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진화론 ㅣVincent
글을 쓴다. 하나의 글귀는 주제가 되어 설명과 예시를 부른다. 예시는 인물과 배경을 등장시켜 사연을 만들고 사연은 플롯의 옷을 입어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는 사람들의 관심을 부르고 재미와 감동으로 현혹한다. 거짓말에 진실을 담아, 진실을 그럴듯한 거짓말로 위장시켜 현실의 감옥에 갇힌 이들을 상상 속의 우주로 탈출시킨다.
작가 프로필 ㅣ Vincent
아이들은 황홀한 피리 소리만 따라갈 뿐 남자의 정체 따윈 관심 없었다.내가 누구인지는 글이 결정할 것이다. 안타깝고 슬픈 로맨스든, 우주의 장대한 모험담이든, 인생에 대한 미천한 깨달음이든 인정욕구에 중독된 자아를 외면하고 순정의 진실만 담아 당신에게 글을 쓴다.
내 이름은 Vincent.
한 줄을 써도 부끄럽지 않은 글로
당신과 마주할 수 있기를...
자살권장다리
마포대교 생명의 다리 캠페인 덕택에 오히려 자살자가 더 급증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곳을 갈 일은 없어서 실제로 어떤지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뉴스와 기타 미디어로 보니 그곳에는 자살시도자를 위한 문구들이 있고 길을 걸을 때 하나씩 불이 켜진다고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죽으라고 장식해 놓은 건가? 하는 생각이었다. 이런 게 있었다는 이야기는 어렴풋하게 듣기만 했지 구체적으로 그딴 식으로 캠페인을 전개했다는 것을 미리 알았으면 서울시청 게시판에 항의글이라도 남겼을 것이다.
정말 자살하는 사람이 갑작스런 충동과 홧김에 이성을 상실해서 거기까지 간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서 그런 글 몇 자로 용기와 위로를 얻고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건가?
자살한 사람의 장례식장을 가보라. 거기서 위로의 말을 한 마디라도 꺼낼 수나 있다면 그럴 능력이 있다고 이해해 주겠다. 이른바 사회 지도층 인사라는 사람들의 발상인가 본데 그런 제안이 들어왔을 때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구체적인 대책을 고심하기나 했는지 궁금하다.
선박침몰로 한 학교의 학년 하나에 해당하는 청소년들을 비롯한 수백명이 몰살당해도 교통사고 취급하는 게 별로 어렵지 않은 위정자들이 만연한 덕택인지 세계 최고의 자살국가를 만들어낸 책임을 그딴 싸구려 감상주의로 퉁치려는 그 퍼포먼스 앞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박탈감과 수치심을 느꼈을 고인들을 생각하며 이 글을 쓴다.
불면의 문제
자살을 일으키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우울증이고 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은 바로 수면부족이다. 오랜 시간 잠을 제대로 못자면 사람은 당연히 우울해지고 우울증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연히 가장 효과적인 응급처방은 의사의 처방아래 질좋은 수면제와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것이고 이어서 근본적인 치료를 위해 전문가의 상담프로그램을 받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공동체의 관심과 배려 하에 우울증을 일으키는 근본환경의 변화, 또는 탈출을 도모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자살예방책이다.
하지만 이런 예방책은 한편으로는 응급처치에 불과하고 문제의 뿌리를 제거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약을 끊거나 상담을 멈추는 순간, 탈출했다가 다시 이전 사회로 복귀한 순간 그를 죽음의 문턱으로 내몰았던 문제가 다시 고개를 들 수 있다.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개인이 걱정 없이 숙면을 취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수준의 문제해결은 개인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사회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 남의 불면 문제까지 왜 사회가 해결해야 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잠을 못잘 정도로 괴롭다 못해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의 문제는 이미 한 개인의 능력 너머에 있다.
이 나라에는 이런 감당못할 괴로움을 안은 적극적 자살 시도자가 하루에 70명이 넘는다. 한 사람이 자살하면 최소 5~7명이 심각한 정신질환을 초래할 수 있는 충격을 입는다. 산술적으로 1년에 자살사건으로 인해 이런 정신적 충격을 입는 인구가 7만명에 달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 정도 되면 남의 불면 문제를 왜 사회가 해결해야 하는지 감이 잡힐 것이다.
