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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Jul 31. 2022

해외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딜레마, 인종차별.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기점으로 외국인이 없었던 우리 동네에 하나둘씩 흑인과 백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피부색이 낯설기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반갑다고, 영어나 한번 해보자고 인사를 하기도 했고, 또는 자기 나라로 돌아가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봤었다. 그때마다 나는 언제나 인종을 차별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인종이 달라도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었다. 불법체류자니 뭐니, 그런 거는 사실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우리는 같은 인간이기에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면 안 된다는 것이 내 신념이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동남아 외국인 노동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와도 나는 언제나 아무렇지 않은 척 그들을 대했다. 낯선 나라에 온 이들에 대한 내 나름의 배려였고, 외국인을 대하는 내 태도였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나라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칭총챙"이라는 말을 어린 흑인 아이의 입에서 처음으로 들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칭총챙"은 동양인을 비하할 때 쓰는 말이다. 이 말이 미국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도 통용된다. 나는 이 말을 미국의 그랜드캐니언과 비견될 만큼 아름다웠던 관광지에서 들었다. 나는 휴가 차 그곳에 있었고, 이 말을 한 아이는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체험학습을 하고 있었다. 체험학습을 나온 흑인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인종차별적 단어를 대놓고 나에게 내뱉었다. 그러나 사실, 아이의 입에서 "칭총챙"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생각보다 그리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그저 이 어린아이가 본인이 한 말에 대해 뭘 알고 내뱉는 걸까, 오히려 의아하기만 했다. 본인이 내뱉은 말이 흑인을 비하하는 "Nxxxxx"라는 말에 버금가는 말이라는 걸 그 아이는 알지 못할 것이다. "칭총챙"이라는 말을 듣고 충격받는 대신, 나는 무척 분노했다. 그건 아이의 말을 듣고도 수수방관하던 흑인 교사 때문이었다. 


모든 아프리카 대륙이 그렇겠지만 오랜 기간 동안 흑인은 백인의 노예였다. 노예신분이 사라지고 나서도 여전히 백인들은 흑인들을 차별했다. 차별의 역사가 그들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색하게 그녀는 어린 흑인 아이의 인종차별을 묵인했다. 나는 당장 그 선생에게 가서 따졌다. 저 아이가 한 말이 인종차별이라는 걸 넌 가르칠 필요가 있어. 내 말을 듣고 그녀는 '아이가 그럴 수도 있다'며 얼버무렸다. 사과도 뭣도 아닌 말을 건네고 그녀는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 후로도 나는 수차례 인종차별을 당했다. 흑인이건 백인이건 상관없이. "칭총챙"이라는 말뿐만이 아니라 양손으로 눈을 찢는 제스처도 몇 번이고 목격했다. 그나마 이렇게 노골적인 표현은 따져 물을 수 있다. 분명히 인종차별임이 분명한 상대방의 아니꼬운 시선과 행동을 보면 말도 못 하고 그저 내 속만 불탄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인종차별을 당하면서 나는 인종에 대한 편견이 생기고 혐오가 생겼다. 나는 피부색에 상관없이 모두 다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아니었다. 


나는 오늘도 밖을 나가서 다른 인종들의 눈치를 본다. 그들이 혹시나 나에게 인종차별을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면 나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까. 나를 비웃는 이들을 향해 멋지게 Fuck you, Racist!라고 외쳐야 하자만 막상 당하면 울분이 차서 말이 안 나온다. 또는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후에 생각하며 인종차별을 당했다며 속으로 화를 삭인다. 내가 그들에게 비아냥을 듣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들과 피부색이 달라서. 나는 오늘도 아물지 못한 내 상처를 보듬으며, 그들을 향한 혐오를 내 안에 한 겹씩, 더 두껍게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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