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미식회 ㅣ 명월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1906-1975)
"재즈 모음곡 중 왈츠 2번 들으면서 시작"
이곡은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이병헌과 이은주가 춤을 추던 장면 때문에 유명세를 타기도 한 곡으로 쇼스타코비치 곡 중 우리에게 가장 친근하지 않을까 싶다.
음악적 호기심이 왕성하던 20대의 드미트리는 서방의 재즈 뮤지션들의 음악을 듣고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퇴폐적인 부르주아의 문화라는 편견에도 불구하고 매혹적인 재즈를 듣고 그는 재즈어법을 사용해 1934년, 재즈 모음곡 1번을 작곡하고 1938년, 크누셰비치키의 재즈 국립악단을 위해 재즈모음곡 2번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의 음악과 생애.
그의 작품 목록은 그의 사회적 배경과 연관되어 있다. 그의 독특한 사회적 배경이 그의 음악을 해석하는 데 다른 관점을 자꾸 개입시키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우리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세계로 깊이 들어가면서 그가 사회적 배경에 침몰하지 않고 용케 살아남았음을 상기해야만 한다. 그것이 그의 음악적 사상을 의심케 하는 방향이어서는 안 될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의 음악과 그의 삶은 그러한 사회적 배경을 등짐처럼 지고 평생을 살아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고되고 고통스러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쇼스타코비치는 내성적이고 과묵하면서도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의 이름은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로 190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는 아홉 살에 피아노 수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두 해 뒤에는 바흐의 <평균율곡집> 전곡을 연주할 수 있었고 즉흥 연주도 가능했으며 작곡을 하기도 했다. 그는 진득한 성격이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사회가 불안한 긴장이 돌았을 때 그는 열한 살이었다.
어릴 적부터 피아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일찍이 작곡을 시작했지만 그가 예술하기에 시대는 그다지 편안하지 않았다. 당시 사회주의 물결이 러시아를 지배하고 1922년 레닌이 소비에트연방국가를 탄생시킨 이후로 문화 예술의 영역은 사회주의 아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쇼스타코비치 개인적 상황도 좋지 못했는데, 아버지가 같은 1922해 사망하고, 그는 어머니와 누이를 부양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런 그는 페트로그라드 음악원에 입학하였지만, 극장이나 영화 풍자극에 맞춰 반주를 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그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미 십대에 소련의 전위작곡가의 대열에 오르게 된다.
<교향곡 1번>이 레닌그라드에서 1926년 5월에 초연되었다. 니콜라이 말코의 지휘로 레닌그라드 교향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는데 매우 성공적인 환호를 받았다. 그는 공연과 독주회를 계속해 나갔고 주로 자신의 작품을 연주했다. <피아노 소나타 1번> 역시 그의 스무 살 때 작품으로 12월에 레닌그라드에서 자신이 직접 초연했다. 굉음이 포함된 격정적 작품으로 불협화음에 있어서도 그 강도에 있어서도 매우 급진적이었다. 그는 프로코피예프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스물한 살의 쇼스타코비치는 이반 솔레친스키와 니나 바자르를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절대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한다. 솔레친스키와는 다방면으로 지식과 음악을 나누는 사이였고 물리학자인 니나 바자르는 만난 지 5년이 지나 결혼하기에 이른다. 안정된 가정을 원했던 그에게 절실한 결혼이기도 했는데 이 두 사람 사이에서 갈리나와 막심이 태어났다.