게다가 한국사회에서 자살은 혼자 죽지 않고 너죽고 나죽자 식의 동반자살이 많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자신을 버린 여자에게 앙심을 품고 찾아가 그 가족까지 죽이고 자살하거나 생활고나 사업실패를 비관한 부모가 자식과 함께 동반자살하는 경우가 많다. 공동체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자살을 결심한 이상 공동체에 대한 복수까지 병행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살예방을 위한 적극적인 대처는 자살시도자 한 사람뿐 아니라 주변에 정신적 충격과 상처를 입을 사람들, 여기에 생각지 못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수많은 시민들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는 면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자살을 왜 할까
세계보건기구는 자살의 원인에 대해서 무려 989가지로 정리해 놓았었다. 각 원인에 대해 다양하고 심도깊은 연구와 조사가 있었고 그 결과 두 개의 큰 원인으로 압축되었다. 바로 절망과 이분법적 사고이다. 절망이란 도저히 희망이 없다는 극한의 좌절이며 이분법적 사고란 사느냐 죽느냐 외에는 합리적인 해결방법이 생각나지 않는 극단적인 결론이다.
절망과 이분법적 사고는 다시 소외와 박탈이라는 피해의식으로 재정의된다. 결국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와 가치가 무시당하고 있고 다시 사회에 편입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판단, 그 결과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이기지 못하는 상태가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생명을 끊도록 만든다.
물론 정신적인 병리현상으로 충동적으로 자살하거나 과대망상이나 비정상적 호기심, 조현증과 같은 정신질환으로 자살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살하는 사람들은 오랜 시간 숙고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한 뒤 최후의 수단으로 자살을 결행한다.
자살자들중 많은 이들은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자신의 인생을 사랑했으며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우리의 생각처럼 무기력하게 자살자의 처지까지 도달한 게 아니다. 나름대로 희망도 있고 행복도 있었으며 소중한 가치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더 이상 스스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사회가 자신을 절대 구원해 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
한국 사회는 스스로 이 사회가 정이 많고 따뜻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자살의 문제 앞에서 실제적인 배려와 보호의 능력은 극도로 빈약하다. 한국의 자살률은 개인주의가 훨씬 심한 일본보다도 50퍼센트 이상 높고 빈부나 계층, 인종적 갈등이 훨씬 극심한 미국보다 3배, 심지어 세계적 범죄우발 국가중 하나로 꼽히는 자마이카보다도 300배 이상 높다.
이것은 사회적 약자들이 그만큼 이 삶에서 탈출할 구멍이 없는 막막한 사회이며 동시에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아량이나 배려 역시 제도적으로 원천 차단된 사회라는 의미이다. 10대와 30대, 60대의 자살 비율이 세계 최고라는 통계는 이 사회가 특히 사회적 약자, 바로 청소년과 실직 가장, 실패한 자영업자, 경제적 능력이 없는 노인층에 대해 얼마나 냉정하고 무자비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 사회가 이 정도로 타인의 고통에 냉정하게 된 것은 고도성장기가 낳은 극도의 이기주의와 배금주의의 결과이다. 먹고 살기 바빠서 남의 고통에 신경쓸 겨를이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때문에 자살자들 역시 양산되고 있다.
지금 안정적이고 풍요로와도 이미 먼저 떠난 그들이 그랬듯이 우리에게도 언제 어떤 식으로든 파멸의 기회가 올수 있다.한국 사회는 누구든지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한 사회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자살문제를 남일처럼 여겨서 안되는 궁극적인 이유다.
한국인의 자살
누군가는 자살이 단지 개인에 대한 사회의 관심과 애정의 부족 때문만은 아닌, 더 광범위하고 다양한 이유가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세계적인 단위에서 보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구성원들에 획일화된 가치와 동일한 삶을 강요하는 한국사회는 자살 동기마저도 충분히 획일화 시켰다.
한국 청소년이 자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적하락과 왕따현상이다.
한국 청년이 자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실연과 실업이다.
한국 중장년이 자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실업, 사업실패, 이혼이다.
한국 노인층이 자살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곤핍과 외로움이다.
