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속 8월이 저물어 간다. 여름이 끝나간다. 9월이 오면 또 다른 시작이다. 2학기이자 가을학기라는 이름으로 삶의 패턴이 다소 바뀌어진다. 봄에 뿌린 씨앗이 열매 맺어 수확을 거두어야 하듯이 2학기에는 새로움보다는 좀 더 깊은 맛을 내는 '심화'라는 이름으로 인생의 맛도 깊이를 더해가리라.
평생교육원이나 문화센터에 신청한 강좌들이 아직은 준비기간이다. 월요일부터 목요일 오전까지는 각자 배우고 싶은 프로그램을 배우고 짬짬이 자전거 타기, 파크골프, 밤산책 운동을 한다. 그리고 시골로 가서 자연인의 삶을 살아간다. 그사이에 잠시 틈새를 이용하여 가까운 곳 여행을 하기도 하고 카페를 가거나 맛집을 가기도 한다. 특별한 일 없는 우리들의 일상이다. 바쁜 듯, 한가로운 듯, 함께, 따로 주어진 인생 2막을 만들어간다. 적어도 우리는 만들어가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삶 속에 적응될 때까지, 일상화될 때까지. 그래서 나는 작년과 올해를 내 인생의 하프타임으로 정했다. 아직은 순조로운 항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도 사이 시간을 이용해 집을 나섰다. 비 온다는 일기예보는 있었지만 지금으로선 날씨가 맑다. 요즘은 국지성 호우가 잦으니 날씨는 장담할 수 없다. 익산의 아가페 정양원으로 향했다. 개인 사유지에 조성된 정원으로 50년 동안 비밀정원으로 있다가 일반인에게 개방된 지 얼마 안 되는 곳이다. 3만 평 정도의 부지에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요새 성벽처럼 둘러싸여 유럽의 어느 작은 성 같은 느낌이다. 이곳은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을 보살피기 위하여 노인복지시설로 어느 신부님이 설립하였다고 한다. 시설 입소자들의 건강과 행복한 노후를 위하여 좋은 나무들로 심고 그 사이 오솔길과 쉼터를 만들어 자연친화적인 수목 정원으로 조성되었다.
황화코스모스와 상사화, 맨드라미, 배롱나무가 정원을 수놓고 있었다. 하늘높이 뻗은 메타세쿼이아 산책길이 울타리 되어 노인분들을 아늑하게 지켜주고 있다. 나무의 크고 웅장함이 세월을 말해주며 길게 뻗은 산책길이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게 만든다. 향나무, 소나무, 오엽송, 꽝꽝나무, 공작단풍, 대나무들도 무성하여 어르신들의 음식과 생활에 보탬이 되는 수입원으로 한몫을 담당한다고 하였다. 정원 한 편에는 피에타 조각상 아래 먼저 영면에 드신 어르신들의 비석이 정양원을 지키고 있다. 한쪽의 영국식 포멀가든도 알록달록한 꽃들로 정원의 아름다움에 힘을 보탠다. 멀리서 황금사철나무가 꽃인지 나무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넓고 편안한 아름다운 정원이다.
정원을 한 바퀴 돌면서 잠시 마음의 여유도 가져보지만 힘없고 오갈 데 없는 노인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신 신부님의 봉사에 존경스러움과 감사함이 든다. 한없이 내가 작아지는 순간이다. 정양원을 나오며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전통시장 안에 맛있는 육회비빔밥집이 있다기에 찾아갔다. 매스컴을 많이 탄 탓인지, 점심시간에만 영업을 하는 탓인지 손님이 많았다. 작은 중소도시의 전통시장 안 식당이지만 깨끗이 내부를 리모델링하여 청결한 가운데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허기를 면하고 검색해 놓은 카페로 향했다. 내 영혼이 맑아지는 카페였다. 공연장과 음악 전시관이 있는음악카페이다.
이곳은 가수이자 작사가, 작곡자, 싱어송라이터, 음악 프로듀서 등 다양한 직함을 가지고 있는 마크툽(본명 양진모)이 운영하는 카페라고 한다. 난 사실 마크툽이라는 가수에 대해 잘 몰랐다. 단지 친구의 딸 결혼식에서 들은 축가가 마크툽의 "Marry Me" 노래라는 사실에 "아, 그 노래!" 하고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는 한 사람이었다. 가수가 운영하는 카페인만큼 음악적인 냄새가 풍겼다. 1층에는 공연장과 음악감상실, 2층에는 넓은 공간에 야외를 내다보며 차를 마실 수 있는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다. 한 바퀴 돌다 보니 담소를 나눌사람은 2층, 젊은 사람들은 공연장,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은 음악감상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 이것은 절대적 기준은 아니다. 그냥 내 느낌으로 분류한 것이다.
우리도 음악감상실로 갔다. 나이가 있기에. 빵빵한 사운드에 수많은 LP판이 전시되어 있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음악에 취해 본다. 참 좋다!. 조용히 음악을 듣다가 DJ에게 음악을 신청하였다. 남편은 "Nana Mauskouri의 Only Love"를, 나는 "Joan Baez의 The River In The Pines"를 작은 쪽지에 적어서. 학창 시절 이후 참으로 오랜만에 해보는 음악 신청이다. 흘러나오는 음악 따라 내 마음도 저만큼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그 시절로. 청아하고 감미로운 음색에 취해본다. 다소 슬픈 가사도, 사랑 고백도 이 공간에서 여유라는 이름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진다.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하기를.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온해진다. 옆에 있는 공연장에서는 "유희열의 스케치북"이라는 프로그램이 재생되고 있었다. 남은 커피를 들고. 그곳에서도 한참을 앉아 있었다. 남편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이기에.
같은 공간에서 한 곳을 바라보며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물론 집에서 티브이를 보지만 오늘은 왠지 음악회에 온 것만 같았다. 다양한 카페투어를 했음에도 또 다른 색다름이 있었다. 살아가면서, 여행하면서, 얼마나 많은 신선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까 하는 생각에 앞으로의 삶이 기대되기도 하였다. 계속 이곳에 머물며 음악감상을 하고 싶었다. 여기서 시간을 더 보내다 돌아갈까 하는 갈등 속에서 바닥이 보이는 커피잔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여행의 마지막 코스가 남아있기에.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 촬영장소로 활용되고 있는 교도소 세트장으로 이동했다. 티브이에서만 보았던 낯설고 무서운 교도소가 내 눈앞에 '법질서 확립'이라는 글귀와 함께 높은 담으로 나타났다. "7번 방의 선물", "내부자들"등 200여 편의 영화가 이곳에서 탄생되었다고 한다. 수감수들이 운동하는 중앙의 넓은 잔디밭이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다고는 하나 왠지 나는 다시 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죄수들이 손목에 찼던 수갑, 그들이 묵었던 방들과 취조실, 법정, 철창으로 가득한 긴 복도 등은 그저 티브이에서 화면으로만 기억하고 싶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그냥 한번 가보고 "죄짓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겠다"라는 교훈만 가지고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잠시 살아가는 날 속의 사이 시간을 틈타 다녀온 익산여행은 행복한 삶과 일그러진 인생여정이 함께 동행하고 있었다. 정양원의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의 삶과 그 속에서의 휴식, 여유롭게 몸과 마음을 힐링할 수 커피와 음악, 죄짓지 말고 잘 살라는 교훈의 무대 교도소, 이 모든 건 우리네 인생 속 어디에서나 펼쳐질 수도 있는 연극무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 아가페 정양원. 시장비빔밥(황등전통시장). Made ln Heaven 음악카페. 교도소 세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