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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밥이란 무엇인가

by 홍재희 Hong Jaehee


어린 시절 골목에서 놀다 동네 어귀에 생선 굽는 냄새에 밥 먹는 시간을 알았다. 그 순간 배꼽시계는 요동을 친다. 맹렬한 식욕 그리운 허기에 부리나케 뛰어들어간 집. 거기에 엄마가 차려놓은 맛있는 밥상이 있었다. 어디선가 코를 자극하는 된장찌개 냄새 고등어 굽는 냄새에 자동적으로 어머니가 해주던 김이 모락모락 하는 따끈한 밥상이 생각나는 법. 그러나 이제 그런 엄마는 없다. 그리고 이제 나 스스로를 위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것쯤은 아는 나이가 되었다.


주변에 알고 지내는 독신 중에 혼자 밥 먹기 싫다고 불 꺼진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징징대는 남자들이 꽤 있다. 스스로 밥을 해 먹기가 싫다는 볼멘소리 철없는 투정이다. 이제 그 엄마가 없으니 자신을 기다려주는 엄마가 아내였음 하고 바랄 뿐이다. 집에서 자기를 기다려주는 사람은 언제나 '엄마'이길 바라는 웃자란 아들. 엄마의 잔소리만 빼고 밥은 먹고 싶다는 욕심. 그 그림 속엔 정작 자신은 없다. 그 밥을 직접 하고 밥상을 차리는 사람이 자신일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남자들. 이런 투정을 늘어놓는 남자들은 여자도 너만큼 밥상 차리기 귀찮고 밥 해 먹기 싫다는 걸 생각조차 않는다.


한 남자가 사랑고백이랍시고 내가 해준 밥을 먹고 싶다고 한 적이 있다.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았다. 기가 차서 네 엄마랑 살거나 돈 많이 벌어 밥 해주는 파출부 식모를 구해라 답해주었다. 이런 남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너무 한심해서 다시 보게 된다.


이런 남자들에는 크게 세대 나이 차이도 없다.


자신의 허접한 자취 생활을 드러냄으로써 여자에게 연민이라도 불러일으키고 싶은 의도인지. 인스턴트 음식에 식당밥에 건강을 해쳤다며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말에 쓴웃음이 난다. 이런 남자들은 일상 무능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놓고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들이 사는 집에는 피자나 치킨 등 배달음식 스티커가 줄줄이 냉장고에 붙어있기 마련이다. 집 한구석에는 일회용 배달 포장용기가 빈 소주병이 쌓여있을 것이다..


대충 먹고 막살아도 에너지 넘치는 철없는 스무 살 팔팔한 이십 대도 아닌데 이들은 여전히 그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런 남자들에게 살림은 그저 결혼으로 가는 전 단계일 뿐 여전히 하숙생 자취 이상은 아니다. 살림은 아내가 해주는 거라 믿는 자의 게으름과 오만이라. 이런 남자는 살림에 담쌓고 난봉꾼으로 살아도 죄가 아니었다는 아버지 시대에 진한 향수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도 남자가 어딜 부엌을 살림은 여자가 라는 또는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란 남성들은 안타깝게도 앞으로 도태될 존재들이다.


어머니에게 아들은 이 세상에서 남편 말고 자기가 '낳은' 남자라서 더 사랑할 존재다. 그러나 당신의 어머니가 아닌 여자는 당신을 그런 식으로 사랑할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여자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한다면 그 사랑은 효자라는 이름이 아니라 마마보이라는 비웃음을 사기 마련이다. 아니면 보수적인 남성우월주의자란 꼬리표를 달게 된다. 시대가 바뀌면 동일한 의미도 다르게 정의된다.


자기 주도형 독립적인 생활을 잘하지 못하는 이런 미욱한 남자들에게 대다수 한국인들은 조언이나 덕담이랍시고 빨리 결혼해라 여자가 생겨야지 제대로 살지 하는 말을 던진다. 이 말에는 언제나 여자가 대신 살림을 도맡아 주면 이 남자가 입성이 좋은 사내 반듯한 사람이 될 거라는 생각이 기본으로 깔려있다. 반대로 똑같이 녹록지 않은 일상에 밥벌이에 시달리며 녹초가 되어 냉장고에 배달음식 스티커를 붙이고 설거지감을 쌓아놓고 사는 여자가 있다 치자. 그런 여자에게는 요리를 못한다며 칠칠치 못하다는 소리를 함부로 던진다.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고 부양하는 여자에게는 가사노동마저 족쇄이자 굴레다.