보면 알겠지만 모두 경제적 문제, 아니면 사회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문제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살 원인은 바로 빈곤, 사업실패, 실직에서 유발되는 경제적 요인이다. 특히 이 문제는 자살자의 가장 많은 연령대를 차지하는 노인층 자살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돈이 없어서 자살한다. 21세기 1인당 GDP가 3만불을 달리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가장 빈번한 죽음은 돈이 없어서 일어난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다른 사람보다 못살아서 죽는 상대적 빈곤이 아니다. 당장 내일 먹고 살게 없고 늙고 병든 몸을 가눌 방법을 찾지 못할 정도의 절대적 빈곤 때문에 생명을 포기한다.
다른 나라같았으면 윤리에 대한 이성적 판단이 붕괴된 상태에서 각종 범죄나 테러가 들끓고 내전과 혁명이 반복되어도 이상할 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 깊게 내재된 유교적 선비사상과 성공지상주의, 그리고 강력한 경찰력 덕택에 가난한 사람들은 조용히 자살하는 방법을 택한다. 이런 면에서 남은 사람들은 운좋은 줄 알아야 한다.
한국사회는 기본적으로 세금을 적게 내고 복지 혜택도 적게 하자는 주의이다. 개인의 능력을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하면서도 그 능력과 성과가 정확히 수입증대와 안정으로 결실을 맺지 않는다. 여기에 빈익빈 부익부 구조가 점점 더 심화되고 공고해 지면서 절대빈곤층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절대빈곤층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인식하는 차상위 계층에 편입되는 인구 역시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우리 나라는 국민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할 때는 공동체성을 강조하면서도 막상 국민이 도움을 필요로 하거나 생명이 위협받을 때는 놀라울 정도로 냉정하다. 너무 쉬운 집단해고와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비정규직 양산은 삶의 근본적인 터전을 뒤흔든다. 안정된 가족을 유지하는 게 점점 힘들어지고 같이 사는 것보다 혼자 사는 것이, 결혼하는 것보다 독신이, 자식을 낳는 것보다 대를 끊는 것이 더 안전해 보인다.
점점 목을 조여오는 경제적 문제는 단순히 경제적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관계지향성에 치명타를 날린다.
함께 위기를 극복하는 것보다 어떻게든 혼자서 각개전투식 생존전략을 강요하는 한국사회는 결국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극단적 이기주의를 내면화하게 한다. 결국 공동체라고 생각하는 이 사회는 모래알처럼 아무런 접착력이 없는 무리의 집합에 불과하다.
단단하지 않은 기반은 작은 충격에도 무너진다. 함께 있지 않은 인간은 나약하다. 거친 사막이나 망망대해, 혹은 첩첩산중 밀림에 혼자 있을 때 우리는 막막함과 두려움을 느낀다. 인간은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야생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구석기 시대부터 우리 스스로 유전자에 새겨왔기 때문이다.
제도적 해결책
자살에 대한 근본 해결책은 결국 공동체 전체의 관심과 애정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허울뿐인 말이나 글귀가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안전장치에 대한 더많은 투자를 의미한다. 실제로 이 나라의 자살률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결정적 이유중 하나는 정부에서 5년마다 수립해서 시행하기로 법으로 정해져 있는 자살예방기본대책이 예산부족으로 법안 수립 후 단 한 번도 시행은커녕 발표조차 못한다는 사실이다.
자살방지를 위한 전 사회적인 노력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도 이익이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와 함께 행정당국의 즉각적인 노력이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
빈곤 노인층에 대한 적절한 생계비 지원과 주거안정대책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사회 빈곤층에 만연한 알콜 중독자들에 대한 치료 혜택 역시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실직자들과 빈곤층, 노인층에 대한 직업재활과 평생교육이 더욱 광범위하고 유연하게 이루어 져야 한다.
실직자나 사업실패자, 그로 인한 이혼이나 별거 가족, 생활 보호 대상자나 긴급 생활 안정자금을 신청한 이들에 대한 자살 방지 교육과 전문의료기관, 상담센터와 연계된 저비용 대면상담의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복지사나 전문상담사등 관련 인력을 늘려 정기적으로 자살위험도를 크로스체크하고 지자체에서 미리 적극 예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빈곤층 가족 속에 숨어있는 정신질환자와 중증 장애인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보험적용의 폭을 더욱 넓혀야 하며 이런 가족들에게도 섬세한 상담프로그램과 자살방지 교육이 제공되어야 한다. 사회의 외면 속에서 그들은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경제적, 정신적 부담을 안고 있다. 이런 계층에서 가족 전반에 퍼진 우울증을 해결하지 못하고 동반자살의 형태로 자살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 공동체를 자처하는 이 사회의 잘못이다.
