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반창고

ONE DAY ONE PAGE ㅣ 최나영

by 한공기
스크린샷 2016-01-22 오후 5.01.21.png 연희동 카페 도피성 주인
종일 카페에 있으며 전 저만의 다락방을 상상해요. 다락방 속에는 제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세계에 존재했던 가장 소중한 것들이 정돈되어 있죠. 그 다락방에서 진정한 제 자신을 만나곤 하죠. 저는 저만큼 신비로운 존재를 이제껏 만나본 적이 없어요.


작가 프로필 ㅣ 최나영

기독 신학교 출신인 그녀는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에 관심이 많다. 매일 그녀의 성에 들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하며 우주와 인간의 본질을 탐구한다.




발뒤꿈치가 까졌다. 살짝 벗겨진 것이 며칠이 지났는데도 이상하게 안 낫는다. 반창고를 붙이면 통증이 잠잠해 상처를 잊고 지내다가 반창고가 오래돼서 신발에 말려 올라가면 불현듯 통증이 일어난다. 그러면 아 맞다, 발에 상처가 있었지, 하고 깨닫는다. 오늘 아침에도 신발에 반창고가 말려 올라갔는지 발뒤꿈치가 쓰라렸다. 작은 통증에도 엄살이 심한 나는 과도하게 뒤뚱거리며 계단을 내려와 철문을 열어 젖힌다. 나는 2층에서 밤을 살고 1층에서 낮을 사는 작은 카페 주인이다.


뒤뚱거리며 카페 문을 연 나는 바 안으로 들어가 몸을 굽혀 반창고를 찾는다. 선반 아래 발견된 낡은 봉지 안에는 예전에 사 놓은 반창고, 예전에 사 놓은 걸 잊고 또 산 반창고, 그걸 또 잊고 또 산 반창고 등등이 구겨져 있다. 나는 대충 손에 잡히는 반창고 박스 하나를 집어 연다. 구겨진 작은 박스 안에는 얇은 일회용 반창고들이 단정한 모습으로 촘촘히 채워져 있다. 발뒤꿈치 엷은 상처 위에 반창고를 붙이며 생각한다. 당분간 반창고 걱정은 없겠네.

나는 결핍했다. 어느 날 엄마가 떠났다. 엄마는 희생이 넉넉했던 대신 건강이 결핍했다. 아빠의 돈도 떠났다. 아빠는 그리움을 얻은 대신 돈을 잃었다. 아빠는 엄마를 구하려 모든 것을 버렸으나 엄마를 놓친 자신만 남았다. 남은 우리를 두고 전기도 물도 가스도 떠나곤 했다. 달걀 하나를 부치며 그럼 이제 달걀이 몇 개 남은 건지 생각해야 했다. 오늘 버스를 탔으니 내일은 좀 일찍 서둘러 걸어가야겠다는 계획은 자연스러웠다. 반창고 따위는 집에 상비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결핍했다.

결핍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결핍과 함께 밥을 먹고, 결핍과 함께 잠을 청했다. 결핍은 우리 세 자매를 한 방에 모이게 하곤 했는데, 다른 방엔 보일러가 돌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작은 방에 모여 한 이불을 덮고 발을 맞부딪치며 뭐가 그리 웃긴지 깔깔거리곤 했다. 결핍과 함께 웃었다.

"살짝 까진 게 왜 이렇게 쓰라려, 날 기미도 없고." 나는 괜한 투정으로 뜨거워지려 하는 목울대를 뱉는다. 그리곤 신발을 신고 조심히 걸어 본다. 쓰린 기가 안 느껴진다. 반창고는 하나로 충분했다. 하나로도 충분한 반창고가 낡은 봉지 속에 수십 개다. 전기도 물도 가스도 수십 개다. 이제 더 이상 고장난 보일러가 한 방에서만 돌지도, 한 이불 속에서 여섯 개의 발이 모이지도 않는다. 달걀도 수십 개, 버스도 수십 개라 무계획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런데도 나는 결핍하다.

커다란 창문 밖으로 눈이 내린다. 한번 뜨거워진 목울대가 좀처럼 식지 않는다. 차가운 창가로 시선을 옮겨 본다. 내리는 눈을 가만히 보다가 수를 세어 본다. 하나, 둘, 셋, 넷... 눈이 수십 개다. 수십 개의 눈이 내린다. 눈도 수십 개다. 시선을 놓는 나의 모든 것이 수십 개다. 발뒤꿈치 통증은 반창고 하나로 가벼이 가라앉혔는데 기억의 통증은 반창고 수십 개로도 일제히 뻣대고 섰다.

반창고는 넉넉해졌다. 결핍도 따라 넉넉해졌다. 한 개였던 나의 결핍이 이제는 수십 개다.

나는 결핍하다. 어느 때보다 엄마를 필요로 하던 그 시절 엄마를 잃은 결핍보다 엄마의 손길 없이도 하루하루를 부족함 없이 살아가는 어른된 나의 결핍은 매섭다. 아내를 잃고 더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신을 세 딸의 결핍에 던진 한 남자의 사랑을 쫓기엔 아빠를 향한 나의 사랑은 궁핍하기 짝이 없다. 전기도 물도 가스도 넉넉한 나의 생활에 간절함은 결핍되었다. 절박함은 빈곤해졌다. 수십 개의 달걀을 보고도 만져 보지 않는다. 몇 번씩이라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던 달걀을 대하는 나의 감각은 결핍하다. 같은 하늘 아래에 살면서 한 이불은 커녕 목소리 한번 듣기 힘든 자매들을 향한 나의 마음은 헐겁다. 그녀들의 깔갈대던 웃음소리에 짱짱해지곤 했던 나의 마음은 이제 늘어진 털뭉치 같다. 나의 마음은 빈곤하고 궁핍하여 극히 가난해졌다.

그래, 나는 결핍하다. 가난하다. 나는 더욱 궁핍하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넉넉한 오늘에 시선이 닿지 않는 심연 속 나의 깊음은 목마르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그래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으로 목마른가. 둘 곳을 모르는 나의 시선은 하릴없이 구겨진 반창고 작은 박스들에 가 붙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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