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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K Jul 11. 2021

700만 원으로시작한 미국 이민생활#1

친인척 하나 없는 미국에서 10년 이상 생존한 평범한 30대 부부 이야기

LK: 이수야~ 우리 미국에 온 지 얼마나 됐어?
Sue: 우리가 2010년 4월에 결혼하고 왔으니까 이제 11년 넘었네.

그렇다. 벌써 1년이 아닌, 벌써 11년이다.

내 나이 서른의 첫해를 한국이 아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미국에서 시작을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 가족들과 친척들은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1년 안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걱정 아닌 걱정을, 매년 명절마다 모이면 했었다는 이야기를 내가 다시 7년 만에 세 아이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을 때 들을 수 있었다.

맞다! 가족과 친척 말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나는 처음 미국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딱 한번 빼고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포기했던 적이 없었다.

물론, 그런 생각도 안 났지만,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여기가 미국이라는 낯선 곳이라는 생각보다는, 내가 살아가야 할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위에서 언급했던 한국에 딱 한번 가고 싶었던 사건은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미국 생활 초기에는 나랑 비슷한 처지에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생활의 어려움과 상황들을 서로 공유하고 위로했으며,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았었다. 

그 당시를 생각해 보면, 사람들과 만나서 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겨 그동안에 이뤄온 작은 성취들과 감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너는 정말 운이 좋은 것 같아", "너는 시기를 잘 타서 그런 거야", "참 부럽다" 등등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는 말보다는, 믿지 않거나 쌀쌀맞은 반응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거짓말을 하거나, 큰 성공을 이룬 것도 아닌데 말이다.

모든 한인 커뮤니티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살았었던 한인 커뮤니티에서 만큼은 그런 이야기들을 자주 듣고는 했었다.

내가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이유는 미국에 있는 한인 커뮤니티를 욕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만큼의 여유가 없고, 하루하루 힘들게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 속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평생 같이 일하고, 같이 살 것만 같았던 미운 정 고운 정들었던 사람들도 다 때가 되면, 내가 살아가는 형편과 직업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들이 미국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과거의 직업과 내 생활수준에 맞는 커뮤니티에서 현재 나의 직업과 그에 맞는 커뮤니티로 바뀌기까지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 말은, 2010년 미국에 와서 가졌던 직업을 8년 만에 다른 직업으로 바꿨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직업과 함께 생활환경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만약, 나와 비슷한 형편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한 분들은 잘 아실 것이다.

영주권이나 시민권도 없고, 특별한 기술도 없고, 특히 영어도 못하는 한국인이 미국에서 최저 임금도 못 받으면서 일하는 것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나의 이야기는, 따뜻한 방구석에서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시간 날 때 구인/구직 사이트를 볼 정도로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닌, 하루에 10시간씩 6일을 일해 월 150만을 벌어, 매달 집 월세만 100만 원을 내고 남는 돈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미국 생활을 시작하였지만, 현재는 그런 불안함에서 벗어나 주말에는 아주 가끔이지만 다섯 식구 외식할 정도의 생활로 바뀐 11년간의 긴 여정을 최대한 기억해내어, 그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일기식으로 담아내려고 한다.

나의 이야기의 핵심은, 아주 평범한 당신과 나 같은 사람들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어느 곳이든, 어디에서든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을 담고 있다. 

내가 전에 겪었던, 소위 말하는 개고생 할 때 시기에는, 비슷비슷한 생활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속에 있어서, 그 무리 속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반보만 더 앞서 나가는 게 보이거나, 계획만 있어도 부러움과 시기가 가득했고, 나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고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런 곳, 바로 거기서 나의 미국 생활을 처음 시작했다.

그때는, 나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도 많았고, 나 또한 그런 이야기들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현재는 예전만큼 나의 과거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 하거나, 또는 해주고 싶은 사람들과의 만남도 없어졌으니 그러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상황은 거의 사라졌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11년 전으로 다시 돌아가 그동안 미국에서 아내와 내가 살아왔던 이야기, 현재 세 아이와 살고 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의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나는 글을 써본 적도 없는 아마추어이며, 배운 적도 없으니 문장의 선택과 표현은 다소 거칠거나 전문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최대한 사실을 토대로 글을 작성할 것이다.

앞으로 제 글을 읽으시고 어떤 감정이 생기실지, 어떻게 제 이야기들이 평가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같이 못 배우고 무식한 사람도 미국에 와서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데, 지금의 당신은 나보다 더 괜찮은 분이시니, 부디 희망을 잃지 말고 어느 곳에서든 잘 살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Shall we?