청소년 자살을 막기 위해서 더욱 다양한 형태의 교육기관과 자격검정제도가 시행되어야 한다. 홈스쿨링이나 각종 다양한 대안교육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작은 학교 설립이 용이해지면 입시경쟁과 왕따현상등으로 양산되는 학교부적응학생들을 보듬을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형성될 것이며 이것은 곧 청소년의 사회소외현상을 막고 궁극적으로 청소년 자살 확률을 낮출 수 있다.
이런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관련 예산을 증액하고 전문 상담가와 행정가, 의료 인력등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킨 자살예방시스템을 설립하는 등 중앙정부 수준의 제도적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문제가 사회가 발전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식의 안이한 사고방식은 더욱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사업에 실패한 중장년층을 위한 금융대책과 생계지원 역시 근거없는 도덕성 해이의 우려를 버리고 더욱 광범위하고 용이하게 이루어진다면 그만큼 자살확률을 낮출 수 있다. 실패한 자영업자에게 제도 금융권이나 국가재정의 지원은 신용불량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필연적으로 가정은 해체되고 이혼은 남발된다. 가족에게 버림받은 아버지도 친정과 친구들 앞에서 고개를 들기 힘든 어머니도, 졸지에 가난한 결손가정의 자식이 된 청소년들 모두 자살의 위험성에 내몰린다.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중병치료제를 늘리고 생활 보호 대상자뿐 아니라 차상위 계층의 자녀들에게도 교육비지원을 높이며 입양조건을 완화하고 장려하며 학교등 교육기관은 현재의 청소년 상담교사 배치 수준의 대처를 넘어 자살위험학생을 적극적으로 파악, 외부 의료기관과 긴밀한 협조 아래 상담치료와 함께 전문 의약 처방이 이루어져야 하며 대안학교로의 전학이나 위탁교육등이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저항감이 없이 이루어질 수 있을 정도의 인식 전환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미혼모들과 가출청소년을 위한 장기쉼터나 가정폭력으로부터의 피난처등을 대폭 확대설립해서 보호자가 없는 경제적 미자립자들에게 가해질 수 있는 사회의 각종 폭력적인 시선과 대우, 위험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고 사회의 생산적이고 독립적인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야 한다.
이런 구체적인 제도정비는 어디까지나 실제 현장에서 문제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에 따른 대책을 장기간 고민해온 전문 상담사들과 응급구조요원들, 사회복지사, 신경정신관련 의료전문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서 이루어 져야 한다.법안을 만들고 예산을 세워서 집행하는 것은 정치인과 행정가들의 역할이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이니만큼 효율이 아닌 공동행복과 공공선의 기본 원칙에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자살문제는 결국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의 집결판이고 이에 대한 해결은 이 나라가 진정 살만한 국가로 한차원 성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당연히 이런 수준의 국가 사업이 예산책정의 우선순위에서 절대 밀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사회 전반에 걸쳐 치밀하고 책임있는 노력을 경주하는 것은 곧 현재 자살위험에 몰린 이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최소한 죽을 지경까지 내몰리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제공하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건전한 소속감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는 되어야 공동체의식을 논할 수 있고 전쟁이나 국가 재난상황 같은 때에 애국심을 강요할 수 있는 법이다.
사회 인식의 변화
제도 정비와 함께 국민들의 공동체 의식 역시 질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극한의 경쟁사회속에서 남의 고통에 무관심하며 자신의 이익과 관계된 일에서는 한없이 타인에게 냉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은 자살을 방조하는 것을 넘어 부추기기까지 한다.