사람들 대부분 특히 남자들은 밥을 떠올릴 때마다 어머니의 손맛이라는 집밥에 대한 그리움 따위로 추억을 소환한다. 마치 그것이 밥에 대한 유일한 정서라는 듯이. 그러나 자라면서 어머니의 밥을 먹고 어머니처럼 밥을 하고 그러면서 밥을 해야 하는 여자라는 존재를 자각한 내게는 밥이란 해준 밥을 맛있게 먹는 행위만은 아니었다. 밥을 한다는 것 밥상을 차린다는 것은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되어야 하는 지루하고 지난한 노동이며 동시에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어야 사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수행해야 할 삶 그 자체이다. 고로 살림이란 나를 살리고 집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일, 거룩한 일상인 것이다.



누구든지 제가 한 밥을 남이 맛있게 먹는 걸 보면 흐뭇하고 기쁜 마음이 드는 건 인지상정이다. 남녀 차이가 없다. 요리사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라. 어머니가 아내가 하는 말과 뭐가 다른가. 다른 점은 남자 요리사는 전문가 능력자로 대우받고 부러움을 사지만 요리와 살림은 으레 여성의 일 또는 몫이라 값싸게 하찮게 취급된다는 것뿐.


나는 불 켜진 집에서 날 기다리는 가족이라는 이미지에 대한 향수가 별로 없다. 오히려 불을 켜고 나면 이제 가면을 벗고 오롯이 나 자신일 수 있다는 사실에 편안함과 행복감에 젖는 경우가 더 많다. 전세대에 걸쳐 1인 가구가 급속도로 늘고 있다고 한다. 싱글족이 혼자 사는 이가 도시생활의 대세 주류가 되었다. 초고령화 사회에서 시골에만 노령 1인 가구가 많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서울만해도 2025년 기준 이미 최대 다수를 차지하는 건 1인 가구다. 과거 이상적인 정상가족을 대표하던 4인 가구는 뒤로 밀려났다.


결혼유무와 관계없이 다양한 형태의 삶이 가족이 식구가 엄연히 현실로 존재하는데 방송은 허구한 날 아빠엄마 아들딸이 이루어진 이성애자 4인 가족 판타지에 목맨다. 눈을 뜨고 당신을 주변을 좀 돌아보라.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똑바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지금 오늘 밥 같이 먹거나 먹어주는 사람이 가족이다. 나는 핏줄 뿌리 혈연이라는 의미에 집착하는 가족이라는 단어보다 같이 밥을 먹는 입이라는 식구라는 말이 더 좋다. 식구가 가족이다. 가족이랍시고 밥을 같이 먹는 시간도 없는데 무슨 가족애 집밥 타령인가. 집밥은 누가 해준 게 아니라 집에서 스스로 해 먹는 밥이다. 잃어가는 전통 어쩌고 보다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할 방법이나 모색하라.



소설가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에 대해 통찰했으나 밥 하기의 지겨움에까지 이르진 못했다. 살림은 누군가가 꼭 해야 하지만 해도 표가 나지 않고 안 하면 금방 표가 나는 일이다. 하지만 날마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다. 눈뜨고 잘 때까지 누구나 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남자든 여자든 젠더 구별 없이 제 앞가림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인 살림을 스스로 영위해야 한다. 자기돌봄의 중요성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일상의 디폴트값이며 자기돌봄의 생활화야말로 곧 생존력이다.



과거에는 가정을 이루면 저절로 어른이 되었다.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고작 반푼이 어른일 뿐이다. 이 시대에서는 남녀불문하고 성인이 된 후 부모의 품을 떠나 주체적으로 제 삶을 꾸려나가는 자, 스스로 밥벌이를 하는 '아빠 '가 되고 스스로 밥상을 차리는 '엄마'가 동시에 가능한 사람이 제대로 어른이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감내하고 밥 하기의 지겨움을 감내하는 자가 남녀 공히 성숙한 인간일 것이다.


- 덧붙여. 여자들이여. 정신차려라. 사랑하는 당신이 해준 맛있는 밥 먹고 싶다며 줄구장창 칭얼대며 밥타령 하는 남자와 사귀고 있는 여성들은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길. 집에 불 켜놓고 밥 해놓고 기다리다 혼자 찬밥 먹는 신세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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