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음을 찾아드립니다 ㅣ 한공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정작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복의 본질은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숨어있습니다. 전 그것을 찾아주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한공기
글쓰기 공동체 '파운틴' 운영자
보통사람의 사소한 일상이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송중기처럼 청순한 남자이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이름도 비슷하다...
많은 사람들이 '창작활동'에 어려움을 겪는다. 대부분이 머뭇거림과 망설임으로 창작활동에 몰두하지 못한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도대체 뭘 만들어야 하지?', '내가 끝낼 수 있을까?' 이런 숱한 질문을 하다가 결국 어떠한 결과물도 만들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연애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반했다고 치자. 그 사람은 볼수록 매력이 느껴진다. 그러나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한다. '저 사람이 날 맘에 들어할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우리가 정말 사귈 수 있을까?' 그런 숱한 질문을 하다가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인연을 빗겨 어긋나게 된다. 난 이런 과정을 나만의 전문용어로 <공허한 상상력 게임>이라고 칭한다. 이 게임의 수혜자는 아무도 없다. 이 게임은 시작하는 순간 이미 패자가 된다. 당신이 아직도 이 게임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여전히 패자로 남게 된다. 단 한 발짝도 진화하지 못한다. 난 이 상태를 나만의 전문용어로 <창조 이전의 카오스 상태>라고 칭한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 온갖 잡생각만 늘어놓은, 공허만 남아있는 상태. 성경에도 이 상태가 등장하니 과연 신은 어떻게 결국 해내고 말았을까? 의문이 든다. 분명 엄청난 '의지'가 존재했을 것 같다.
CREATE
난 이 단어에 집중해본다.
창조란 무엇일까? 창조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창의적인 것은 어떤 것일까?
오랜 시간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창조라는 개념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이란 나라의 예술교육은 '창조'의 영역보다 '비평'의 영역에 쏠려있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교육받은 대다수 사람들은 창작보다 판단에 익숙하다. 창조경제를 운운하는 대통령도 창조적인 통치를 하지 못한 채 내내 남만 비판만 하고 있다. 그녀나 대중들이나 별 다를 것이 없다. 창조의 시작은 '나'가 되어야 한다. 창조를 이해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
나는 어디까지가 나일까?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나는 공간과 시간을 점유하고 있다. 나는 세포, 뼈와 살, 근육, 피부를 뚫고 내 시선을 따라 나의 방과 나의 마을과 나의 공동체와 나의 국가 나의 지구 그리고 우주까지 뻗어가고 있다.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정자부터 불혹의 나이까지 시간의 바다를 타고 흘러가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언젠가 그런 결론을 낸 적이 있다.
“애초에 시간과 공간이란 규정되어 있지 않아, 그저 우리는 일정하게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을 뿐이야.”
그렇다. 공간도 시간도, 우주 안의 모든 것은 단 한 순간도 멈춰 있은 적이 없었다. '변화' 그 자체가 우리의 실존이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누구라도 규정을 지을 수 없는 것이다. 현상은 4차원이지만 우리의 발상은 너무 1차원적이다. 그래서 어리석게도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제멋대로 많은 것을 규정하고 만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자기만의 판타지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단 한반도 똑같은 봄을 맞이한 적이 없다. 모든 봄은 새롭다. 봄-여름-가을-겨울은 주기일 뿐이고 주기는 형체가 없다. 또 계절에도 나와 외부 사이에도 확정된 경계가 없다. 안과 밖은, 육체와 영혼은, 개념과 현상은 겹쳐있고 연결되어 있다. 봄은 여름을 품고 있고, 여름은 가을을 품고 있고, 가을은 겨울을 품고 있고, 겨울은 봄을 품고 있다. 결국 봄-여름-가을-겨울은 하나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너를 마음에 품고 있으면 나와 너는 이미 하나이다. 우주는 원래 하나이다. 인류가 애써 모든 학문을 총동원하여 우주를 분리시킨 이유는 그 모든 요소의 특징을 명료하게 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모든 요소들이 연결되어 있고, 결국 하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 명료하고 불변한 진리는 창작과정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특히 예술의 영역에서는 이 진리가 예술의 실존, 그 자체이다. 크로체라는 철학자는 순수예술에서는 '논리적인 인식'이 없다고 했다. 과학은 그 자체가 '논리적인 인식'이지만 예술은 그 자체가 '직관적인 인식'이다. 여기서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예술에도 논리가 필요하다. 특히 대중예술은 정확한 논리 하에 이윤을 따지며 접근해야 되지 않는가?"