그는 20대에 접어들면서 노동계급 청년극장에서 제작하는 작품을 위해 음악을 제공하기도 하고 무성영화의 음악도 만들었다. 발레음악에도 기여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시각적인 볼거리가 있다면 그 주된 역할은 음악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점차 차이코프스키와 말러를 계승하는 음악가로서 신세대를 이끄는 작곡가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다. 그는 말러의 교향곡을 공부하였으며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깊이 감상하면서 성숙한 예술성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1921년 레닌의 신경제정책(극좌억제/ 전기공산주의 중단/ 경제파탄을 수습하기 위해 자본주의의 경제정책을 대폭 도입한 정책)으로 인한 실용적 자유주의에 의해 국가의 간섭 없이 창작이 가능하던 시기를 지나 1927년 말에 이르자 스탈린의 정치적 입지가 확고해지고 이어 문화혁명이 시작되었다. 스탈린의 정치는 인민을 위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었으나 이는 주로 잔인한 통치, 복수, 권모술수를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예술 또한 비논리와 독단에 따른 명령과 이념에 구속될 수밖에 없었다. 1930년 말에는 1917년 이전의 예술 방법은 금지되었고 개인주의를 표현하는 방식은 사라져야 했다.
당시 소련은 이렇게 사상 주입에 열을 올렸다. 음악가들에게는 이것이 매우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창작활동을 계속 하기 위해선 당에서 원하는 음악을 해야만 했는데 그가 원하는 음악과 당이 원하는 음악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그의 정서를 우리는 그의 음악에서 느낄 수 있다. 생존이냐 음악이냐. 이렇게 그의 인생은 이중구조 속에서 진행된다.
"교향곡 5번 d단조" 는 그의 생존과 음악의 이중구조를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이 곡은 1937년 11월 21일 소비에트 혁명 20주년 기념일에 발표되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따라 작곡되었음을 증명해 주는 초연이다. 하지만 이 곡의 맥락을 살피기 위해서는 1년여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1936년 1월 26일,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이 정치국원들과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볼쇼이 극장을 찾았다. 그날 볼쇼이 극장에서는 쇼스타코비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공연할 참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이 오페라를 보고 격노하면서 모든 것은 방향을 잃고 휘청거리게 된다. 당연하게도 최고 권력자의 격노는 작곡가의 파탄과 추락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갓 서른에 접어든 쇼스타코비치는 그 불안 속에서 광대처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선보여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교향곡 5번은 바로 그 위태로운 줄 위에서 내딛은 첫 걸음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어떻게 해서든 사회주의 음악가로서의 모범성을 보여줘야 한다는 자기 검열 속에서 교향곡 5번을 썼다.
이 오페라는 제정 러시아 시대인 1860년대를 배경으로 삼는다. 극중 여주인공 카테리나는 부잣집 며느리다. 그녀는 하인 세르게이와 혼외정사에 빠지고 자신의 몸을 시아버지를 독살한다. 뿐만 아니라 정부와 짜고 무능하고 유약한 남편마저 저세상으로 보낸다. 늙은 호색한으로 그려지는 시아버지는 제정 러시아의 부농이었던 '쿨락'의 표상으로 보이는데, 당시 러시아에서 벌어졌던 부농 계층에 대한 사회적 증오와 테러를 감안한다면 이 오페라는 오히려 스탈린적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하지만 스탈린은 자기 욕망의 실현을 위해 미쳐 날뛰는 카테리나 라는 여자를 용납하지 못했다. 그녀의 솔직한 욕정, 시아버지와 남편에게 거짓말로 둘러대기, 게다가 극 속에 빈번히 등장하는 노골적인 섹스 묘사는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스탈린은 공연울 다 보지도 않고 일어섰다. 그리고 이틀 후 당 기관지 <프라우다>에는 '음악이 아니라 난잡'이라는 글이 실린다.
특히 철학자 슬라보여 지젝은 <오페라의 두 번째 죽음> 이라는 저서에서 '3막에 나오는 카테리나와 세르게이의 격정적인 첫 성교에 대한 생생한 관현악적 묘사' 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당시 비난의 도마에 올랐던 가장 악명 높은 특징이었다.
이러한 해석, 또 당시 권력층들의 반응을 통하여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살펴 보자면, 그의 음악은 세련된 귀족적 에티켓에서 저속한 현실로의 이행이다. 그는 바로 그 저속한 현실을 무대 위에서 생생하게 보여주다가 된서리를 맞은 셈인 것이다.
