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하다. 여름이 시원했던 만큼 가을도 빨리 오나 보다. 이곳은 날망집이라 아침, 저녁으론 긴팔옷을 입어야 할 만큼 기온차가 심하다. 전형적인 가을날씨다.바다나무 농원에는 백일홍이무리 지어 들판을 메우고 있다. 아마 준이가 왔더라면 색깔 찾기 게임을 하자고 숨바꼭질하며 뛰어놀았을 것 같다.
어느 해 친구 주말농장에 갔더니 알록달록한 백일홍이 저수지를 가운데 두고 피어 있던 것이 오래 인상에 남았다. 젊은 날 알록달록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꽃인데 어느 날부터 이 꽃이 눈에 들어왔다. 한 송이씩 핀 것이 제법 단아해 보이기도 하고, 무리 지어 있을 때는 나름 아름다움의 총집합체를 보이는 듯 눈길을 사로잡기도 했다. 백일홍은 우리 꽃밭에 몇 안 되는 한해살이 꽃 중의 하나이다. 어느 날 그냥 좋아서 심은 꽃이다. 나도 나이 들어가는 걸까? 연세든 어르신들이 꽃무늬 옷을 즐겨 입는 것처럼 알록달록한 백일홍 꽃에 취향이 머무는 게 나로서도 의아한 일이다. 어찌 되었든 좋아하는 꽃을 심고 가꾸어 실컷 볼 수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농원의 꽃들에게 안녕을 전하며 한 바퀴 행진을 하였으니 나를 위한 행진에도 팡파르를 울려야겠다. 지난번 약간의 비가 오고 무섭기도 하여 완주하지 못한 출렁다리를 건너야 할 것 같았다. 왠지 중간에서 돌아온 기분이 아니 간만 못한 것처럼 뭔가 마음 한편에서 불편함으로 남아있었다. 그 어떤 것도 완결하지 못하는 인생을 살 것만 같은 쓸데없는 기우인지도 모른다. 이번엔 또 다른 반대쪽에 있는 Y자형 출렁다리로 가서 그 기분을 만회해 보리라.
의외로 거창이라는 곳이 아늑하며 매력이 있고 볼거리가 많은 관광지역이었다. 세 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탓인지 드라이브길의 산세도 너무 아름다웠다. 수승대 출렁다리가 덕유산 쪽이었다면 Y자형 출렁다리는 동쪽 가야산 쪽이다. 다음엔 지리산 쪽 거창도 한번 기웃거려 보리라. 아무 연고도 없는 거창에 이렇듯 관심이 가는 건 이름 탓인지도 모는다. 얼마나 거창한지 알고 싶은. 이러다 거창 홍보대사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절로 웃음이 난다.
Y자형 출렁다리까지 올라가는 576개의 계단마다 삶의 지침이 되는 문구들이 힘내라고 용기를 주었다. 물론 수승대 올라가는 쪽 계단에도 있었다. 거창군의 관광도시다운 면모이자 작은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계단 오를 때마다 힘들고 지친 몸을 좋은 문장을 읽으므로 빠르게 의식전환하여 긍정아이콘으로 삶의 모드를 바꾸어 놓았다. 여행하면서 주변의 자연을 보고 배우기도 하지만 스치는 차창가의 글귀 하나에서도 인생을 배운다. 곳곳에는 삶의 스승들이 참 많다. 그동안은 왜 그냥 스치고 지나갔을까? 왜배우고 느끼려 하지 않았을까?
항노화랜드가 있는 우두산의 Y자형 출렁다리는 국내최초의 교각 없는 다리로 우수구조물상을 수상했다고 할 만큼 구조나 안전성면에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지난번 수승대 출렁다리보다는 길이가 1/2 정도라 한번 도전해 볼만하였다. 절대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눈앞의 장군봉과 아래에서 들리는 덮시골 폭포물소리, 떨리는 가슴의 쿵닥거림이 묘하게 맞물린 상태로 조심히 걷다 보니 어느새 나는 Y자형 가운데 서 있었다. 무섭지만 정신을 차리고 중심을 잡고 앞을 바라보았다. 우두산의 빼어난 풍광과 능선의 아름다움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신비롭다. 공중에 붕뜬것 같은 나는 마치 내가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비틀거리면 안 될 것 같았다. 아찔한 순간의 절묘함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나를 지켜줄 것만 같다.
이곳까지 오르내리는 데크길은 무장애데크길로 경사가 완만하여 연세가 있으신 어르신이나 장애가 있는 분들도 편하게 휠체어를 타고 다닐 수 있는 산책코스다. 내려오는 쪽의 데크길은 명상 치유의 숲길이다. 바람에 실려오는 흙냄새와 나무향기가 코끝을 지나 내 몸을 흩고 지나간다. 상쾌하다. 힘겨운 등산보다는 적당한 산책이 좋았다. 진정한 자유는 물질을 넘어 내면의 자연을 탐하는 것이라 했다. 삶의 만족도 자신 안의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그 속에서 치유되어야 한다. 걸으면서 내가 자연에서 치유되고 그로 인해 힐링됨을 느낀다. 자연이 준 선물에 흠뻑 취하며 데크길을 내려왔다.
땀을 흘리며 힘들게 한 산행이 아니었기에 구석구석 거창을 여유 있게 둘러보았다. 인근에 아토피, 피부질환, 신경통에 좋다는 강알칼리 온천관광지가 있어 산행 후에 즐기기 좋을 것 같다. 나도 온천욕을 좋아하지만 최근 몸에 약간의 상처가 생긴 터라 아물 때까지 물속 놀이는 자제하였다. 온천지역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코로나로 인한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마도 피해를 가장 많이 본 업종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다소 침체된 분위기라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다시 경기가 활성화되어 주변이 좀 더 쾌적화 되길 바랄 뿐이다.
이제 잠시 앉을자리가 필요했다. 다리가 쉼을 요구하고 입에서 카페인을 요구한다. 창문이 아담하고 단층으로 소박하게 지은 카페로 갔다. 아기자기한 정원이 정겨운 카페이다. 사람이 없는 탓에 주인이 마지막 여름을 쫒고 있는 듯했다. 우리가 무료함을 깬 반가운 손님인지, 안락한 휴식을 깬 눈치 없는 손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용히 쉴 수 있는 아늑한 공간이라 좋았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나도 모르게 내뱉은 "휴"소리가 "휴(休)"이길 바랐다. 평온한 휴식처이다. 이제는 세상의 중심에서 비껴 나와 가끔은 이렇게 예정에 없던 사잇길에서 잠시 쉬어 가기도 한다. 어쩌면 앞으로 이 길이 더 편안하고 안락한 길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