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에 대한 사색 3
나는 아플 때 글을 쓴다.
내 마음과 감정이 흐르는 곳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흔들리는 감정과 떠오르는 생각을 명징한 언어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글을 쓰다 보면 그러면 걷잡을 수 없이 풍랑에 요동치는 감정이 어느새 졸졸졸 흐르는 한가로운 시냇물로 변해 있다.
글을 쓰면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냉철하게 집요하게 직시하면서 자신이 겪는 불운과 고통을 객관화할 수 있게 된다.
글을 쓰면 통증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라 몸이 보내는 이야기이며 질병은 더 이상 불운이 아니라 내 몸이 보낸 친구가 된다.
질병이란 자신이 먹고 마시고 살아온 이야기가 몸에 아로새겨지는 것이다.
질병은 고로 나의 역사.
그러므로 나는 글을 쓰면서 병을 읽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비 없는 생이 준 불행에 무방비로 던져졌을 때
그 모든 불운에 맞서는 최선의 방책,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는 최고의 무기다.
나는 아플 때 글을 쓴다.
입 안을 맴돌고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을 뭐든 그 어떤 것이든 글을 쓰고 또 쓴다.
통증에 육신이 점령당할 때는 정신마저 넋이 나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통증에 잠식당할 때는 음악을 듣고 통증에서 풀려날 즈음부터 글을 쓴다.
어느 정도 통증의 홍수가 지나가고 잔잔한 파도가 찰랑거릴 무렵에는 글을 쓰고 싶다. 수 일을 앓느라 굶은 사람이 맹렬한 식욕에 불타듯이.
통증이 지나간 자리에 서서 나는 이 기분과 상태와 생각을 끄집어내어 글로 남기고 싶다. 기록해야 한다는, 사라지기 전에 뭐라도 남겨야 한다는 맹렬한 의지에 불탄다.
내게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고통에 굴복하지 않았음을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행위다.
온 힘을 다해 온 마음으로 존재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보나링에이정 맥페란정 기넥신에프정 가스모틴정 바스티남정 헤다크캡슐 마이드린캡슐.
처방전을 소리 내어 읽는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수식 기호 또는 뜻 모를 암호만 같다.
요즘 내가 먹는 약 목록. 어지럼증 억제제. 구토 메스꺼움 억제제. 혈액 순환제. 일명 멀미약.
석 달째 약을 달고 산다. 병원에서는 항생제와 주사 더니 지금은 약봉지다. 식후 약이 커피 한 잔 마시듯 자연스러워졌다. 쌓여가는 처방전과 약봉지를 정리하다가 문득 늙으니 늘어나는 건 약봉지밖에 없다고 푸념하시던 노모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 태어나 제 몸 사용 설명서를 오독하는 주인을 잘못 만나 이래저래 휘달리는 내 몸뚱이가 참 안쓰럽다. 쯧쯧. 주사와 약에 찌드는 거나 술담배에 찌드는 거나 별반 다를 게 없는 듯.
뜻을 알 수 없는 이국적인 이름이 줄줄이 적힌 처방전을 들여다본다. 처음 나간 데이트. 이제 곧 만나게 될 낯선 사람을 기다리는 순간, 그 설렘 같은 외국어로. 무슨 무슨 정이라는 끝말이 붙은 그 이름은 내게는 마치 누구누구 씨처럼 들린다. 마치 마이클이나 소피처럼 엔테론 씨, 에어탈 씨, 알비스 씨, 자낙스 씨.
나는 연애편지 읽듯 처방전을 소리 내어 읽는다.
엔테론 정. 황색 원형 장용성 필름 코팅정 치질약&정맥류 치료제 모세혈관 투과성 감소 모세혈관의 저항 증가 정맥 림프기능부전 관련 증상 개선.
에어탈정. 흰색 코팅 정제 비스테로이드성 소염 진통제 소염(염증 완화)과 진통제.
알비스정. 백색 원형 필름 코팅 정제 기타 궤양 치료제 위산분비억제 및 점막 보호 헬리코박터파이로리 억제.
자나팜정. 백색 타원형 정제 수면 진정제 및 신경 안정제 불안 우울 불면 공황장애 등 증상 조절 기타 다양한 목적으로 처방될 수 있음.
에어탈 씨는 염증을 내려주는 진통제라니 수술 후부터 매일 다르고 새로운 통증에 익숙해져야 하는 나로선 단번에 납득했지만 엔테론 씨는 좀 갸우뚱하다. 이식한 인대에 혈관이 생성되기 위해서 필요한 약이겠지만 웃기는 것은 엔테론 씨가 치질약으로도 쓰인다는 거다. 치질과 모세혈관 사이 특별한 상관관계. 부위는 달라도 원인은 같다? 지금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 약을 복용하고 있을 알지 못하는 어느 치질환자에게 왠지 모를 공감과 연대의식을 느낀다면 내가 이상한 거겠지?
알비스 씨는 고질로 달고 있는 식도염과 만성 위염, 기능성 위장장애를 달래기 위함이 분명하다. 병원에 누워있는 동안 공교롭게 재발해서 꽤나 고생을 했었다. 곤히 잠든 새벽에 아니면 식사 때마다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이 불청객 덕에 잠도 못 자고 밥도 넘길 수 없어서 몹시 괴로웠다. 다행히도 발 빠른 간호사와 의사가 정형외과 약을 바꿔주고 위장약을 따로 처방해 주었다. 이 또한 의사의 세심한 배려라고 여기련다.