불행한 당나귀 이야기를 아는가? 당나귀가 자살하자 마을 사람들이 그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고 축제를 즐겼다. 어쩌면 우리는 은연중에 누군가가 알아서 죽기를 바라는 것은 아닐까? 지나친 비약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극한 경쟁을 통해 생존을 도모하는 한국사회의 특징을 생각하면 없는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한정된 자원을 놓고 수많은 수요대기자가 싸우는 것이 경쟁이다. 한국의 모든 국민들은 싸우고 있다. 좋은 대학의 입학정원도 한정되어 있고 괜찮은 직장도 한정되어 있다. 살만한 땅과 집도 한정되어 있고 결혼하고 싶은 배우자도 한정되어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게 한정되어 있고 남을 이겨야만 내가 이익을 내는, 아니 생존을 보장받는, 두 번째 기회는 절대 주어지지 않는 전쟁터와 같은 사회라면 이런 사회의 구성원이 갖게 되는 궁극의 가치관은 무엇일까?
회사의 상사가 관두면 아랫사람들이 그 빈자리를 보면서 설레여 하는 사회, 반의 우등생이 전학이라도 가면 엄마들이 먼저 신나하는 사회는 분명 정상이 아닐 것이다.
현대사회는 경쟁자의 얼굴을 볼 필요가 없는 환경을 조성하는 방법으로 더욱 치열한 경쟁을 유도한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경쟁자들은 아파트와 사무실의 벽과 파티션 너머에 숨어있고 그들의 존재는 모니터 안의 숫자나 조직도의 이름으로만 존재한다. 따라서 숫자가 줄어든다고 조직도의 이름이 지워졌다고 우리의 감정이 마치 내일처럼 요동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 1위의 자살률에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어쩌면 그러한 자살자들 덕택에 우리에게 돌아올 자원과 그로 인한 이익이 늘어나는 것을 기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살사회의 피해
이렇게 누군가의 죽음에, 그것도 한 생명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비극에 냉담하고 속으로는 조소를 아끼지 않는 이 사회의 생존자들에게 자살자들이 남긴 원한이라는 게 그렇게 만만할 리 없다.
1년에 1만 5천여명이 자살하고 그 주변에서 7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입는다. 한국 인구를 생각하면 우리 인생에 한번쯤은 우리와 가깝거나 심지어 모르는 누군가의 자살로 인해 심각한 내상을 입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쯤되면 자살의 충격과 공포는 집안에 반드시 한명쯤은 존재하는 암환자와 비등한 위치를 갖게 된다.
한 사람이 자살하면 그 시신을 발견한 가족들, 시신을 치우는 119대원들, 경찰들, 그 소식을 듣게 된 가까운 지인들이 차례 정신적 충격과 우울증 초기증상을 겪게 된다. 지하철에 뛰어드는 경우는 어떨까? 그것도 출근 시간이라면? 수십명의 목격자들 뇌 속에서 치명적이고 존재의 기반을 흔들 수 있는 그 이미지를 희석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인가?
차라리 어떻게든 옅어지고 지워질 수 있는 기억이라면 나을지 몰라도 이런 충격은 거의 평생 동안 인간의 다양한 상상력과 시너지를 일으켜 종잡을 수 없는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이 더 높다. 사고도 아니고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포기한 어떤 존재를 접한 그 기억은 이후 고통과 좌절에 처하는 순간마다 다시 살아나 그 얼굴을 자신의 것으로 간단히 교체하는 것만으로 자살 가능성을 또 한차례 높일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생각해 봐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자살한 아들을 둔 부모가 그 순간부터 잃게 될 사회적 기능은 얼마나 막대할 것인가? 그렇게 인간을 하나의 자원으로 취급하는 한국사회이니 하나의 자원으로서 얼마나 효용가치가 떨어질지 한번 생각해 보라. 직장에서 제대로 일이나 할 수 있을까? 조그만 가게라도 일단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당장 문을 닫게 될 것이다. 사회는 이른바 또 하나의 잉여생명을 부양해야 하는 부담감만 얻게 된다.
부모면 그나마 낫다. 부모가 자살하는 경우 그 자녀의 삶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가? 청소년으로 치면 최소60년이상 우리 사회는 어디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폭탄덩어리를 안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부모가 자살했다고 모든 자식이 다 잘못될수 있는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 시스템을 가만히 보면 그 자녀가 자라서 사회에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는 것 자체가 과대망상이다. 제대로 된 친구를 만나고 제대로 교육을 받고 제대로 취직을 하고 제대로 결혼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그 아이의 아픔을 보듬어주고 부모의 자살과 그 아이의 성장을 엄연히 별개의 문제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지고 있고 제도적으로도 결손가정에 대한 지원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을까? 어림도 없는 소리다.