'음악이 아니라 난잡'이라는 평가를 받은 무렵, 구스타프 말러에게 적젆게 영향을 받았음직한 교향곡 4번의 완성울 코앞에 두고 결국 그는 초연을 포기한다. 대신 교향곡 5번에 매진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초기 교향곡들에서 선보였던 막강한 추진력과 질주, 사회주의 군대의 기상나팔 소리와도 같았던 그 허장허세를 다시 한 번 보여줘야 할 시점임을 깨달은 것이다.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이 1926년 초연해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던 교향곡 1번, 그 이듬해 소비에트 국립 출판음악국의 선전 분과에서 10월 혁명 기념작으로 의뢰받아 작곡한 교향곡 2번, 스스로 '평화로운 건설의 축제 분위기'라고 설명했던 교향곡 3번 메이데이 등등, 그는 교향곡 4번을 작곡하면서도 결벼했던 과거의 어휘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교향곡 5번을 완성하면서 이렇게 말했다."이 곡은 당의 비판에 대한 창조적인 응답이다." 일찍이 베토벤이 형상화했던 '비극에서 환희로의 이행'을 그려낸 이 교향곡은 열렬한 기립 박수를 받았고, 쇼스타코비치에게 씌워졌던 부르주아 형식주의자의 멍에는 단숨에 벗겨진다.
하지만 2악장 스케르초에 숨어 있는 뒤틀린 유머, 3악장 라르고에서 확연하게 느껴지는 절박한 슬픔과 삶에 대한 불안감은 이후 쇼스타코비치가 걸어야 했던 아슬아슬한 행보를 보여 준다. 아울러 음악과 생존의 이중구조 속에서 그가 얼마나 부대껴야 했는지도 실감하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보더라도 교향곡 5번은 그의 대표작일 수밖에 없다.
단순히 듣자면 고통받던 민중들이 서서히 깨어나 압제를 걷어내고 웅장한 승리의 함성을 외치는 듯하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부분부분에 냉소를 섞은 듯한 위아래 울림이 심한 비트가 섞여있으며 정점에 다다르는 순간에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길고 큰 주제가 반복되어서 이것이 권력을 위한 광대가 되어야만 하는 음악가의 현실을 풍자하는 느낌을 준다. 이 곡이 주는 웅장함과 위풍당당함과 함께 전체를 아우르는 냉소를 느껴보면 좋겠다.
1939년 <교향곡 6번>이 완성되었다. 말러의 영향력이 강화된 작품으로 작곡가의 내면과의 교감이 깊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레닌그라드 초연에서 관객들은 당황했고 당국에서도 논란을 일으켰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서방에서는 사랑받는 작품이었다고 전한다.
'레닌그라드'라는 부제가 달린 <교향곡 7번>은 1941년 7월에 작곡되기 시작해 1942년 3월 5일에 초연되었는데 이 연주는 전례 없는 문화 행사로 정치 선전용으로의 가치가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세계대전 참여를 서방에 알리는 행사였기 때문이다. 장대한 규모에 투쟁을 장려해야 할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적 내용은 모호하고 레퀴엠에 가까웠다. 이 교향곡은 따라서 교향곡 정규 레퍼토리에서 곧 사라졌고 1980년대 중반에야 다시 연주되기 시작했다.
그는 1942년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지명되었다. 20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감정의 과잉은 사라지고 작곡가의 내면을 드러내는 절제된 세계를 표현하였다.
<교향곡 8번>은 1943년에 완성되었는데 이 교향곡은 전쟁의 공포와 만행을 초월하고 슬픔과 분노에서 비롯된 연민의 정을 보여준다고 한다. 노여움에 가득찬 주요 주제, 인간의 어리석음, 기계의 말살, 탈진 상태의 고요까지, 전사자를 기리는 레퀴엠. 이러한 의도의 작품이었으니 당연히 검열 당국의 제재를 받아 1956년까지 연주되지 못했다.
