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아일랜드 일 년 살기
처음 낯선 여행지에 도착했을 때 스타벅스에 들어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익숙한 느낌. 세계 어느 나라의 스타벅스에 가건 모국의 스타벅스에 온 것과 똑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때로는 그렇게 익숙한 커피숍이 맛집이기도 하다.
낯선 모험을 위해 한국을 떠나왔지만 나 역시 더블린에서의 처음 몇 끼니를 스타벅스에서 채웠다. 알고 있는 커피와 알고 있는 샌드위치. 아침에 눈을 뜨니 모든 것이 뒤바뀌어 있는 어리둥절한 상황에서 잠시라도 알고 있는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었나 보다.
어학원과 하숙집을 미리 등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입국 후 첫 3일은 더블린 시티센터 인근의 한 호스텔에서 숙박하기로 했다. 수도에 머물면서 천천히 도시 구경을 하고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카페에서 차근차근 차후 계획을 정리해 볼 생각이었다.
시차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호스텔에서 머물렀던 3일은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나 어두운 거리를 혼자 배회하곤 했다. 새벽 4시의 시티센터는 거의 아무런 소리가 없었다. 24시간 카페와 편의점이 드물게 오픈해 있었고 5시가 되어야 쓰레기 수거 차량이 삐-삐- 소리 내며 천천히 도로를 달렸다. 그때가 11월 중순이었는데 새벽 공기가 생각보다 따듯하고 상쾌했다.
7시 즈음 스타벅스가 오픈했던 것 같다. 배회를 멈추고 스타벅스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며 창밖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잠에서 깨어나는 도시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금세 해가 떴고 거리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카운터에서 주문하는 사람들의 대화를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 것도 재미있었다. 주문을 할 때 어떤 영어 표현을 사용하는지 엿들을 수 있어서 매우 유용한 공부가 됐다. 카페 점원과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안부를 묻고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영어권에서 서로에게 안부를 묻는 인사말들은 참 좋은 것 같다.
더블린은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는 도시이다. 거리의 미술가와 음악가가 많고, 나무와 녹색 공원이 많고, 동화 속에 나올 법한 독립 서점이 많고, 소규모 갤러리나 편집숍이 많고, 빈티지숍(주로 Charity Shop)이 많고, 펍과 카페가 많고, 베지테리언이나 비건을 위한 레스토랑도 많다. 더블린 중심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낮고 넓은 언덕들과 도시의 빌딩들이 조화를 이룬 멋진 광경도 쉽게 볼 수 있다.(지금 이 글을 쓰다 보니 더블린에 너무 가고 싶다!)
하지만 이 모든 아름다움을 첫 일주일 만에 온전히 만끽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나에게도 적응기가 있었다. 아름다운 더블린 구경을 마치고 혼자 호스텔 도미토리룸으로 들어오면 쓸쓸함이 슬금슬금 밀려오곤 했다. 그동안 여행을 많이 다녀봤지만 여행지에서 생계유지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어딘가에 적을 두었거나 부모님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워홀러는 나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아일랜드를 여행함과 동시에 경제 활동도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설렘의 밑바닥에는 초조함이 늘 깔려 있었다. 도시는 아름다운데 나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곳이 한국이길‘하고 바란 적도 있다.
"Life is trouble, only death is not." 삶은 문제투성이이며, 죽음만이 그렇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말이다. 여행이 불안정할 것임을 알고 떠나왔고, 익숙함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이 이 여행의 목적이었다. 비록 쓸쓸함으로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그리워지기도 했지만, 불안이 올라올 때마다 더블린의 아름다움에 한껏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차갑고 촉촉한 겨울 공기를 마시며 매번 다른 방향으로 도시를 걷다 보면 곧 다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게 되었다.
불안 속에 빠져있으면 삶이 얼마나 무궁무진한 가능성으로 넘쳐나는지 알 수 없다. 낯선 상황 속에서 불안을 느끼는 건 자연스럽다. 하지만 불안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주로 산책을 나섰고, 좁은 호스텔 방에서도 간단한 요가 동작을 수행함으로써 몸의 감각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웅크리고 싶을 때 오히려 온몸을 쫙 펼쳐보는 것이 정체된 기분을 환기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렇게 몸을 움직여 걱정을 가라앉히고 나면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아지면 그 일들을 실제로 이뤄낼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들도 뒤따랐다.
아일랜드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진 후에도 한 달에 한두 번 스타벅스를 방문했다. 무엇보다 오랜 시간 앉아 있어도 눈치 보이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고, 사람 구경하고(더블린 스타벅스에 앉아 있다 보면 유화 페인팅 작업들을 잔뜩 펼쳐놓고 커피 한잔 하는 페인터들도 종종 볼 수 있다), 노트북으로 여러 정보를 찾다 보면 금세 서너 시간이 지나곤 했다. 앞으로의 글에서는 더블린에서 하고 싶은 일들을 어떻게 이뤄냈고 또 해야 하는 일들을 어떤 절차를 통해 겪어나갔는지 이야기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