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대단한 사건 없이도 사람을 설렌다 괜히 괜찮아질 것 같은 기분 다시 시작해도 될 것 같은 용기 새 학기 공책 첫 장을 펼칠 때처럼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여백이 주는 기대가 있다 실수해도 괜찮을 것 같고 조금 서툴러도 괜찮을 것 같다
햇살이 길어지며 마음도 조금 길어지고 미뤄두었던 생각들을 꺼내 보고 접어두었던 다짐을 다시 펼쳐 본다
가끔은 별 거 아닌 하루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늘 지나치던 골목에 작은 꽃이 피어 있고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은 생각보다 높고 맑다 어제와 같은 길인데도 오늘은 어쩐지 새 길 같다
봄은 거창한 변화를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아주 작은 틈을 내어 준다 그 틈으로 빛이 스며들고 그 빛을 따라 마음이 조금씩 움직인다 망설이던 말 한마디를 꺼내 보게 하고 오래 미뤄 둔 연락을 조심스레 보내 보게 한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보다 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기대가 더 커지는 계절
때론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지만이 추위가 오래가지는 않는다는 걸 꽃은 결국 피고 낮은 점점 길어지고 얼어붙은 땅도 끝내는 풀린다는 걸 안다
그래서 봄은 완벽해질 수 있다는 약속이 아니라 다시 한번 시작할 수 있다는 허락이니까 오늘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내일은 다시 펼쳐질 여백이 있다는 사실 그 여백 위에 무엇을 쓸지는 아직 모르지만 적어도 펜을 쥘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