2010년 5월 미국으로 신혼여행 가는 비행기 안

Sue: 오빠, 일어나 봐 뭐라고 방송 나오는데?
LK: 응.... 다 왔나 보다. 도대체 몇 시간이나 걸린 거야.


2010년 4월 이수와 나는 결혼을 하고 몇 주 만에 미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영어라고는 학교 다닐 때 들었던 수업 외에는 따로 배워본 적이 없었던 우리 부부에게는 비행기 안에서 부터 영어 울렁증이 올라왔다.

만약, 우리에게 금전적인 여유가 있었다면 국내 항공사를 이용해 좀 더 심적으로 편하게 미국으로 올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나의 첫 비행 경험은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 항공이 아닌, 아메리칸 에어라인이 되었다.


영어 울렁증으로 인해 비행기 안에서는 그저 작은 불편함이 있었다면, 미국 공항에서의 입국 심사는 불편함이 아닌, 두려움마저 들었다.

또한, 미국에서도 가장 복잡한 공항 중 하나인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입국 심사라는 생각에 벌써부터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입국 심사 대기줄에 서 있을 때까지만 해도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여유를 부리며, 내 차례는 언제 오는지 빨리 오길 기다렸지만, 막상 입국 심사원이 보이는 근처에 왔을 때는 주사 맞기 전에 기다림과는 또 다른 불편함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내 앞에 있는 심사원은 입국 절차를 위한 몇 가지 질문들을 하고 있었고, 나는 듣고는 있었지만 내가 미리 준비한 답이 나오지 않아 생각 없는 닭처럼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렇게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는 심사원의 눈치를 보며 다음 문제를 기다리던 중, 드디어 내가 준비한 답에 관한 질문이 나왔을 때 자신 있게 "허니문! 트레벨! 그리고 쓰리 먼스" 콤보까지 날리며 자신 있게 정답을 외쳤다.

확실하게 정답을 맞혔는지 심사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다음 문제로 넘어갔다.

다음 문제는 첫 문제와 다르게 너무 어려웠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았고, 거기엔 나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내가 준비한 답안지를 그대로 그분께 보여 드렸다.

그분은 아주 친절하게도 주소와 방문 목적 등 한국에서 만들어온 모범 답안지를 보시며, 나를 이해해 주시는 표정을 지으셨다.

마지막으로 환전하여 가져온 달러를 보여줬다.

모든 시험을 패스한 후 입국 심사원이 내 여권에 도장을 찍어 주셨을 때 예전에 초등학교에서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았을 때 보다 더 큰 뿌듯함을 느꼈다.

그렇게 어려운 시험을 패스하고 그분과 이별하면서,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땡큐 해브 굿 데이"하고 말해주며 당당히 입국심사를 마쳤다.

아내보다 내가 아주 아주 조금 영어를 더 잘하기 때문에, 당연히 내가 먼저 통과하고 기다릴 줄 알았지만, 멀리서 다급하게 손을 흔드는 아내를 보며, 나의 자존심에 미세한 스크래치가 생겼다.

나는 아내가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저 사람 진짜 친절하고 좋은 사람 같아" 라며 마치 좀 전까지 입국 심사원과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눈 것처럼 표현을 하며, 내가 아내보다 늦은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착한 나의 아내는 그냥 웃으며, "오빠 우리 이제 비행기 갈아타러 가야 돼 빨리 가자" 라며 나의 변명을 잘 받아주었다.

나는 다음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빠르게 주변을 살피고 샌디에이고로 가기 위한 터미널을 찾아보고 있었다.


LK: 우와, 우리가 진짜 미국에 오다니, 진짜 신기하다. 한국사람들이 잘 안 보여.
Sue: 그러게 우리가 진짜 미국에 왔나 보다. 근데 공항은 인천공항이 더 좋은 거 같아. 여긴 약간 좀...


처음으로 공항 빌딩에서 나와, 샌디에이고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다른 쪽 건물로 이동 중이었다.

입구 앞에 있던 어떤 미국인이 나를 보며 "알유 크레이지?"라며 어쩌고 저쩌고 그러는데, 나는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고 그냥 웃으면서 "익스큐즈미?"라고 대답을 하였고, 그 친구는 내 모자를 가리키며 왜 그걸 쓰고 있냐고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표정을 하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좀 전에 만났던 입국 심사원과는 좀 더 다른 레벨이었다.