결국 우리는 일년에 7만명 이상의, 이른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그렇게 잘 외치는 인력자원을 살아있지만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태로 망치고 있다. 사람을 생산자원의 일부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몰인격화 국가의 당연한 인과응보다.
어렸을 적부터 학교에서 수없이 들었던 말이 무엇인가? 기름 한방울 안나고 자원하나 없는 이 나라가 믿을 것은 오직 사람이라는 말이 아닌가? 언뜻 들으면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기름이나 자원과 동격으로 놓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을 아직 다 쓰다 만 자원쯤으로 생각하니 다리에다가 그런 글귀를 써놓고서 걸음마다 불을 켜주는 그런 발상도 가능했을 것이다.
자살자들, 또는 자살시도자들이 우리의 이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삶의 열정이 있었고 꿈이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고 싶은 미래가 있었다. 그들이 결국 다리 난간에 서거나 동그란 로프 앞에, 또는 전철 플랫폼에 설 때까지의 과정이라는 것은 그렇게 짧고 단순하지 않다. 바위가 풍파에 깎여 나가듯 그들의 삶이 여기까지 오는데도 그정도 시간과 고민이 걸린 것이다.
사회 전체가 사람을 인적자원이라는 수준의 인식을 넘어서야 한다. 사람의 무궁무진한 가치와 가능성에 대해서 존중과 경외심, 희망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이전의 모든 인간이 행했던 위대한 업적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가난하고 외진 가족에서 태어난 막내 딸이라 할지라도 나중에 어떻게 커서 어떤 식으로 세상을 바꾸고 인류의 번영에 공헌할지 미리 계산할 수 없다.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인 스티븐 호킹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놀라운 지혜를 인류에게 가르쳐 주었다. 흑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조지 워싱턴 카버는 미국 땅을 척박하게 만드는 면화재배를 땅콩등으로 바꾸어 비옥하게 만들고 링컨에 버금가는 노예제도 종식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서자로 태어난 허준은 어의가 되었고 몰락한 양반가문의 가난한 자식이었던 전봉준은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다.
인류사에 전혀 주목받을 가능성이 없는 존재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거나 인류 발전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예는 하늘의 별처럼 무수하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이다. 살기만 하면 어떤 계기로 어떻게 크고 위대한 인물이 되어 남을 돕고 공동체에 이익을 줄지 가늠할 수 없다. 굳이 그런 위대한 영웅이 되지 않는다 해도 단순히 평범한 가정을 이뤄 단란하게 자손을 키울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그 어느 위인못지 않은 위대한 업적을 이룬 것이며 그들 덕택에 우리 인류는 행복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자살방지를 위해 사회가 들이는 노력과 돈은 아무리 커도 사실상 헛된 낭비가 아니다. 한 사람만이라도 이런 노력을 통해서 살릴 수 있다면 그가 어떤 식으로 사회에 보답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시장자유주의자, 성장지상주의자들이 그렇게 목놓아 노래부르는 논리, 빌게이츠 한사람이 수백만명을 먹여 살리고 재벌 회장 한사람이 수십만명을 먹여살린다는 말을 적용한다면 삶의 끝에까지 섰던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것도 그에 못지 않다.
사람들은 자살자들이 세상을 등졌다는 표현을 많이 쓰지만 실제로 자살자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사회가 그들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학교수업을 마쳐도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명절을 지내고 귀경하려고만 해도 한참 친지들과 작별인사를 하는데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스스로 이별하려는 그 시점에 어떻게 충동적으로 대충 충동적으로 해치울 수 있을까?
당연히 죽고 싶은 그 순간에도 아쉬움과 미련이 남았을 것이며 끝까지 지키고 싶은 자존심과 품위가 있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마지막에 어울릴만한 장소를 찾고 사람들에게 남길 유언장을 작성하고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는다. 다리에서 뛰어 내리는 사람들은 자신의 구두를 가지런히 정렬하고 약을 먹는 사람들 역시 바른 자세로 누워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가다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자살을 선택했다고 해서 비정상적인 존재들이 아니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 자살하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다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서 거기까지 도달한 것이고 나름대로 인생의 답안지를 내고 시험장을 나가는 그런 심정으로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불합격인생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최선을 다했었다는 사실만큼은 누군가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게 그들의 심정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마지막 예의와 최선, 그리고 자신이 관계를 맺었던 사회에 대한 마지막 안부와 인사를 그들은 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그들이 어디선가 조용히 사라지는 것처럼 자살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마치 그들을 존중하는 양 그들의 마지막에 대해서 등을 돌리거나 어디 한 번 해보라고 조롱해서는 안된다.
