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이야기 -3
어느덧 T와의 연애도 1개월이 다 되었다.
1개월 기념으로 그는 호텔에 식사 예약을 해두었다고 했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비싼 돈을 먹고 밥을 먹으러 가는 곳 이라고 하면 빕스나 아웃백정도였고 호텔에서 밥을 먹는다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 생신때 가는 곳 이라는 인식이 있을 정도
하얏트 호텔
그는 먼저 가서 운동을 하고있겠다며, 나에게는 천천히 준비하고 출발하라고 했다.
처음 가는 호텔에 나름대로 격식을 갖춰입는다고 슬랙스에 블라우스에 구두까지 신었다.
신사동까지 버스로 간 뒤 택시를 타고 하얏트호텔로 향했다.
아마도 여름이 가기 전이었던 것 같다.
적당히 눅눅한 바람이 열려있는 창으로 흘러들어왔고, 택시의 에어콘 바람과 만나 적당한 쾌적함을 만들고 있었다.
한강을 건너 녹음이 푸르게 드리운 남산을 구비구비 돌아올라가다 보니 이윽고 호텔에 도착했고, 나는 T에게 전화를 했다.
호텔에서 식사를 한다고 세상 꾸며입은 나와는 다르게 그는 반팔에 반바지 운동화 차림으로 가볍게 나왔다.
"호텔에서 밥먹는다고 꾸며입고 온거야? 귀엽네?"
T는 특유의 느끼한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헝클었다.
뾰로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렇게 T의 팔짱을 끼고 하얏트호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T의 아버지는 하얏트호텔의 회원권이 있었고 그로인해 1년에 몇 번 식사권이라던가 피트니스이용권, 숙박권 등이 제공된다고 했다.
내 첫 호텔식은 양고기 스테이크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써는 선택의 폭이 넓지가 않았고, 흔한 샌드위치보다는 뭔가 특별하게 먹어보고 싶었다.
"양고기 괜찮겠어? 잘못하면 냄새 날텐데?"
가벼운 샌드위치를 시킨 T가 나의 음식 선택에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해산물의 비린내만 아니라면 어느정도 특유의 맛이나 향이 있는 음식도 잘 먹는 편이었기에 큰 걱정은 없었다.
잠시 대화를 나누고있자니 곧 T의 샌드위치가 먼저 나오고, 곧이어 나의 양고기 스테이크도 나왔다.
갈비뼈가 붙어있는 스테이크. 민트 젤리가 함께 제공되고 가니시로 채소들도 약간 같이 제공되었다.
T는 운동이 힘들었는지 연신 '배고프다' 를 연발하며 샌드위치를 베어물었고, 내 양고기 스테이크는 한 입 먹더니 냄새때문에 먹기 힘들다며 더 이상 손대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양고기 스테이크가 어느정도 마음에 들었다. 함께 제공된 민트젤리도 좋았고, 적당히 구워나온 야채도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1개월을 기념하는 데이트로써는 너무나도 행복하고 완벽한 시간인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T는 예의 아우디A8에 나를 태우면서 "디저트는 이태원이나 한남동쪽으로 가려는데 괜찮지?"라고 물었다.
그렇게 날씨가 더우니 아이스크림을 먹을지 아니면 빵이 맛있는 카페를 갈 지 한참을 고민하면서 우리는 차를 타고 남산을 내려왔다.
한남동 근처에 거의 다 왔을 쯤 그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어 지금 애인이랑 데이트중. 어? 어디라고? 지금? 지금? 잠깐만."
불안한 예감이 든다. 우리의 데이트는 언제나 T가 친구들을 만나러 가며 끝이 났었다.
오늘은 그래도 1개월 된 기념일인데 설마 오늘도 나를 혼자 보낼까 생각을 했으나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아니 오빠. 오늘같은 날은 좀 같이 있으면 안돼? 굳이 꼭 친구들을 만나러 가야겠어?"
처음으로 그에게 볼멘 소리를 했다.
"나 이제 좀있으면 미국 들어가니까.. 친구들이랑도 만나야지."
"그 친구들이랑은 거의 매일같이 만나고있잖아."
"아니 이건 니가 좀 이해 해주면 안돼? 나 이렇게 구속당하는건 못견뎌."
그와의 첫 싸움이었고, 그와의 마지막이기도 했다.
1개월만에 처음으로 그가 나와의 데이트 도중 어딘가를 가는거에 대한 불만을 얘기한 것 치고는 그 후폭풍이 너무나도 컷다.
알고보니 T는 연애는 여자와, 관계는 남자와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가 매일 나가는 친구들과의 만남은 게이들의 술벙개였다고.
종로, 이태원 이미 나에게 장소로도 그는 확실하게 어필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T는 나의 연락을 완전히 받지 않았고, 다시 시작하자는 장문의 문자에
'첫 연애라더니 진짜 징하게 들러붙네. 징그럽다.' 라는 답장이 왔을 뿐이다.
H가 나에게 했던 경고들
T에게 너무 마음 주지 말아라. 그냥 밥 잘사주는 오빠로 생각해라
T가 하는 말을 너무 고지곧대로 믿지 말아라.
그녀는 이미 그의 그런 사실을 알고있었고, 그렇기에 내가 T에게 마음 주는 것을 경고했던 것이었다.
나는 그런 H의 경고를 깨끗이 무시했고, 그렇게 배신감과 상실감은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할 몫이었다.
첫 연애였다. H가 뭐라 하던 T를 믿고싶었다. 그렇게 1주일정도를 정말 폐인처럼 방안에서 울다가 멍하다가 울다가 멍하다가를 반복했다.
H로부터 전화가 왔다.
"야 얘기 들었어. 너 좀 괜찮아?"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목이 막히며 머리가 띵해지며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나 T를 못잊겠어. 진짜 나쁜 새낀데 근데 그동안에 설레였던 것 때문에 잊혀지지가 않는다?"
글씨로는 너무나 또렷히 적었지만 실제의 나는 엉엉 울면서 발음도 뭉개지고 말도 끊겼었다.
H는 그런 내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그러게 내가 너무 마음 주지 말랬잖아. 에휴 아니다 내가 알면서도 널 소개해준게 잘못이지. 너 착한거 알면서 내가 잘못한거다. 기분 울적하면 말해 내가 갈테니까."
한숨을 쉬며 H는 나를 얼마간 더 위로해주다 전화를 끊었고, 나는 또 그렇게 스스로를 슬픔의 바다로 깊이 밀어넣었다.
실연의 날카로운 베임이 어느정도 아물며 무뎌지기까지는 2주정도 걸렸다.
살아있으면 어떻게던 살아진다고 칩거생활을 마치고 친구들도 다시 만나러 나가기 시작했고, H는 그런 나의 모습에 특히 많이 안심했다.
그렇게 내 첫 연애. 내 인생의 첫 나쁜남자 T와의 연애가 끝났다.
몇 년쯤 후 지하철 안에서 우연히 T와 마주친 적이 있다.
서로 알아본 듯 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지나쳤다.
반갑게 아는 척을 하기에는 우리의 끝이 너무나도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며, 다시 서로의 인생에 엮이고 싶지 않아서 였다.
그렇게 그 때를 마지막으로 T는 내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