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발처발
신발장 앞에 털썩 주저앉아 상자 속 물건들을 확인했다. 상자를 여는 순간, 오래된 묵은 냄새가 코끝을 탕, 하고 자극했다. 이 냄새는 짐짓 쌀 포대에서 풍기는 전분 냄새 같기도 하고, 물에 씻긴 묵은지 냄새 같기도 했다.
나는 코를 막고 택배 상자 안을 살폈다. 두루마리 휴지, 샘표 양조간장 501, 5킬로 백미, 비비고 삼계탕, 다시마 한 장이 들어있었다. 어디에서 이 냄새가 나는 것인지, 그리고 작은 생명체는 어디서 나왔는지 살펴보았지만 그레이프도, 나도 그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냥 그 상자 속 모든 물품들에서 그 냄새가 났으니까.
상자 안에는 매년 럭키식자재마트에서 후원해 주신 물품으로 민원인들의 건강한 하루를 기원한다는 내용의 메모가 들어있었다. 과연 모든 물건들은 황여사의 식자재마트 물건들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쓰다 남기고 간 집안의 오래된 물건들, 간장이나 식용유, 참기름, 세제, 치약들은 럭키식자재마트 가격표가 붙어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그 물건들을 한번 손으로 집는 순간 풍겨 나오는 그 텁텁한 냄새, 물에 담긴 묵은 김치 냄새가 은근히 내 비위를 상하게 했었다.
창고에 쌓아놓고 있다가 새삼스레 발견한 잊혀졌던 물건들을 처분한 듯 럭키식자재 마트의 기부 물건들은 하나 같이 오래되고 눅눅했다. 버려진 걸 주워먹는 기분이 들어 불쾌하고 초라한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아무것도 모르고 고맙다며 드시거나 아껴 쓰셨을 걸 생각하니 자괴감이 가슴속에서 치받쳤다.
나는 그것들을 그대로 손에서 내려놓고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그것들을 그 자리에 두고 지켜보았다.
정리하지 않고 방치한 택배 상자에서 간간이 생명체가 꾸물꾸물 기어 나오는 걸 지켜보며 며칠을 보냈다. 생명체는 보일랑 말랑 작고 여리게 움직였고, 그것들을 그레이프는 안보는 척하다가도 우다다다 뛰어가서 한방에 없애버렸다. 그레이프의 핑크 젤리는 매번 작은 생명체의 심장을 매섭게 주물러 터뜨렸다. 그 생명체의 심장이 터지는 순간 쏟아지는 텁텁한 냄새를 그레이프는 알뜰히 핥아먹었다.
럭키식자재마트 기부물품들에서 새어 나온 것들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은 텁텁한 냄새로 싱크대와 주방, 욕실 근처에 꾸덕꾸덕 말라 집안뿐만 아니라 내 온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나는 어느덧 그것들이 끈적해졌다가 말랐다가 결국 화석처럼 단단해져 하얀 가루로 부서질 때까지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어차피 이 집에 그레이프와 올라와 누울 침대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정리의 의욕도 청소의 구실도 내게는 생겨나지 않았다. 괴롭힘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점점 나는 그레이프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대로,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리며 리프레시에 온 힘을 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무기력해져갔다.
어느 날, 퇴근 후 집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드디어 마지막 근무 날이었다. 직원들이 간단한 퇴사 선물을 손에 쥐어줬고, 나는 작은 숄더백에 그동안의 사무실에서 쓰는 통상적인 개인용품, 이를 테면 양치용품과 클리어파일 몇 개, 실내용 슬리퍼, 우산 등을 챙겨 나오는 중이었다. 시원섭섭했다. 계약 후 첫 출근하는 날부터 손꼽아 기다리던 퇴사의 날, 이제는 기다릴 날들이 사라지는 게 허전하기도 하고, 출근하지 않는 날들에게 대한 기대로 머릿속이 벅차왔다.
지하 3층에서부터 엘리베이터 한 대가 올라왔다. 그리고 팅, 하고 내 앞에 묵직하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기도 전부터 코끝을 강탈하는 매운 냄새. 그 오래된 조미김의 묶은 기름 절은 냄새와 알싸한 생강의 뜨거운 향신료가 섞인, 짙고 매운 향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내가 그동안 살면서 맡았던 모든 향수의 총량을 모두 모아 흩뿌린 듯한 진한 우드 머스크향이 내 온몸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 안에 그 오만한 체취로 처발처발 그 여자가 그곳, 거기에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