크로체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예술은 '순수예술'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즉 '순수예술'은 창작과정에서 ‘목적’이란 것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이유로 예술가는 창작활동을 할 때 ‘메시지’를 의식해서는 안 된다. 그림, 음악, 소설, 무용, 영화 그것들은 ‘이미지’ 그 자체이다. 예술가는 직관적으로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확실히 해둘 점은 직관과 표현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직관’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로 생각을 하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즉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혀로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예술활동에 적용한다면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예술활동 자체가 생각하는 것이다. 글을 쓸 때도 글을 쓰면서 동시에 생각하는 것이다. 이 개념이 일반 사람들에게는 어려울 수 있다. 특히 좀처럼 표현에 미숙하고 예술창작 경험이 많이 없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뜬금없는 소리일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직관 능력'이 부족한 편이다. '직관 능력'은 꼭 예술창작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도 융통성을 가지고 즉흥적으로 처신해야 할 때가 무수히 많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있다. 1과 10 사이에는 2,3,4,5,6,7,8,9가 존재하지만 1과 동시에 10이 되어야 할 때가 있다. 이것을 가능케하는 직관 능력은 저절로 길러지지 않는다. 1부터 10을 단계적으로 연결하는 많은 연습이 반복되어야 한 숨에 1과 10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크로체는 예술적 직관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즉 모든 직관은 일상적이고 그것이 예술에 녹아드는 것이라고 했다. 예술활동은 이미 일상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단 예술활동의 가장 큰 장점은 창작과정에서 발생하는 ‘해방과 정화’에 있다. 창작자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보며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그 인상을 자기만의 형식으로 표현을 한다. 그 과정에서 물질세계 속에 숨겨진 진실을 해방시켜주고 창작자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여기서 물질세계란 창작자가 경험 한 세계뿐만 아니라 창작자 본인도 포함이 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어 창작자의 몸에 익으면 자연스럽게 순수예술창작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술창작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너무나 먼 얘기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런 창작과정을 무수히 해왔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이미 언어예술이다. 내가 보고 생각하고 느낀 것을 나만의 형태로 표현하는 과정은 위에서 언급했던 순수예술창작과정과 똑같다. 우리의 언어 표현 방식은 이미 매우 직관적이다. 다만 그 과정을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느냐가 개인의 의지에 달려있다. 어린아이가 가장 먼저 사용하는 언어는 ‘좋다’와 ‘싫다’이다. 마치 디지털 기호의 1과 0처럼 가장 기본이 된다. 그것은 각각 하나의 점과 같다. 그 점들을 연결하는 것이 문장이고 문장은 선이 된다. 모든 언어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서 동일하다.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고급언어는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감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겠다. 중학교에서 ‘예술창작 실습’이란 과목을 방과 후 수업으로 가르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콜라를 가져갔고 종이컵에 담아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나: 자 모두 콜라를 마셨죠? 콜라의 맛이 어떤지 말를 표현하세요!
나의 요구에 아이들은 ‘달다’ ‘시원하다’ ‘톡 쏜다’ ‘씁쓸하다’라고 말했다.
나: 잘했어요! 그럼 이제 여러분의 머릿속에서 ‘콜라’라는 단어를 지우세요. 여러분은 이 음료수를 이제 막 개발했어요.. 아직 이름도 붙여지지 않고 지금 막 시음하는 거예요.
나는 아이들의 빈 종이컵에 다시 콜라를 따라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셔보라고 했다.
나: 이제 우린 이 음료를 팔기 위해 광고 문구를 만들 것입니다. 소비자는 한 번도 이 음료를 먹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만든 문구를 읽고 이 맛을 상상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음료는 시원합니다, 답니다, 톡쏩니다, 씁쓸합니다....라는 표현은 뭔가 부족해요. 그런 음료는 이미 세상에 많잖아요. 그래서 이 음료만의 개성을 여러분이 찾아내야 돼요.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와중에 장난기 많아 보이는 한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남학생: 이 음료는 마치 제우스 신이 제 목에 번개를 친 맛입니다!