1945년의 <교향곡 9번>은 나치에 대한 소비에트 연방의 승리를 기념하는 '승리'의 교향곡을 기대하고 있던 당국의 심기를 완전히 외면한 작품으로 비난으로 가득찬 공식적 비판의 정점에 이르렀다.---->들어 보면 좋음 ㅎㅎ, 특히 5번이랑 비교
1947년, <고국의 시>(Op.74)는 아리아와 합창이 등장하고 민요와 전통 가요를 소재로 하였는데 문제는 사회주의적 명분에 충실하지 않은 작품이라는 사실이었다. 그의 태도는 문제가 되기에 충분했고 1948년, 프로코피예프, 하차투리안 등과 함께 드미트리는 서방에 대해 우호적이며 사회주의적 명분에 충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강도 높은 비난을 받기에 이르렀다. 쇼스타코비치가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의 작곡가이자 대중이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었던 만큼 비난의 강도도 가장 높았다. <음악이 예술의 한 장르로서 그 작곡가의 기량이나 내면의식이 작품에 반영되는 것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이념을 얼마나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가가 기준이 되는 시대에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압력일 것이다.>그는 교수직에서 사임해야 했고 대중들로부터 악의에 찬 편지들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는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공식적인 작품'과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는 '진지한 작품'을 분리하는 방법으로 창작에 임했다. 따라서 어떤 작품들은 공식적 연주를 기대할 수 없는 상태로 그는 작품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쇼스타코비치는 예술이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기보다 예술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점차 바뀌어갔다. 그는 20대 중반 이후로 이러한 신념을 갖게 되었으며 그의 예술적 작품 활동의 방향타가 되어 주었다. 그는 사회주의적 사고방식을 표현하도록 강요받는 분위기 속에서 생존을 위한 공식적인 작품과 자신이 지향하고자 하는 예술세계와의 분리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나가야 했다. 따라서 점점 추상적이고 암호화될 수밖에 없었다.
<교향곡 10번>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하고 프로코피예프가 작고한다. 스탈린의 사망 덕분에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쇼스타코비치에게는 꿈 같은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프로코피예프와 그다지 친분관계가 깊지는 않았지만 1악장을 통해 프로코피예프를 추모하는 슬픔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 작품은 감정의 표현의 폭이 다른 교향곡과 비교해 가장 넓어서 논리적 일관성에 대한 분분한 의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스탈린이 사망한 뒤 쇼스타코비치는 새로운 작품의 창작보다는 지난 5년여 동안 미공개된 작품의 뚜껑을 열어 자유를 주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쇼스타코비치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은 마침 소비에트 영화의 융성기와도 겹친다. 그는 코진체프와 10편의 영화에서 함께 작업했다. 물론 이 작업은 당의 지시였다. 예술에 대한 당의 간섭이 심해진 1937년 이후에는 더욱. 그는 당의 권유를 뿌리치지 않았는데, 거부할 힘이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영화음악 작업은 그에게 긴요한 생계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화음악을 들으면 가장의 애환스러움이 느껴진다.
특히 1936년부터 1940년 사이에 다른 시기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영화 음악을 쏟아 놓는데, 이 시절 큰 딸 갈리나와 두 살 터울의 아들 막심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아울러 당시는 위에서 말했듯 오페라 덕에 당에 대한 그의 입장이 곤란하던 때이다. 정치적 곤궁과 경제적 곤궁은 당연히 맞물린다. 그래서 그는 4년 동안 모두 9편의 영화음악을 쓴다. 2개의 극음악까지 포함한다면 1년에 두 편 이상식 생계를 위한 작곡에 매달렸던 셈이다.
그의 살림은 1942년 나치 독일이 레닌그라드를 연일 폭격하던 와중에 작곡된 일곱 번째 교향곡 <레닌그라드>가 초연된 후 활짝 피기 시작한다. 전투적 애국주의로 충만한 이 곡은 같은 해 레닌그라드 시내의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진다. 이 영웅적인 분위기의 교향곡은 일종의 선무 방송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미국의 주간지 <타임>의 표지에 희화화 된 그림으로 남겨진다. 어쨌든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아파트와 별장 등을 지급받았고 서기장 스탈린에게 진심어린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다른 예술가들의 일부에게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완고했다.
