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틈새를 찾는다. 트렁크에 준비된 여행가방은 호시탐탐 여행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지난주에는 SOS를 요하는 딸의 덕분으로 최고조의 노동력을 발휘함과 동시에 손주의 재롱으로 진한 에너지를 충전하고 왔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어휘력 증가에 힘든 줄 모르고 조그만 입에서 튀어나오는 새로운 단어들에 귀를 쫑긋 세우고 웃을 준비를 하고 있다. 아이들 변화하는 속도는 참 빠르다. 어디 사람만 그러랴. 변하는 세상도 정신없는데...
그래. 인풋을 했으면 아웃 풋을 해야 하지 않을까? 빨갛게 충혈된 눈을 풀고 예민해진 귀를 쉬게 하기엔 조용하고 경치 좋은 곳이 제격일 듯싶었다. 남한강 물줄기가 흐르는 단양으로 가기로 했다. 이곳은 내 고향과 인접된 곳으로 이미 많은 나들이길에 오른 곳이다. 구석구석 명승지나 유적지는 이미 다 관광을 한 탓으로 최근 생긴 잔도를 걸어보며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이곳은 충주댐이 만들어지면서 지역일부가 수몰되어 깨끗하게 다시 만들어진 계획도시이다. 지역적으로 석회암지대가 많아 도로에는 커다란 시멘트 운송차량이 유독 많은 곳이다. 그러나 도심에 들어오면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유람선이 떠다니며 풍류객들의 노랫소리가 물결과 함께 흘러가는 곳이었다. 그 위에는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들이 강물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정처 없이 하늘을 날며 짜릿한 맛으로 저마다의 인생을 향유하고 있다.
옛날에는 경치 좋고 한적한 시골마을에 불과했다. 그동안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발돋움한 육쪽마늘로 유명한 단양시장의 먹거리와 석회암 동굴, 영춘 구인사, 단양팔경, 만천하 스카이워크, 아쿠아리움 장미터널등으로 인해 갑자기 관광객이 많아졌다. 특히 소백산 철쭉제가 열리는 5월에는 관광버스가 시내로 진입하는 도로를 막을 지경이다. 일직선도로라 지리를 아는 사람만이 우회하여 빠르게 지나갈 수 있을 만큼 관광철에는 교통체증이 유독 심하다.
10여 년이 지난 후에 방문한 단양은 여유롭고 한가했다. 우선 배고픈 허기를 채우기 위하여 단양시장에 들렀다. 많이 현대화되어 있는 시장모습과 1인 청년기업가들의 활발한 움직임이 살아 숨 쉬는 활기를 느끼게 해 주었다. 유명연예인이나 음식 전문가들이 다녀갔다는 광고가 붙은 가게 앞에는 여지없이 줄이 길게 늘어섰다. 역시 인터넷의 영향은 계절과 상관없이 위대하다. 거리엔 사람이 없어도 시장 안은 북적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시장구경을 나섰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역시 지난 추억은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좋았었다. 시장의 왁자지껄함과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마늘순댓국을 한 그릇 먹고 메밀전병을 사서 남한강을 낀 데크길을 걸었다. 바람은 차고 장미는 여름을 위해 조용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 아직 잠이 덜깬듯 하다. 이곳의 잔도길은 중국의 귀곡잔도처럼 아스라한 느낌은 덜하지만 강물 위를 걷는 느낌은 역시 짜릿했다. 간간히 유람선도 보인다. 아직 이곳은 날씨가 추워 봄 맞을 준비가 더디다. 강바람이 상쾌했다.
소백산 국립공원에 있는 다리안 폭포로 향했다. 아이들과 야영을 오거나 공원에서 돗자리를 깔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 폭포를 보려면 높은 구름다리를 건너야 볼 수 있어서 다리안 폭포라 한다. 폭포수가 삼단으로 내려오면서 소를 이루고 있다. 용이 승천할 때 힘껏 누른 발자국이 소가 되었다 하여 용담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간중간 노란색 생강나무와 진달래만 간간히 피어 있다.저 남쪽에 매화가 핀지 오래건만 소백산자락은 아직도 추위와 싸우고 있다.
