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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도 Jul 23. 2024

참혹한 현실 속에도 삶과 같이 아름다운 선율

영화 <피아니스트>(2003)

세계 2차 대전 당시, 나치를 피해 살아남은 한 유대인 피아니스트의 이야기이다.

처참한 현실 앞에서도 피아노의 선율을 잊지 않은 피아니스트의 아름다운 연주이고 계속해서 이어질 연주다.


폴란드의 라디오 공영방송에서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인 블라디슬로프 슈필만. 바르샤바에 나치의 침공이 시작되면서 방송국 건물에도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멈춰버린 피아노 연주, 무너진 방송국 건물은 그가 마주하게 될 현실을 암시하는 듯하다.


폴란드는 나치가 점령하게 되고,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탄압이 시작된다. 유대인들의 생활은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한다. 유대인이었던 슈필만은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피아노마저 팔아야 했다.

나치군들에 의해 게토로 이주하게 된 유대인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처참하다. 거리에는 굶어 죽은 사람들이 늘어가고, 유대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된다. 바닥에 떨어진 음식까지 핥아먹는 사람들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다.


나치는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이주시키기 시작한다. 가족과 함께 수용소로 이동하던 슈필만은 지인의 도움으로 수용소에 가지 않고 게토에 남게 되지만, 가족들과는 이별하게 된다.

게토에선 남겨진 사람들이 나치로 인해 매일 죽어나가고 있었다. 자신의 미래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슈필만은 게토에서 탈출해 게토 밖의 지인에게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슈필만의 지인은 그의 도움을 거절할 수 없었기에 사람이 쓰지 않는 아파트에 그를 숨겨주고, 먹을 것을 가져다준다.


나치의 감시가 심해져 슈필만에게 전달되는 음식은 점점 줄어들고, 슈필만은 건강이 악화되어 가지만 생명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슈필만이 숨어 있는 건물에 나치의 폭격이 시작되고, 건물에서 탈출한 슈필만은 게토 지역으로 도망친다. 폐허가 되어있는 게토 지역에서 슈필만은 폐건물들을 전전하며 배고픔, 추위와 싸우게 된다.

먹을 것을 뒤지며 폐건물을 전전하던 슈필만은 나치군 장교와 마주치게 된다. 뭘 하던 사람이냐고 묻는 장교의 말에 슈필만은 피아니스트라고 답한다. 연주해 보라는 장교의 말에 슈필만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연주를 시작한다.


그의 연주는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부랑자가 되어버린 그의 모습과는 대비되며 아름다움을 더한다. 그의 연주에 깊은 울림을 받은 장교는 그의 이름을 물어보며, 건물의 다락에 잘 숨어있으라는 말을 해준다. 장교가 떠난 후 슈필만은 다락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다.

내게 말고 하느님께 감사해라,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살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우리들의 믿음이기도 하지


다음날 그 건물은 나치군의 본부로 정해진다. 본부의 책임자였던 장교의 이름은 호젠펠트. 슈필만을 구해준 그 장교였다. 그는 슈필만이 있는 다락에 들러 먹을 것과, 코트를 챙겨주며 그를 보살펴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치군은 후퇴하게 되고, 슈필만은 폴란드군에 의해 구출된다.

폴란드군이 바르샤바에 입성하면서 슈필만의 삶은 제자리를 찾는다. 슈필만은 다시 피아노를 연주한다. 동시에 호젠펠트의 소식도 전해 듣게 되는데, 폴란드군에게 포로로 잡혀있다는 내용이었다. 슈필만은 그의 행방을 수소문하지만 끝내 그를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다.


슈필만이 오케스트라의 중앙에서 피아노를 치며 많은 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후기

전체적으로 영화가 어둡다. 내용보다는 영화가 주는 이미지나 색감이 어둡다. 주인공이 마주하고 있는 어두운 현실을 나타낸 듯하다.


그리고 잔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주인공은 지독하게 외롭다. 혼자 남게 된 순간부터 영화의 대사가 거의 없다. 많은 장면들이 그의 몸짓과 그의 행동으로 채워진다. 단순히 사람이 없으니까 대사가 없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주인공의 외로움을 길고 긴 적막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 한다.

이 영화는 잔혹한 현실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만 같다. 전쟁이 가지고 온 참혹한 현실, 힘없는 민족이 마주하는 잔인한 현실 속에서도 그의 연주는 계속된다.


영화를 보면서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로 주인공은 비참하게 살아간다. 정말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주인공은 살아남아 다시 피아노를 연주한다. 이 연주가 마치 삶처럼 느껴졌다.


그의 연주가 중단되는 순간 그의 삶은 멈췄고 그의 연주가 시작되면서 그의 삶이 다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연주들은 매 순간 아름답다.

특히 나치군 장교 앞에서 한 슈필만의 연주는 더욱 아름답다. 그가 그 장교와 마주쳤을 때 흐르던 적막감과 긴장감, 그리고 그동안 슈필만이 겪었던 잔혹한 현실들이 그의 연주와 대비되어 아름다움을 더한다. 피아노 앞에 앉는 순간, 되찾은 피아니스트의 눈빛과 피아노 위에서 춤추는 그의 손가락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슈필만이 나치군 장교 앞에서 연주를 하고 눈물을 흘리던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 눈물의 의미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 보게 됐다. 오랜만에 피아노의 소리를 듣게 된 기쁨의 눈물일지 살기 위해 연주를 한 비참함의 눈물일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허공에 대고도 연주를 하던 슈필만에게 피아노는 삶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한다.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그의 얼굴이 빛나는 순간은 허공에나마 피아노를 연주하는 순간이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피아노 연주, 심지어 생사의 갈림길에서 한 연주는 그에게 삶을 다시 가져다준다. 사실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삶을 되찾은 기쁨의 눈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의 생명도, 그의 삶의 전부였던 피아노의 선율도 모두 찾게 된 순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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