1955년 영화 <등에>를 위해 12곡으로 이뤄진 모음곡을 작곡한다. 이 영화의 원작은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에델 릴리언 보이니치가 쓴 낭만적인 혁명소설이다. 이 소설은 혁명을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사회주의적 대의보다 개인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옛 소련에서도 스탈린 사후에야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등에 모음곡>은 짙은 애수를 풍기는 음악이다. 12곡 중 7번 '서주'부터 10번 '녹턴'까지가 그렇다. 러시아풍의가요적 선율이 가을바람과 같다. 당의 압박과 예술가로서의 자의식 사이엣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며 어느덧 40대 후반에 접어든 그는 이 당시 아내 니나를 잃었다. 아내와 사이가 마냥 좋지는 않았지만 23년을 함깨해 온 아내를 잃은 그의 음악에서는 쓸쓸함과 허망함의 향이 짙다. 특히 모음곡 8번 <로망스>와 9번 <간주곡> 10번 <녹턴>은 더욱이 그렇다.
쇼스타코비치의 곡은 국내에선 1980년대 중반까지도 금지된 곡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곡은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조차도 널리 애호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그의 음악이 주는 생생한 묘사력, 가슴 속 깊은 곳까지 지르는 냉소적 풍자, 끓어오르는 오케스트라의 포효는 누구의 심장이라도 쿵 내려 앉게 만든다. 지금 우리 시대에서 그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 황폐해져 가는 우리가 인간성 상실을 향한 그의 절규를 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을 직면시키는 것이며, 우리 이대로 괜찮은 것일까 라는 성찰을 넘는 각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은 유태인이 아니었지만 반유태주의를 고발하는 교향곡을 쓰는 사람이었며, 음악으로 숭배 받기를 원했던 (이를테면 환희의 송가와 같은) 스탈린에게 조소와 풍자로 가득한 제9번 교향곡을 들이민 사람이었고, 애매모호한 음악 속에서 복종 뒤에 반항을 숨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동시에 당의 구조적 현실과 가족의 생존 앞에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입각한 음악도 언제든지 던질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사회주의 이념 속에서도 여전히 가장 생생한 인간의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동시에 인간의 허망함을 노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구조와 개인의 관계성 안에서, 이념과 욕망의 팽팽한 줄다리기 가운데 현을 켜는 자와 같다. 그의 긴장은 멜로디가 되고 그의 두려움은 심포니가 된다. 그의 결단은 지휘가 되어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모든 인간은 그렇다. 이상과 현실에서 구조와 개인 또 신념과 욕망 사이에서 긴장하고 갈등한다. 그리고 선택하고 포기한다. 이것이 우리 인류가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방식이다. 이렇게 우리는 자라왔고 또 자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역사를 쓰고 있고, 인류를 노래하고 있다. 우리의 인생은 그래서 저마다의 심포니다.
함께 들을 곡은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이곡은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쓰여진지 24년 후의 작품이다. 1954년 아들과의 피아노 연탄곡으로 작곡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콘체르티노 Op 94 를 바탕으로 1957년 전체 3악장으로 구성되어 완성되었다. 전체적으로는 활달하고 힘있는 분위기로 압도하지만 2악장 안단테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멜로디로 마음을 적셔준다. 특히 2악장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 2악장과 비교해서 감상해도 좋다.
동영상https://youtu.be/P5mcRWc2rik
쇼스타코비치의 모든 곡이 그렇듯이 이 곡애서도 인간으로서의 그의 고뇌가 울린다. 그의 곡을 듣고 있으면 내가 일어나 외치기도 하고 또 내가 깊은 심연 속으로 침잠하기도 한다. 나로 하여금 나를, 세상을 노래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