나는 "신 수 추 이즈 코리언, 아임 코리언"이라고 깔끔하게 대답을 했고, 이 친구는 내가 짐작하기로는 엘에이에서 왜 다른 팀 야구모자를 쓰고 다니냐며, 어디서 왔냐는 식으로 나한테 장난을 치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그분에게 일 이분 정도의 짧은 설교를 들으며,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으로는 샌디에이고로 가는 터미널은 어디에 있는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설교가 끝나셨는지 그 대가로 나에게 손가락을 비비며 돈이 있냐는 식으로 물어보시길래, "쏘리, 해브 굿 데이"라고 대답해 주고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앞을 보고 있었지만, 뒤를 보고 싶었고, 걷고는 있었지만 앞서가는 무리에게 최대한 빨리 달려가고 싶었다.


한국에서 MLB 모자를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지만, 미국에 가는데 MLB 뉴에라 모자 정도는 써줘야 예의가 아니냐 라는 생각으로, 그 당시 추신수 선수가 소속되어 있던 클리브랜드 인디언즈 모자를 쓰고 있었으니, 나에게 친절하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던 그분도, 그저 내가 멀리 클리브랜드에서 왔으니 반가워서 장난도 치고 돈도 빌리려고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LK: 이 비행기는 엄청 작네, 편하게 한숨 자고 일어나면 도착하겠지?
Sue: 빨리 도착해서 짐 풀고 쉬고 싶어.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의 첫인상

우리가 탄 샌디에이고행 비행기는 아메리칸 에어라인 이글이었다.

크기가 작아서 승차감이 좋을 줄 알았지만, 멀미를 유발하는 특이한 재주도 있어서, 샌디에이고에 도착할 때까지 봉지를 붙들고 있었다. 다행히도 나 같은 사람이 많은지, 보이는 곳에 봉지가 비취가 되어 있어서 손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몇 번에 고난을 잘 넘기며, 드디어 샌디에이고 공항에 도착하였다.

잠깐 숨을 돌리고, 미리 받아 두었던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였다.

낯선 공중전화기였지만, 간단한 영어와 숫자 정도는 그렇게 어려운 관문은 아니었다.

동전을 넣고 번호를 누르니 잠시 후 반가운 한국말이 들려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희 지금 샌디에이고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네, 조금만 기다리시고 몇 번 게이트에서 기다리고 있으세요."

통화가 끝나고 우리는 밖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와본 미국, 그리고 샌디에이고.... 공항을 나와 게이트로 걸어가며 처음으로 느낀 샌디에이고 날씨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따뜻하지만, 춥다.

이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다른 표현은 생각하기가 어렵다.

내가 처음으로 겪은 샌디에이고 날씨는, 신기하게도 햇빛 아래 있으면 뜨거우면서 따뜻하지만, 그늘로 들어오면 몇 초가 지나지 않아 금방 냉기를 느끼게 되는 이상한 날씨였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날씨 속에 여유가 느껴졌고,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날씨를 분석하고 있을 때, 창문을 내리며 나를 아는 듯한 얼굴로 쳐다보며 한국분이 운전하시는 밴 한대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안녕하세요. 아까 전화 주셨던 LK 씨 되시나요?"

"네, 맞아요. 안녕하세요."

나는 미국 영화에서 봤던, 소위 말하는 옐로우 캡 같은 차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정용 카니발 같은 차를 타고 오셔서, 순간적으로 `우리가 납치라도 되는 건 아닌가`라는 아주 짧은 의심을 했었다.

나의 이상한 생각과는 다르게, 택시 드라이버 선생님은 아주 친절하셨고, 나의 폭풍 질문에도 하나하나 따뜻하게 대답을 해주셨다.

한참 동안 양옆에 아무것도 없는 프리웨이를 타고 달리다가 상가들이 많이 보이는 곳으로 차가 빠져나갔다. 

그런데 내가 상상하고, 생각했던 미국의 모습들과는 다른 모습들을 보면서, 근거 없이 나도 모르게 국뽕이 올라왔다.

"뭐야, 한국보다 더 촌구석이네"라며 혼잣말을 했지만, 국뽕에 취해 나의 목소리의 볼륨 조절을 하지 못해 옆에 있던 드라이버 선생님에게도 들렸는지, "아 네.. 여기가 한국에 비하면 좀 시골 같죠?"

아내가 그 말이 민망했는지, "오빠, 여기는 차도 별로 없고 상가들 간판들도 깔끔하게 되어있고, 뭔가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거지 촌스러운 게 아닌 거 같은데?" 라며 눈치 없는 남편에게 눈치를 줬다.

나는 진짜로 그랬다.

웬만한 상가들은 몇몇 건물들을 빼곤 거의 1층들이었고, 반짝반짝 거리는 간판도 없었으며, 그냥 베이지색 건물들과 간간히 보이는 야자수들 뿐이었다.