등산할 마음이 없기에 한 30분 정도 걷다가 내려왔다. 매포소 앞에 있는 문구에 눈길이 갔다. "소백 내 차를 부탁해!". 등산객을 위한 서비스 제도이다. 등산을 할 때면 입산과 하산이 달라 늘 차량이 문제였다. 입산 시 차키를 맡겨놓으면 탁송회사가 와서 차량을 하산지점으로 옮겨다 놓는 소백산에서 이루어지는 차량 배달 서비스이다. 우리도 제주도 갈 때 탁송회사를 이용해서 편하게 다녀왔는데 등산객의 차량 편의까지 도모되리라는 생각은 미처 못했다. 이젠 등산도 누군가가 차를 반대쪽으로 가져가기 위해 등산줄에서 이탈하지 않아도 된다. 물질만능시대가 사람들의 펀익을 도모한다면 애써 거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양개선사유적지로 향했다. 빛터널로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충주댐이 건설되면서 강변마을에서 출토된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철길의 터널을 이용해 미디어 음향시설을 설치해 만든 LED비밀의 정원과 빛터널이 만들어져 넓은 광장이 화려함으로 장식되었다. 다소 제주의 노형수퍼마켓과 비슷한 면도 있지만 야외까지 이어지는 빛의 환상은 또 다른 신선함을 안겨주었다. 실외에서 더해지는 맑은 공기의 청량감 탓이리라.
다음날 보리곳간이라는 곳에서 친구의 엄마와 점심을 먹었다. 이곳에는 친한 친구의 어머니가 살고 계신다. 대학시절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친구 세명은 한집씩 돌아가며 3일간 친구집 투어를 하고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가 개학이 되면 다시 만났다. 그때마다 단양에 오면 맛있고 따뜻함으로 우리를 챙겨주셨다. 무엇보다 친정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부음에 부모님과 일면식도 없는 상갓집에 오셔서 나를 위로해 주시고 가셨다. 친구야 당연히 조문 올 줄 알았지만 친구의 엄마까지 먼 걸음 해 주시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었다. 당시 너무나 큰 위로가 되었다.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자주 오겠지만 그 또한 기약할 수 없는터라 연세가 있으시니 따뜻한 밥 한 끼를 감사한 맘을 담아 대접해 드리고 싶었다. 전날 저녁 숙소에서 전화를 드려 다음날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하니 너무 반가워하셨다. 모시고 나와 식사를 하고 단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카페산으로 가서 커피를 마시며 정담을 나누었다. 모처럼 친정엄마를 대한 듯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친구엄마는 내 딸이 온 듯 너무 반갑다고, 찾아줘서 고맙다고, 몇번이나 말씀하셨다. 뭔가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도 풀리는 듯했다. 그날은 친구엄마가 내 엄마였다. 일부러 친구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얼마 후 친구가 이 소식을 접하고 전화가 왔다. 요즘 바빠서 친정 나들이가 뜸했는데 너무 고맙다고. 친정엄마가 네친구랑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즐거웠노라고 전하신 모양이다. 친구는 친정에 오면. 밀린 잠만 자고, 엄마가 챙겨준 음식만 가지고 가는데 네가 우리 엄마 나들이 시켜 주었다고 고마움에 입에 침이 말랐다. 칭찬받으려고 그런게 아닌데. 그냥 그러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퇴직을 하면서 마음에 고마움으로 남아계신 분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해 왔다. 도움을 주셨던 교직에 계셨던분들, 알고 지낸 지인들, 가족들 모두에게 더 늦기전에 감사함을 전하고 싶었다. 내일 당장 무슨일이 일어나지는 않지만 기회가 될때 하고 싶었다. 미루다 하지 못하면 먼미래 내가 후회할 것 같았다. 시간이 나만을 위해 기다려주지 않을 것 같았다. 별일 아닌 일에 유난스레 고마워하는 친구엄마와 친구에게 되려 내가 더 고마웠다. 어쩌면 이 또한 나 나름대로 '오늘'을 사는 나의 삶의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맘이 한결 가볍다.
*단양시장, 잔도길. 다리안폭포, 수양개선사유적지, 보리곳간, 카페산. 소노문호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