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사람은 모두 노인이다

질병에 대한 사색 1

by 홍재희 Hong Jaehee


도시의 해거름녁. 해가 멀리 서녘으로 저물고 또 하루가 이렇게 간다.



목덜미가 움츠러드는 겨울이 오자마자 아뿔싸, 찾아온 친구. 편두통이 내 머리를 숙주로 삼고 놔주지 않는 요즘. 이것저것 일 때문에 분주히 밖을 돌아다니고 고작 이틀밤을 새벽에 잤을 뿐인데 체력이 금세 바닥났다. 수술 전과 후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재활치료는 제자리걸음. 차들로 꽉 막힌 도로 한복판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갇혀있는 정체상태. 이제 내 무릎은 사고 전 다치기 전 상태로 돌아갈 순 없을 것이다. 통증이 한 번씩 찾아올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삶 앞에 경거망동할 때마다 뒷덜미를 잡아주는 야경꾼. 앞으로 남은 생을 함께 걸어갈 길동무 친구로 삼으라는 거구나. 그다지 슬프거나 화가 나진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고 편안해졌다. 생로병사는 삶의 순리일 터이고 그중에 생을 경험하고 노를 향해 가는 길에 병은 친구일 것이니 죽음으로 가는 생에 그마저 벗 삼으면 덜 외로울 테니까.


환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건강한 사람도 아닌 그 사이 애매한 경계에 서 있게 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 건강한 사람이 환자를 이해하려면 무한한 인내심이 필요한 것처럼 환자가 건강한 사람들에게 다정해지려면 거의 성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어떤 시공간적 단절도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질병보다 더 분명할 수는 없다. 아픈 사람은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노인이다.



이제 나에게만 보이고 나만 느낄 수 있는 통증이 허락해 준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발짝 떨어져서 사물을 사람을 상황을 보는 것이다. 아마도 에너지총량의 법칙에 비유할 수 있을 터인데 무한히 쓸 수 있는 에너지가 고갈된 마당에 남은 에너지를 쓸데없는데 쏟아부을 여력이 내게는 이제 없다는 자각. 상대가 원하는 관계가 아닌 내가 원하는 관계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결심. 무분별한 애정을 거둬들이고 방만한 관계를 선별 정리해야 할 때라는 사실.



그러나 마음의 고통을 겪는 사람과 육체의 고통을 겪는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그 어느 것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렇듯 내가 쌓아 놓은 성안에 모든 에너지를 응축하는 것을 이기심이나 오만함 또는 무심함과 까칠함으로 볼 지도 모른다.


우리는 남을 소유할 수 없듯 우리 자신을 결코 소유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 밖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내 몸의 주인이 '내'가 아니었듯이 내가 내' 몸' 없이 존재할 수 없듯이. 나는 차라리 질병에 '적응'하고 싶다. 이 말은 완치되어 '정상'이 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상태를 인정하고 그 상황에 대해 명철한 시선을 던지는 자가 되는 것이다.


질병을 일종의 사고나 일시적인 시련, 재수 없는 불행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을 일종의 소명으로 여기는 것. 질병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래서 본성이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내 바람이고 희망이다. 내 희망은 내 주의력 편에 서 있다. 그러므로 나는 달라져야 하고 달라질 것이고 달라질 것이다.



이른 저녁식사를 끝나고 노을과 마주하면서 난 내 자신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그 내가 또 다른 나와 함께 이야기를 하면서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있었다.





편두통이 사라진 자리에 이석증이 찾아왔고 재활치료를 끝낸 후 내 다리를 되찾았다. 그러나 외관상 멀쩡해 보이는 다리는 여전히 나만이 느끼는 미세한 무엇의 차이가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이질감이다. 통증은 아닌데 뭔가 아, 철렁한다. 저릿하거나 시근하거나 뻑뻑해지는 불유쾌한 느낌. 그럴 때마다 나는 그렇구나와 어쩔 수 없지 그리고 괜찮아 사이를 부유한다. 평상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다가 스쿼트를 할 때나 외발서기를 할 때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날이 추워질 때 비 오고 습한 날 갑자기 무릎에서 보내는 익숙하고도 날선 감각. 불현듯 잊고 있었던 그 감각이 되살아난다.


상처란 그런 것이다. 몸의 상처나 마음의 상처나 잊을만하면 되살아나 기억하게 하는 것. 상처가 아물고 흉터가 서서히 몸의 일부가 될 때까지 몸과 하나가 되어 의식하지 못할 때까지 시간이 지나기를 재촉하지 말고 서두르지 말고 그저 묵묵히 기다려야 한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은 없지만 잊게 해 준다. 모든 상처가 나이테가 될 때까지. 상처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추억으로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


-오늘 해질녘 하늘을 기다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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