어느 야구선수에게 농락당한 한 여아나운서가 죽고싶다고 외쳤을 때 사람들은 ‘설마 죽기야 하겠어?’ 라는 생각에 그녀의 진심을 의심하고 조롱했었다. 결국 그녀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오피스텔에서 뛰어 내리고 나서야 사회는 후회를 했고 꽤 지난 일임에도 그 충격은 그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뇌리에 분명한 상처와 후회로 여전히 남아있다.
그녀가 자신의 괴로움과 억울함을 표현하였을 때 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녀의 죽음을 막았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런 아픔 대신에 여전히 미디어에서 화사하게 웃으며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그녀를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안타깝고 그리운 자살의 예는 끝도 없이 많다.
대통령도 있었고 최고의 목소리를 가진 가수도 있었고 어렸을 적 우리의 여신이었던 여인도 있었다. 그에 못지 않게 괴롭고 아프게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기억이 일년에 수만개씩 양산된다. 막을 수 있었음에도 우리의 노력이 닿지 않아 떠낸 보낸 이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우리 사회는 더 이상 무시하기에는 상당한 수준의 우울증을 앓고 있다.
가정의 달이다. 어린이, 노동자들, 부모님, 이제 성인이 된 젊은이들과 선생님까지 우리 주변의 소중한 이들을 돌아보고 감사하는 달이다. 그래서 12개의 달중에 가장 날씨가 좋고 기분이 행복해 지는 달로 그들에 대한 공동체의 사랑과 존중을 기념한다.
이 소중한 달에도 지금 어디선가에서 세상에서 가장 외롭게 최후를 준비하는 자들이 하루에도 70명이 넘는다. 그들은 우리의 자녀일수도, 부모일수도, 선생이거나 친구, 연인일수도 있다. 살아서 이 푸른 봄을 만끽하는 우리가 그들을 위한 실질적인 도움을 실현한다면 그들 역시 이 5월의 행복을 함께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문경의 십자가
긴글을 마치며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슬픈 자살자의 이야기를 남긴다.
몇 년전 경북 문경의 깊은 산속에 위치한 어느 채석장에서 십자가에 달린 채로 죽은 한 남자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남자는 옷을 벗은 채 각목으로 만든 십자가에 머리와 허리를 묶어서 스스로를 고정시켰으며 발목과 손바닥에 예수처럼 굵은 대못이 박혀 있었고 이마에는 날카로운 가시관이, 배에는 깊은 자상이 있었다. 시신이 발견된 날짜도 부활절이었다.
죽은 사람은 창원의 어느 택시 기사였으며 주변 사람들은 그가 소심하고 착해서 절대 그렇게 자살할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인터넷의 많은 사람들도 절대 그런 극한의 고통을 참고 자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아마도 종교적 광신론자들에 살해당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경찰의 결론은 자살이었다. 현장에서 발견된 자살 계획서의 필체는 정확히 고인의 것이었으며 남자가 채석장까지 타고 간 차 역시 죽기 직전 당사자가 직접 구입한 차였다.
그 외에도 고인이 직접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많았음에도 사람들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신체 구조상 그런 식으로 죽는 게 도저히 불가능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과수에서는 한달에 걸친 조사 끝에 사람이 스스로 그렇게 죽는 게 가능하다고 결론 내리고 직접 그 과정을 재연했다.
고인은 먼저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묶고 발에 못을 박고 한 쪽 손바닥에 먼저 구멍을 뚫고 그 손으로 망치를 들고 다른 손에 못을 박았다. 그 뒤 망치를 놓고 허리를 칼로 그은 뒤 뚫린 손등을 미리 박아놓은 반대편 못 위로 밀어 넣어 고정시키고서 긴 시간 피를 흘리며 죽었다. 사인은 과다출혈로 인한 쇼크였다.
