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한 체취 5.

서걱서걱 비누 깎기

by injury time

꼬마 그레이프가 매일 밤 식빵을 구우며 밖을 보는 건 어쩌면 우주의 어느 세계를 향한 호기심이었을까. 내 시야는 기묘하게도 예전보다 더 밝아져 안 보이던 많은 것들이 집중하면 할수록 새록새록 보이기 시작했다. 하얀 눈동자 안에 검은 다이아몬드가 작아졌다가 커지는 순간 기묘하게도 세상이 눈부시게 밝아지며 이웃의 사정들이 자주 보였다가 사라졌다.


내가 베란다 창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레이프는 배를 보이며 능청스럽게 뒹굴뒹굴했지만 녀석의 신비로운 능력은 이미 나에게 들통났다고 본다. 꼬마는 마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미물에 지나지 않다는 듯 불현듯 방충망에 날아든 작은 무당벌레를 발견하고는 포효하듯 훌쩍 날아올라 무심하게 무당벌레의 정수리에 날렵하게 펀치를 날렸다. 그때의 녀석 눈동자는 커다란 천왕성처럼 검고 깊고 푸르렀다. 부럽게도. 그리고 태연하게도.


밝아진 눈으로 본 세상은 밤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다양한 일들을 벌이고 있었다. 어떤 집 창문을 통해서는 밤마다 TV를 보며 딱 붙는 쫄쫄이를 입고 에어로빅을 하는 할머니도 있고, 어떤 집은 매일 밤 게이 파티를 하는 집도 있었고, 또 어떤 집은 밤새 부수고 멱살잡이하며 싸우는 부부도 보였다. 그 부부는 다음날, 다시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 일 없던 듯 어린 아기의 재롱을 깔깔거리며 지켜보았다. 어느 집 창문으로 본 어느 앳된 남학생과 여학생은 거대한 사랑을 약속한 듯 작은 캔들로 하트무늬를 만들어 고백을 하고는 그 틈에 승냥이 같은 녀석이 여학생의 손바닥 만한 들꽃 무늬 팬티에 손을 넣기도 했다. 내 눈이 얼마나 밝아졌는지 최근에는 앞섶에 작은 리본과 구슬이 달려있는 귀여운 팬티의 소녀였다는 걸 알아챌 정도였다.


창문을 통해 바라본 타인의 하루가 내 눈에는 흥미로운 영화나 웹툰처럼 보였다. 하루하루 새로운 엿보기를 하는 동안, 일자리 계약이 마지막 달을 남기고 있었다.

어느 날, 주민센터에서 물품 지급이 있다고 방문하라는 연락이 왔다.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걸 생각해 보셔요. 롯데캐슬에 이제 503호밖에 남지 않았어요. 모두 나이가 드셔 세상을 떠났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들어와 살아도 된다고 하더니, 담당자가 바뀌고 나니 이 집에서 나가란다. 더 넓은 평수의 외곽으로 알아봐 준다고까지 했다. 나는 생각해 보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이어 곧바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수급자들에게 물품을 나눠주는 행사를 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얼마 후 주민센터에서 우편으로 뭘 잔뜩 집으로 보내왔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원치 않은 불편한 침입이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택배 열기가 귀찮아져서 한동안 어머니가 그토록 마음에 들어 하신 그 네모반듯한 신발장 앞에 택배 상자를 방치한 채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일상처럼 퇴근 후에 오뚜기 3분 카레를 따듯하게 데워서 쓱쓱 찹찹 깔끔하게 먹어 치우고, 베란다에 서서 유유히 레쓰비를 홀짝 대고, 그레이프와 쥐잡이 놀이를 하며 널브러져 있었다. 최근에는 그레이프를 따라 하며 고독을 즐기는 사이 내 후각과 미각은 어느새 그레이프만큼이나 예민해져서 신기하게도 3분 카레 속 이븐하게 익은 당근의 맛까지 알아차릴 정도가 되었다. 나는 저녁을 먹고 난 후 나의 비릿한 발가락과 손가락과 얼굴과 이마와 목덜미 핥기에 한동안 심취해 있다가 웁스! 저 택배..


눈동자가 고양이 눈으로 변하는 순간, 나는 택배 상자 틈에서 작은 생명체가 꾸물꾸물 기어 나오는 걸 포착했다. 그레이프가 먼저 그것을 발견하고 쏜살같이 달려가 코를 박고 발길질을 해댔다. 나도 가까이 다가가 상자 주변을 살펴보았다. 하얗고 가느다란, 먼지나 옷에 붙은 실밥처럼 작은 생명체 하나를 발견했다. 생명체는 열심히 도망갔고, 그레이프는 그놈을 여지없이 짓이겨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역시 그레이프는 사나운 육식동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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