한마디로, 건물들은 오래되고 단색으로 되어 있어서 세련미가 없어 보였고, 오로지 차들만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국뽕에 취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한국과 비교하며 애국심이 불타오를 때쯤 드라이버 선생님께서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는 말을 해주셨을 때 어느덧 밤이 되고 있었다.

기다리던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3년 만에 다시 만난 지인분의 아이들을 보며, 반가워서 한참을 껴안고 인사를 하는 동안, 우리의 짐을 모두 내려 주시고, 아내에게 택시비를 건네받으며, "그럼, 좋은 여행 되시고 3달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라는 인사를 하시고 드라이버 선생님은 떠나셨다.


Sue: 오빠 저기 벽 좀 봐.
LK: "LK 형, Sue 누나 환영합니다." 뭐야, 너네들 힘들게 이런 거 왜 준비했어~


아이들과 마지막으로 봤던 게 2년 전이다.

20대 초반 군대에 다녀온 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교회에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중에서 나의 인생과 가치관의 큰 부분을 새롭게 일깨워 주시고 멘토 이상의 역할을 해주셨던 분을 만났다.

그분의 아이들과 처음으로 만났을 때, 미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생긴 모습은 한국 사람이었지만 영어를 너무 잘했으며, 한국말은 서툴렀지만 대화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로 2개 국어를 완벽하게 했었었다.

그렇게 만났던 우리의 인연이 7년이 지나 현재는 아이들 중 가장 컸던 Sam이 벌써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Sam: 형~ 배고프죠? 밥 먹었어요?
LK: 안 그래도 지금 너무 배고픈데 뭐 좀 먹을 거 있어?

미국에서의 첫 식사

어른들은 이틀 전 한국으로 먼저 출국을 하셨고, 남은 건 아이들 뿐이니 진수성찬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우리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다행히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꽤 많은 옵션이 있었다.

그중에서 아이들이 자주 간다고 하는 베트남 쌀 국수 식당으로 가기로 하였다.

쌀국수는 한국에서 가끔 먹어봤기 때문에 무리 없이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나는 일명 초딩입맛이고 전에 먹어 봤던 음식 외에 새로운 음식을 잘 먹지 않고, 특히 냄새가 강한 음식은 절대로 손을 안대는 못된 습관이 있어서 여러분께 미리 자수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습관이 한국에서는 그저 불편한 정도였지만, 미국 생활에서는 적응하는데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나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 초딩입맛 때문에 벌어진 에피소드가 많으며, 그것들을 어떻게 극복해 냈고 회피했는지 다음 이야기들을 통해 알려드리도록 하겠다.

미국에서는 보통 모든 곳을 차로 이동하는데, 아이들이 살았던 아파트는 상가와 가까운 쪽에 있어서 무리 없이 걸어갈 수 있었다.

도로 하나를 건너자 작은 상가들이 밀집해 있는 몰이 있었고, 멀리서 봐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는 Pho라는 싸인이 눈에 들어왔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니 저녁 시간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다시 한번 느꼈지만, 우리 외에 한국사람은 없었다.

그것이 당연했지만, 어딜 가나 한국 사람 없네, 10불이면 한국돈으로 얼마지 등등

시키지도 않는 환율 계산과, 윌리를 찾듯 어딜 가도 두리번두리번 한국사람을 찾았다.

그렇다고, 아는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지만, 습관처럼 저렇게 행동을 했었다.

문 앞에 서 있으니, 한 여성분이 들어오라는 사인을 주며, 우리를 큰 테이블로 안내해 주고, 메뉴를 놓고 다시 돌아갔다.

자리를 잡고 앉은 후, 나 자신에게 쌀국수는 전에 먹어봤던 음식이니 충분히 먹을 수 있다는 주문을 외우고 있는 사이, 우리 테이블을 담당하는 서버가 왔다.

아까 우리를 안내해 줬던 여성분과는 다른 분이었다.

여기서 말한 서버는(Server) 컴퓨터 서버나 인터넷 서버가 아닌, 손님들의 음식 주문을 도와주고, 주방에서 음식이 완성되면 서빙해 주며, 식사를 하는 동안 필요한 것들을 도와주는 도우미 같은 분들이다.

이러한 문화가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이 알아서 모든 부분들을 대신 처리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저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Sam: 형, 누나 뭐 드실 거예요? 뭐 좋아하세요?
LK: 응.. 그냥 너 먹는 걸로.
Sue: 나도.. 같은 걸로.
Sam: 드링크는요?
Lk: 물
Sue: 나도, 물


꼭 뭘 먹고 싶지는 않았지만, 메뉴판의 그림과 똑같이 나온다는 상상을 하였을 때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 (한국은 메뉴판 디자인도 예쁘고, 기본적인 인테리어도 예쁘고... 아, 이놈의 국뽕)

왜냐하면, 한국에서도 쌀국수 먹으러 갔을 때 처음 먹었던 음식이 파인애플 볶음밥 같은걸 먹어서, 그 이후로도 쌀국수 레스토랑에 가면 항상 파인애플 볶음밥을 먹었다.