아이들은 ‘오~’하고 함성을 지르며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 다른 대답을 하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난 그것을 잘 이해했다. 한국에서 교육받은 대다수의 학생들은 ‘문학적 상상력’이란 것이 있을 리 없다. 문학적 상상력이란 많은 문학작품을 읽어 본 경험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아이들을 돕기로 했다.
나: 그럼 우리 게임을 해볼까요? 끝말잇기를 할 것인데 새로 튀어나온 단어를 이용해 콜라를 설명하는 거예요. 자 선생님이 먼저 해볼게요. 여기 책상이 보이네요. 제가 <콜라는 책상이다>라고 말하면 여러분은 왜?라고 물어봐주세요. 콜라는 책상이다!
학생들: 왜?
나: 선생님한테 왜? 가 뭐야...
학생들: (킬킬거리며) 왜요?
나: 음... 책상은 단단해. 그리고 그 위에 무엇을 올려놓을 수 있지. 그래서 책상은 주인공이 아니라 보조역할을 하는 것이야. 진짜 주인공은 여러분의 책과 공책이지. 책상은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지. 내게 콜라도 그런 음료인 것 같아. 피자를 먹을 때, 팝콘을 먹을 때, 치킨을 먹을 때 콜라를 같이 먹으면 좋아. 콜라가 없으면 아쉽지. 하지만 콜라가 없다고 피자를 팝콘을 치킨을 못 먹는 것은 아니야. 콜라는 어디까지나 내게 보조식품이니까.
학생들은 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 그들이 놀란 것은 내용보다 그 대답을 즉흥적으로 해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직관력’이다. 나는 이 게임을 10년간 해서 직관에 익숙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었지만, 다음 학생에게 차례를 넘겼을 때 학생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참고로 내가 넘긴 다음 단어는 ‘상추’였다. 아이는 우물쭈물하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학생: 삼겹살을 먹을 때 상추도 보조 역할을 해요. 상추가 없으면 아쉽지만 상추가 없다고 삼겹살을 못 먹는 것은 아니죠.
나: 오! 잘했는데 날 따라 했잖아. 너만의 대답을 찾아봐야지. 이제 원칙을 정할게. 앞에서 나온 개념을 가져와서는 안 돼. 자기만의 창작을 해야 돼!
학생은 그다음 여학생에게 ‘추남’이라는 단어를 던졌다. 학생들은 “어떻게~” 소리치며 그 여학생을 걱정했다. 여학생은 한참을 생각했다.
나: 생각하지 마! 그냥 추남에만 집중 해! 그게 바로 직관이야! 직관적으로 말을 해! 말하면서 생각해!
나의 재촉에 여학생은 얼떨결에 입을 열었다.
여학생: 추남은 못생겼어요! 못생긴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져요. 콜라를 마시면 저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져요. 그런데 못생긴 사람을 보면 신기해서 자꾸 쳐다보게 돼요. 콜라도 한번 마시면 맛이 신기해서 자꾸 마시게 돼요!
학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그 여학생에게 갈채를 보냈다. 이후 게임은 계속 진행되었고 다른 아이들도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콜라를 표현했다. 이 게임은 아이들 내면 속에 숨겨진 문학적 상상력이 자유롭게 튀어나오며 동시에 콜라에 숨겨진 진실이 해방되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해방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제 예술 = 직관 = 표현 = 미 = 언어 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그리고 예술의 출발점은 외부세계가 아니라 창작자의 내면이란 것이 증명된다. 예술은 창작자의 독창성이 제일 중요하다.