사람들은 사람이 그런 극악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차분하게 그 복잡한 과정을 실행할 수 있는 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경찰의 이야기는 달랐다. 극도로 고통스러웠겠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인의 죽음을 도운 사람이 있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았지만 그것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나는 으스스하고 신기한 미스터리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의 죽음을 돕거나 종용한 어떤 존재 역시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고인의 자살 이유다.
고인은 아내, 딸, 아들과 함께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어느 날 간에 이상이 생겼고 아들에게서 간을 이식받았었다. 하지만 그 아들은 이후 얼마 살지 못하고 22살의 나이로 죽었다. 죄책감에 아내와 이혼을 했고 그 후 이단에 빠져들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우리는 충분히 그 아버지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간을 내어주고 죽은 아들을 둔 아버지가 어떻게 제정신으로 살 수 있을까?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을 잊기 위해 종교로 도피했지만 결국 죽음밖에는 자신의 죄-그것도 일부러 진 것이 아닌, 운명이 만들어낸-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외에 그가 생각해 낼 수 있는 해결책이 더 무엇이 있을까. 그래도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손에 잡힐 것처럼 선명했던 과거의 평범하고 행복한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는 또 얼마나 처절하게 몸부림을 쳤을 것인가.
그럼에도 끝내 스스로 죽는 것을 결심했을 때 그가 신에게조차 버림받은 신의 아들을 떠올린 것은 과연 망상이거나 우연이었을까? 그 암담한 새벽에 예수가 신을 향해 왜 자신을 버렸냐고 외쳤던 것처럼 고인 역시 고인 역시 아들을 향해 절망섞인 목소리로 용서를 구하지는 않았을까?
연간 약 1만 5천명에 달하는 자살자들이 자신을 버린 세상을 향해 마지막 남기고자 했던 외침 또한 고인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공동체의 가치
나에게도 딸이 있고 한때 누구보다 단란하고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다. 사업에 실패하고 가족이 쪼개진 뒤 나는 몇 번이고 자살 충동 속에서 헤매었다. 다행히 전문가의 상담과 좋은 약, 그리고 여전히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경제적 터전과 딸의 미래에 대한 마지막 남은 책임감 덕택에 극단적인 선택을 피할 수 있었다. 여기에 평소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생활습관과 죽기전에 쓰고 싶은 글은 다 쓰고 죽자는 오기도 생명부지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얼마나 자주 딸이 보고 싶고 그때의 행복한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서 괴로웠는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상상도 못할 것이다.
나 역시 어느 채석장에 매달린, 또는 마포대교의 그 공허한 글귀위에 올라선, 또는 튼튼한 밧줄이나 플랫폼으로 달려드는 전철을 바라보고 서있는, 손바닥 위에 수면제를 가득 담고, 잔에 농약을 가득 담고서 죽음을 바라보는 이들의 그 마지막 심정은 손톱의 때만큼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의 모든 고통은 결국 인간을 통해 해소 될 수 있다. 실연의 상처는 새로운 사랑을 통해 치유되고 유산의 괴로움은 새생명의 출산을 통해 새 희망을 얻게 된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에게는 작더라도 충분히 의미있을만한 두 번째 기회를, 실직한 이들에게는 다시 한번 돌아갈 수 있는 일터를, 학교에서 쫓겨나거나 나이들어서 골방에 쳐박혀야할 운명에 처한 청소년과 노인들 역시 새로운 기회와 희망이 주어지면 반드시 다시 살고싶은 의지가 샘솟기 마련이다.
여기에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는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 개인이 아닌 사회만이 해낼 수 있는 그 능력에 우리가 함께 있는 것을 소망하는 이유가 있다. 인간사에서 당한 괴로움은 모두 인간사만이 제공할 수 있는 희망을 통해 희석시킬 수 있다.
자살의 반대는 살자라느니 죽을 결심으로 노력해서 살아라 따위의 말장난은 함부로 해선 안된다. 노력은 결국 우리 공동체의 몫이다. 우리의 하기 여하에 따라서 그들이 사느냐 죽느냐가 결정된다. 자살의 책임도, 구원의 은혜도 결국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푸른 5월의 창공 어딘가에서 그들은 우리를 향해 지금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