넘치는 식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쇠도 씹어먹는 튼튼한 소화기를 지닌 사람은 위장장애가 대체 뭔지 모른다. 먹고 싶어도 때때로 먹을 수 없는 고통을, 음음식을 삼키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허기를 채우는 거 외에는 식탐이 없는 나 같은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다. 고로 육체적 고통은 각자의 육체에 아주 충실하다.
그리고 일명 자낙스라고 널리 알려져 있는 자나팜 씨. 자나팜 씨를 검색해 보니 이런 설명이 뜬다.
"자낙스라 불리는 이 약물은 알프라졸람 디아제팜(발륨) 로라제팜과 분자구조가 유사, 벤조디아제핀 약물로 항불안제, 공황장애에 주로 처방되는 약물입니다. 벤조디아핀계 약물 중에서 작용 발현 시간, 효과도 빠르며 6시간 이상 지속됩니다. 이 외 진정효과, 수면유도 효과, 골격근 이완, 진경 효과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자나팜 씨를 만나고부터 난 좀 착해진다. 병상에서 자나 깨나 책만 들여다보고 새벽에 잠 안 자고 돌아다니는 나를, 까칠한 나를 좋게 말해 신경과민에 불안하다고 판단한 의사가 베푼 친절이 아닐까 싶다. 쉽게 졸리고 잠도 잘 자고 기분이 착 가라앉고 통증에도 덜 예민해지고. 아아, 이 모든 게 자나팜 씨 덕분이었다. 내 자아성찰의 배경에는 다름 아닌 자나팜 씨라는 화학작용이 있었다. 난 그것도 모르고 내가 성격이 좋아진 줄로만 알았다. 쳇! 그럴 리가 없지.
그런데 아침 먹고 약 먹고 커피 마시는데 자나팜 씨와 카페인 씨는 상극이 아닌가? 잠자라는 자나팜 씨와 잠 깨라는 카페인 씨 둘 중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하는 건가? 의사의 강권으로 알코올 씨와 니코틴 씨를 무정하게 버린 마당에. 나는 자나팜 씨와 카페인 씨를 둘 다 사랑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갈팡질팡 즐거운 비명. 나는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하며 혼자 히죽히죽 웃는다.
2013년에서 2014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어지럼증으로 처음 쓰러졌던 해다. '양성 돌발성 체위 현훈증'이라는 의학적 병명을 달고 일명 이석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지 올해로 딱 십 년이 되었다. 그 사이 서 너 차례 재발해서 입퇴원을 반복했다. 잠을 못 자고 잘 못 먹고 스트레스가 심하고 체력이 바닥나면 과로가 누적되어 한계치를 넘으면 어김없이 어지럼증이 찾아온다. 몸의 균형이 깨지고 문제가 있다는 걸 감지한 육신이 자동적으로 ON/OFF 스위치를 작동시키는 자정 작용 시스템, 건강을 지키려는 몸의 신호수, 몸이 집이라면 불이 난 집에 불을 끄려고 몸이 빨간 불을 켜고 사이렌을 울리는 경고음인 셈.
어지럼증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몸. 아침마다 목과 어깨가 뻐근하다. 심지어 허리마저 욱신거린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누웠다 일어설 때마다 엄습하는 어지럼증에 대비해 뼈 마디마디와 힘줄 하나하나가 잔뜩 긴장하는 탓이다. 병과 의심과 나 자신에 대한 불신. 그런 내 정신에 저항하는 육신의 반란. 이런 모든 것들과 함께 혼자서 나 자신을 끌어안고 보냈던 연말.
육신의 고통이 찾아올 때야 비로소 살아있음을 자각하는 아이러니. 깨어있음의 고통이라니. 고통의 순간에 명료해지는 의식이라니. 내 몸이 고통 속에서 내게 들려주고 싶었던 것, 되찾고 싶었던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우리는 너무 높고 너무 강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식의 좁은 한계를 초월한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유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 밖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 몸이 없이는 아아, 나도 없는 것이다.
육신의 고통은 자신의 내면에 고도로 집중하게 한다. 고통의 순간은 바로 자신의 내면을 오롯이 자각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내면 속에는 언제나 아주 미세하고 절망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그 차이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래서 질병을 사고나 일시적인 시련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 잔인하게 말한다면 - 일종의 소명으로, 또는 질병에 적응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병이 낫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이 낯선 상황에 대해 명철한 시선을 던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프다고 (남들)에게 미안하지는 않다.
다만 나 자신에게 미안할 뿐이다.
천 년 만 년 멀쩡히 살 줄 알고 무슨 짓을 해도 끄떡없을 줄 알고 자만한 내가.
제 몸을 돌보지 않는 지난날이.
타고난 대로 생긴 대로 체질 대로 살지 않으면 반드시 뒤탈이 난다는 말이,
어릴 적엔 뭔 소린 줄 몰랐었는데.
병상에 눕고 나서야 병원을 들락거리고 나서야
병에 대해 끊임없이 사색하고 성찰에 성찰을 거듭하고 나서야
내 앞에 놓인 삶이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아픈 사람은 나이불문 모두 노인이 된다.
병에 걸리면 우선적으로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숨 쉬는 것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통증이요 고통이요 지옥이 된다.
그러므로 병마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 방법을, 극복하는 게 아니라 공존할 방식을 찾아야 한다.
질병과 함께 살기.
내 몸과 마음을 다스리기.
삶과 생 앞에 겸허해지기.
절망 속에서도 스스로를 느끼고 고통을 견뎌 나갈 힘을 찾아야 할 때 바로 그때가 되어서야 고통을 통해서 깨우치는 것.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것이 나게 고통을 주어도, 나는 변함없이 나 자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그리고 어느 날 내가 더 이상 내 자신이 필요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때에서야 그 순간 나도 사라져 가겠지.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그러니 살자. 살아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