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처럼 늙어가기

슬기로운 간병 생활 10

by 홍재희 Hong Jaehee


딸은 동네 정형외과. 어머니는 대학병원 정형외과.

병원에 가면 하루가 다 간다.



공원에 가면 세상 사람들이 다 건강하고 활기차 보이고 병원에 가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픈 것 같다. 차례를 기다리다가 병원 모니터 진료 병명 안내와 소개 비디오를 유심히 지켜본다.


강직성 척추염.

급만성 요통.

허리 목 디스크.

요추관 척추 협착증.

척추측만증.

오십견.

십자인대 파열.

회전근개 파열.

석회성 건염.

충돌증후군.

습관성 어깨 탈구.

관절와순 손상.

삼각 손목 유연골 파열.

방아쇠 수지.

팔꿈치 관절염.

퇴행성 관절염.

아킬레스 건염.

손목인대 건염.

테니스 엘보.


등등등. 많기도 하다. 병명. 셀 수가 없다. 전부 기억하기조차 어렵다. 원인은 전부 염증과 퇴화. 사고로 다치든 늙어서든 결국 뼈든 힘줄이든 과도하게 쓰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면 염증이 생기고 노화하면 낡고 마모되어 생기는 질병. 뭐든 과하면 탈 나고 늙으면 낡는다. 부러지고 부서지고 구부러지고 꺾인다. 자연의 섭리.




어머니를 모시고 대학병원행. 오늘은 6개월마다 정기 검진이 있는 날이다. 척추센터에 갔다.팔순이 넘은 노모는 재검사를 받았다. 코로나로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던 2020년 여름. 팔순이 넘은 노모는 5시간이 넘는 척추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다. 그 후로 매년 어머니는 일 년에 한 번씩 병상 신세를 진다.


수술 후에도 끊임없이 통증을 호소하던 어머니. 검사를 해도 수술 부위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수술하지 않은 다른 곳의 신경이 눌려 문제가 생긴것. 그러나 이제 어머니의 나이도 있고 더 이상의 큰 수술은 불가능했다. 결국 수술이 아니라 아픈 부위의 통증을 조금이나마 줄여주는 시술을 했고 오늘은 시술 겅과를 보기 위한 정기 검진날.



퇴원 후 통원을 다닐 때 휠체어는 죽어도 안 탄다고 실랑이를 벌였던 노모. 허리 고장 난 양반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안 돼요! 걸어 다닐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리는 어머니를 겨우 만류해서 휠체어에 억지로 태웠다. 작년만 해도 절대 지팡이는 안 집는다고 생고집을 부린 어머니는 올 초 또 한 번 낙상을 하고 말았다. 결국 뼈에 금이 가 병원에 입원했고 나는 또다시삼 주간 어머니 곁에서 간병을 했다. 병실 생활 중 어느 날 어머니는 느닷없이 눈물을 펑펑 흘렸다. 어머니가 아프고 나서부터 매번 보던 어머니의 눈물이었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어머니는 속 깊은 울음을 토해냈다. 너한테 너무 미안해서... 내가... 미안하다. 미안해. 퇴원 후 집에 돌아온 다음부터 어머니는 말없이 지팡이를 집기 시작했다.





대수술 후 삼 년이 흐른 지금, 어머니는 이제 내가 말하지 않아도 조용히 휠체어에 앉는다. 밖에 지팡이 집고 나서길 꺼려했던 어머니가 스스로 먼저 지팡이를 찾는다. 절대 안 탄다던 휠체어에 앉는 어머니. 남의 신세를 지는 걸 싫어하며 의존하거나 매달리는 성격이 아닌 어머니, 뭐든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걸 스스로 하려고 하는 성격의 어머니가 순순히 내 말을 따르는 모습에 적이 안도감이 들면서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온다. 딸년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 엄마가 마음이 놓이면서도 기쁘고도 어쩐지 낯설다. 어머니. 아아, 그 새 또 많이 늙었다.



ㅡ 엄마. 그거 알아요? 난 이상하게 병원에 오는 게 좋아. 왠지 모르지만 병원 오면 그냥 집에 고향에 온 거 같아.

ㅡ얘가 미쳤어. 병원 오는 게 뭐가 좋냐.

ㅡ 그러게 말이야. 난 어릴 적 엄마가 나 병원 데려올 때 생각나요. 나 갓난 아기 때 병원서 수술하고 엄마가 나 맨날 업고 병원 다닌 기억이 내 무의식 어딘가 남아있어서 그런 거 같아. 병원이 아주 어릴 적부터 익숙해서 그러나 보지.

ㅡ 별 웃기는 소릴 다 하네.

ㅡ 재밌잖아요. 미끄럼 탄다고 생각하세요.

ㅡ 너 바쁠 텐데 미안하다.

ㅡ 난 엄마랑 병원 오는 거 좋다고요. 그니까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ㅡ고맙다.



어머니를 휠체어에 모시고 접수 진찰 처치 수납 병원 코스를 돈다. 씽씽.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을 지친다. 휠체어 바퀴가 뱅글뱅글 돈다. 신난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어머니가 탄 휠체어를 힘차게 밀 정도로 내가 젊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가. 허리통증이 나아졌다는 것도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아픈 것도 서로 돌아가면서 아파야지 동시에 아프면 방법이 없잖은가. 아프지 않은 허리를 곧추세워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 감사한 일이다.




어머니는 키가 14cm 나 줄어든 동화 속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다. 허리 디스크에 협착증 골다공증 환자인 어머니. 의사 선생이 주사를 맞으려면 바지를 내려야 한다니까 부끄럽다며 어머니왈


ㅡ 아이고 선생님 앞에서 똥구멍 다 보이게 생겼네.


그 말에 웃겨 쓰러질 뻔. 어머니 당신은 키가 줄어들고 주름이 느는 만큼 농담도 늘었다. 주름 하나에 재치 하나. 1cm 줄어든 키에 지혜 하나.

반평생 통증에 시달리는 삶을 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우리 어머니처럼 그렇게 살아야겠다.

슬픔과 고통을 끌어안고 춤추는 삶.

농담처럼 살아가기의 고수인 어머니처럼.






어린 시절 그토록 무서웠던 호랑이 선생님, 아빠가 감옥에 갔을 때도 자식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엄마, 어떤 역경 속에서도 울지 않고 강인해 보였던 울 엄마가 이리도 여리고 약하고 작은 사람, 연약한 사람이 되었다니! 아 그제야 나는 엄마라는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험난했던 그 시절 엄마는 우리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남몰래 혼자 울고 있었겠구나. 나처럼 마치 내가 엄마를 닮은 것처럼. 나는 늙어버린 엄마를 보면서 마치 내가 낳고 키우는 아이 같다.... 는 기시감에 사로잡힌다. 나는 엄마를 돌보는 거로 어쩌면 이 업을 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미워하고 원망했던 사람. 같은 여자로서 엄마의 일생은 너무 속상하고 슬프고 힘들고 가슴 아팠었는데. 그래서 미워도 미워할 수 없었던 사람. 그 이름. 엄마. 나를 삶 앞에 고개를 숙이고 생 앞에 무릎 꿇게 하고 나를 살리고 운명을 깨우치게 하는 엄마. 지금까지 살아주셔서 고마워요.


엄마. 알아요? 사랑한다면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는 거래요.


엄마.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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