물론 인간은 무에서 유를 만들 수 없다. 수리오라는 철학자는 창조라는 단어는 오직 신의 영역에만 속한다고 했다. 창조(create)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과정이다. 인간은 대신 창설(Insuaration)이란 단어가 어울린다고 했다. 창설이란 복구, 회복, 재흥, 부흥이란 뜻으로 유에서 또 다른 유로 전환되는 과정을 말한다. 그런데 창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활동’이라고 했다. 그것은 위의 게임에서 봤듯이... 여학생이 ‘추남’을 이용해 콜라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오직 ‘창작활동’만 몰입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사전에 생각하고 고민했던 시간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라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 그녀 안에 내재되어 있는 생각과 감정이 창작활동을 통해서 순간 해방된 것이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그녀의 ‘직관력’ 때문이었다. 그녀는 공부만 했던 아이였지만 자신의 일상에서 이미 ‘직관력’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즉 그녀는 앞으로 그녀가 창작하는 모든 결과물의 ‘가능태’이다. ‘가능태’란 철학에서 사용하는 단어인데 ‘현실태’와 반대에 놓여있다. 예를 들어 밀가루는 가능 태이고 빵은 현실태이다. 석고는 가능태이고 다비드상은 현실태이다. 가능태와 현실태 사이에는 ‘창작자의 활동’이 있다. 만약 신을 창작자로 규정한다면 씨앗(가능태)과 나무(현실태) 사이에서 신의 창작활동이 있는 것이다.
이전에도 언급했듯이 많은 한국 사람들이 예술창작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 우리가 인식하는 예술가는... 창작하기 전에 엄청 많은 생각을 하고 자신의 작품에 온갖 메시지를 담는다. 하지만 그런 예술가는 없다. 창작과정은 매우 단순하다. 그냥 활동과 몰입이 전부다. 예술가에게 고뇌도 없고 메시지도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단 예술가는 존재 자체가 고뇌이며 메시지인, 가능태라는 말이다. 그런 자는 어떤 것을 만들어도 그 작품에 저절로 자신만의 고뇌와 메시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창작활동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대다수 사람들이 창작활동을 하기 전에 뜸을 들이고 망설인다. 그 이유는 스스로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순수예술 창작활동에는 애초에 준비과정이 없다. 모든 창작활동이 연습이고 동시에 실전이다. 그 횟수가 늘어날수록 결과물의 퀄리티가 높아지는 것이다. 수리오는 이것을 '상승의 변증법'이라고 했다.
봄이다. 화단에 씨앗을 심고 싶은 계절이다. 씨앗은 가능태요 꽃은 현실태이다. 씨앗 속에는 이미 꽃이 품어져 있다. 그럼에도 내가 나의 꽃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씨앗을 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씨앗을 심지 않는 이유는 과연 ‘꽃을 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런 망설임과 머뭇거림은 아무 쓸모가 없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헛된 상상력이다. 오직 진실은 ‘활동’에만 있다. 그래야 씨가 심기고, 새싹이 나고, 꽃이 피고, 또 꽃씨를 얻을 수 있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실패도 활동의 영역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린 누구나 언제든지 재도전할 수 있는 가능태이다.
모든 창작활동의 결과물은 창작자의 영역이 아니다. 창작자의 영역은 창작활동까지이다. 그 이후에 벌어지는 모든 현상들을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누군가 나의 작품에 감동받거나 누군가의 인생이 전환점을 맞는다 해도 난 사전에 그것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철학자 수리오는 이 영역을 '초월적 영역'이라고 칭했다. 즉 '창작자의 예술활동 > 예술작품 > 초월적 현상'이 단계별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창작자는 결과를 염두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어차피 예술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함께하는 공동작업이다.
마지막으로 베스트셀러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저자)가 글쓰기 강연에서 했던 말을 끝으로 이 글을 마치겠다.
" 전 여러분을 구원하러 이곳에 왔습니다. 전 여러분을 해방시키려고 이곳에 왔습니다. 제가 무수한 창작과정을 하며 깨달은 단 하나의 명료한 진실은 모든 짐을 작가가 혼자 짊어지고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여러분은 절대 창작활동에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은 창작활동에 망설일 필요가 없어요. 그냥 쓰세요. 무심코 쓰세요. 막상 글쓰기를 시작하면 어떤 요정(fairy)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리고 저나 여러분을 도와줍니다. 하지만 만약 그 어떤 창작활동도 시작하지 않으면 요정은 결코 여러분을 찾아오지 않아요."
그때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강조했던 단어는 Create가 아니라 Activity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