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런 내가 좋다
오후 12시, 친구 집에서 나섰다. 화창한 날씨 11월의 하늘은 금방 세수한 것 같다. 바람이 약하게 분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이런 날씨가 좋다. 주택가 골목에서 버스가 다니는 큰길까지는 약 300m, 경사가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큰길에 다다를 즘, 3층짜리 빨간색 벽돌 건물에 접이식 알루미늄 사다리를 2층까지 닿게 길게 뽑아 설치해 놓았다. 60cm 폭에 길이가 약 2m 되는 돌출형 간판이 철거 중이다. 바닥에는 바리케이드를 설치해 놓았다. 일하는 사람은 한 사람뿐인데, 연세가 70대나 80대는 돼 보이는 노인이다. 챙이 달린 모자를 썼는데, 흰머리가 성성하다. 간판 철거 작업이 이미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었다. 건물벽에 간판을 붙잡고 있던 앵커 볼트가 완전히 분리되어 옥상에서 고정된 밧줄에 간판 윗부분이 묶인 채로 곡예하듯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간판 아래 부분도 끈을 묶어 아래로 늘어뜨린 걸로 보아, 간판 철거 작업의 요령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분명했다. 이럴 때는 두 사람이 호흡을 맞춰야 하는데, 한 사람은 위에서 밧줄을 느슨하게 풀어주면, 간판이 아래로 내려올 때, 밑에 있는 사람은 밧줄을 잡아당겨 간판이 벽에 부딪히지 않게 잡아 주어야 한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방금 건물 안으로 들어간 할아버지가 옥상에서 아래를 향해, 머리를 내밀기를 기다렸다. 5분이 지나도 할아버지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냥 갈까 하다가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바람이 약하게 불어 간판이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바람이 세게 불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다. 건물 오른쪽 모서리에 세워둔 사다리에 부딪힐 수도 있고, 왼쪽에 돌출된 발코니 유리에 부딪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1층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이 흔들리며 매달려 있는 간판을 걱정스레 올려다보았다.
그때, 1층. 현관에서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나왔다. 옥상에서 할아버지가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단단히 잡어" 그제야 상황이 파악이 됐다. 할아버지는 간판을 내리기 위해 옥상에 올라가면서, 집에 있던 할머니를 내려보내 간판이 제대로 내려오는지 지켜보라고 시킨 거였다.
나는 옥상을 올려다보며, 큰소리로 "제가 간판을 잡아드릴 테니, 천천히 내리세요."라고 했더니, "됐어요, 그냥 가도 돼요."라고 했다. 그렇게 할 일이 없나? 가던 길이나 가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 광경을 안 봤으면 몰라도, 한때 간판 일을 했던 내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내가 간판을 잡아 준다고 하자. 할머니가 나에게 물었다. "아이고, 고마운 사람이네. 이 동네 살아요?" "아뇨, 친구 집에 왔다가 가는 길인데, 제가 간판 일을 해봐서 이런 일을 잘합니다."라고 말한 이유는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할머니가 옥상을 향해 "내리 소오" 하고 소리쳤다. 할머니의 기운찬 목소리가 골목을 꽉 채우고도 남았다. 그 순간 밧줄이 느슨하게 풀리면서 간판은 조금씩 조금씩 내려와 바닥에 닿았다.
할머니는 무릎에 두 손을 짚고 굽은 허리를 펴며, 나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대구라고 했더니 "같은 경상도 사람이네요, 우리는 남핸데..."라며 생긋이 웃었다. 타향에서는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데, 우리는 경상북도와 남도를 한데 뭉쳐 동향이란 사실에 합의를 봤다. 간판 철거를 왜 두 분이 위험하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이 빌라는 자신의 걸물인데, 세입자가 철거하지 않고, 떠나는 바람에 위험해서, 할아버지가 손수 철거하는 거라고 했다.
길게 뽑아진 뽀얀 알루미늄 사다리가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인다. 바닥에 내려와 쉬는 듯 드러누운 간판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났다. 나는 오랫동안 간판 만드는 일을 했었다. 생각하면 무척 행복하고 꿈도 많았던 시절이다. 오늘 오후 길을 나서며 도움을 청하지도 않는 간판 내리는 일을 도와주었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이런 내가 좋다.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이 되려면 오지랖이 넓어야 한다. 그냥 지나치지 않는 이런 내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