로 동그랗게 안경 모양을 만들어 그 오래된 상가건물을 다시 찾았다. 그 집은 고깃집 상가건물인데 장사가 끝났는지 간판도 꺼져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사실 어느 쯤인지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의 건물이었다. 그 건물의 어느 한 창문이 내 눈앞에 아주 가까이 들여다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그레이프와 나는 멀리서도 그걸 보았다. 흔들리는 붉은 살. 나도 모르게 꼬마 그레이프의 눈을 손아귀로 재빠르게 가리려 했다. 그레이프는 내 손아귀가 귀찮은 듯 고개를 돌리더니 기지개를 켜고 내 발밑으로 자리를 옮겨 처연히 몸져누워버렸다.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그레이프의 부드러운 귀밑머리를 몇 번 쓰다듬다가 다시 한번 그 집을 찾아냈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 안경을 만들었다.

얼굴 근육에 오욕의 경련이 일어나며 입 안이 얼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구토가 나올 때 느끼는 증상이다. 구토를 삼키면서도 나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어떤 시선과 마주친 것 같아 얼른 고개를 숙였다.

심장 위로 돌덩이 하나가 올라간 듯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 붉은 살덩어리. 식자재마트 황상미 여사였다. 붉은 하마처럼 늘어진 뱃살을 내밀고 있는 황상미 여사. 황여사가 우리 롯데캐슬 제일 비싼 스카이라인에 살고 있는 걸 인적 사항 페이퍼에서 보았던 게 기억났다. 다양한 포르노를 섭렵했어도 주위 사람의 정사 장면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 후로 나는 손가락 안경을 만들어 밤마다 바깥세상 사람들을 염탐하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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