그런데,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그런 메뉴는 있지도 않았고, 물어보기도 좀 그래서 그냥 같은 걸로 먹는다고 하였다.

주문이 끝나고, 음식이 나오는 동안 아이들과 그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였다.

10대라서 그런지 안 본 사이에 나보다 키도 큰 아이도 있었고, 덩치도 나보다 큰 아이가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아이들의 따뜻함과 친절했던 기억은 11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하나하나 주문한 음식을 서버가 모두 기억하고 제자리를 찾아 주었다.

방금 만든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릇에서 연기가 올라왔고, 이걸 어떻게 먹어야 하나 고민할 틈도 없이, Sam이 나와 아내의 옆자리로 와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Sam의 쌀국수 먹는 방법의 대한 강의가 끝나자, 나머지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만의 레시피가 있는 듯 빠르게 음식을 제 가공 수준으로 만들고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하였다.

초딩입맛인 나도 호기롭게 아이들 앞에서 질 수 없다는 듯이 숙주, 양파, 여러 종류의 이름 모를 녹색 이파리와 테이블 위에 넣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일단 다 때려 넣었다.

아내는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고, Sam은 마치 "형 쫌 하는데?"라는 표정으로 날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의 첫 쌀국수가 제조되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숟가락으로 먼저 국물을 한입 먹어보았다.

풉!

코는 너무 매웠고, 입안은 여러 가지 녹색 이파리와 그중에서 최강의 향을 자랑하는 고수의 냄새가 강하게 남아 있었다.

아내는 짐작이라도 한 듯 쳐다보고 있었고, 아이들은 재밌다고 웃으며 난리도 아니었다.

다시 한번 도전을 해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서버가 우리 테이블로 왔고, Sam과 잠깐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더니, 내 자리로 와서 웃으며 나의 황금 레시피 쌀국수를 갖고 주방으로 들어갔고, Sam은 잠깐 기다려 보라는 재스처를 취하곤, 다시 쌀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몇 분후 나의 쌀국수는 리셋이 되어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나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땡큐 땡큐"를 연발했다.

이번엔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넣었다.

그렇게 다시 완성이 된 나의 두 번째 쌀국수는 성공을 한 것 같았고, 국물을 먹어보니 먹을만하고 생각되고, 먼저 먹은 아이들이 기다릴 것 같아서 대충 마무리하고 빨리 먹으려고 하였다.

그때 당시에는 아이들이 기다리는 것이 미안하고, 충분히 배부르게 먹어서 그만 먹고 나가자고 했지만, 사실.... 먹기 싫었다.

국물은 괜찮았지만, 안에 쌀국수 면은 구면이었지만 초면인 고기들이 종류가 너무도 많아서 입에 넣는 순간 왼쪽은 고기, 오른쪽은 면으로 나뉘어, 왼쪽 입안에서는 초면인 고기 한 조각이 계속되는 되새김질로 인해 분쇄가 되고 있었고, 오른쪽 입은 국수면만 따로 빼내어 씹어서 소화시키는 특수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 앞에서 씹뱉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난 그저 아이들 앞에서 어른처럼 보이길 원했는데, 씹뱉을 하고 안하고의 차이가 어른의 정의라도 되는 듯, 초면 고기를 분쇄라도 해서 삼키겠다는 의지뿐이었다.

역시, 나는 결혼도 하고 더 이상 아이들이 알고 있는 형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어른임을 스스로 인정이라도 하듯, 분쇄된 고기를 삼키며 나름 뿌듯함을 느꼈다.

큰 성과가 있었던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오니, 시원한 샌디에이고 바람이 콧속으로 들어와 입안에 남아있던 고수의 향을 날려주는 것 같아 나는 더 크게 바람을 흡입했다.

아이들이 계산하고 나오니, 우리를 도와주었던 서버가 따라 나오더니 "웰컴 투 아메리카!" 라며 나와 아내에게 상업적인 미소를 뗬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내가 뭐라고, 우리가 뭐라고, 처음 본 외국에서 온 한국사람에게 밥 한 끼 먹었을 뿐인데, 문 밖에 까지 나와서 이렇게 인사라도 해주다니, 미국은 참 신기한 나라라고 생각하며, 산보를 하듯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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