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미식회 ㅣ 해원
1. 라흐마니노프의 생애와 음악들
ㄱ. 유년기 : 전통귀족 출신, 그러나 불우한 기억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4월 1일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가 모두 러시아의 장군 가문으로 상당한 재산이 있는 귀족 집안이었다. 그러나 라흐마니노프가 태어나기 직전부터 집안이 몰락하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한량으로 낭비가 심하고 놀음을 하며 재산을 탕진했다고 전해진다. 그 당시 러시아는 농노기반의 귀족경제가 무너지고 상업으로 돈을 번 부호가 새로운 계급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래서 당시 러시아에서 전통적 귀족가문이 경제적/정신적으로 황폐해져가며 몰락해가는 것이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이러한 과정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안톤체홉의 <벚꽃동산>을 참고할 수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년기를 보내는데, 슬픈 이야기가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부모는 파경을 맞아 별거를 하다가 결국 아버지는 행방불명되기에 이른다. 그 외에도 여섯형제 가운데 두 명의 형제가 병으로 죽었다. 그의 음악, 인생사를 돌이켜보다보면 내성적이고 침울한 면을 엿볼 수 있는데, 유년기에 겪은 우울한 경험들과 연관지어볼 수 있다.
그는 네 살때 처음 어머니 류보피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9세 때는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배웠다. 또 부모가 이혼한 후에는 모스크바로 가서 니콜라이 즈베레프의 집에서 기숙을 하면서 음악을 공부하기도 했다. 이때 같은 문하에서 한 살 위의 스크리아빈과 친구가 된다. 아침 6시부터 피아노 앞에 앉아야 했고 심한 꾸지람에 체벌을 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세르게이는 작곡도 공부하고 싶었는데 즈베레프는 뛰어난 피아니스트를 만들려는 교육에만 집중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세르게이는 스승의 집을 나와서 리스트의 제자이자 자신의 사촌형이기도 했던 피아니스트인 알렉산더 질로티에게 피아노를 배운다. 또 모스크바음악원에 재학하면서 세르게이 타네예프와 안톤 아렌스키 등에게서 작곡을 공부했다. 그는 모스크바음악원에서 작곡과 피아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막짜리 오페라 알레코를 졸업작품으로 선보이며 최고상을 받았다. 2등은 동급생인 스크리아빈이었다. 초연은 성공적으로 끝나고 차이코프스키의 후원도 받았다.
ㄴ. 청년기 : 최초의 음악적 좌절과 침체
그는 일찍이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며 18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차이코프스키가 1893년 타계했을 때 그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작품을 썼다. 비가풍의 피아노 3중주곡인데, 이 작품엔 어느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그리고 1895년 라흐마니노프는 교향곡 제 1번을 작곡했다. 이 곡의 초연은 1897년 글라주노프의 지휘로 이루어졌으나 실패로 끝났으며 언론의 혹평, 각계의 비난이 난무했다. 그는 자신의 신곡에 엄청난 기대감을 품고 있었지만 쏟아지는 혹평에 깊은 실의에 빠졌고 극심한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리고 만다. 자기 작품의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글라주노프같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작곡가가 어떻게 그렇게 서툴게 지휘할 수 있었는지 놀랍다. 그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느낌도 없이 그 작품을 지휘했다."라고 작곡가를 탓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기도 했다. 당시 글라주노프가 술에 취한 상태로 지휘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때 받은 마음에 상처로 곡을 쓸 수 없었으며 3년간 지휘자로만 활동한다. 이 시기에 최면술사이자 음악가, 심리학자인 니콜라이 달에게 심리치료를 받게 된다. 니콜라이 달 박사는 그에게 ‘자기암시 요법’이라는 처방을 내렸는데, 이는 환자에게 가벼운 최면을 걸어놓고 그 귓가에 매일 필요한 말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새로운 곡을 씁니다. 그리고 그 곡은 성공합니다."
우울증을 간신히 이겨낸 라흐마니노프는 1899년부터 쓰기 시작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을 1901년 5월 모스크바에서 비공식 초연한다. ‘비공식’이란 무슨 말인고 하니, 콘서트홀의 청중 앞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모교인 모스크바음악원 관계자들과 동료 피아니스트들만 초대해 연주회를 가졌다는 뜻이다. 공식 초연은 11월 9일, 라흐마니노프 본인의 피아노 연주로 이뤄졌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덕분에 라흐마니노프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3년간의 침체에서 벗어난다. 그는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헌정했다. (이 에피소드는 국내에서 각색되어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로 공연되기도 했다.) 그 이후 바로 그 때부터 미국으로 망명하는 1917년까지, 왕성한 작곡활동을 이어간다.
ㄷ. 음악적 전성기 : 결혼과 왕성한 음악활동
1901년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이듬해에 사촌누이였던 나탈리아 사치나와 결혼한다. 라흐마니노프가 10대 시절부터 고모인 바르바라 사치나의 집에서 지내던 시간이 많았으며, 나탈리아는 어린 시절부터 같이 놀았던 네 명의 사촌 가운데 한 명이었다. 오래된 둘의 연애는 게다가 러시아 귀족사회에서 사촌간의 결혼은 흉 잡히지 않는 일이었다고 한다. 결혼을 하고 두 사람은 모스크바에 정착하고, 이듬해에 첫딸 이리나가 태어난다.
이때부터 라흐마니노프는 남편과 아빠의 역할 때문이었는지(?) 환금성이 좋은 오페라 작곡에 힘을 쏟고 볼쇼이극장에 지휘자로 취직하기도 한다. 이 시기의 그는 작곡보다 지휘와 연주 쪽에 좀더 비중을 뒀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의 정세는 매우 불안했다. 이른바 1905년의 혁명. 특히 10월부터 12월까지는 총파업을 비롯해 정부군과 혁명군 사이의 전투가 치열했다. 모스크바에서는 12월에 접어들면서 로스토프 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정부군과 충돌했고, 이어진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무장봉기로 발전했다. 결국 라흐마니노프는 극장의 지휘자를 사임한 채 아내와 딸을 데리고 이탈리아를 거쳐 독일 드레스덴으로 건너간다.
이 시기에 피아노소나타 제1번, 교향시 <죽음의 섬>(1909), 교향곡 2번 e단조, 피아노협주곡 3번 d단조(1909)등 작곡에 몰두하여 여러 걸작을 남겼다. 이 때 작곡된 교향곡 제2번은 1908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되었으며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지휘로 연주되어 큰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은 같은 해 초연된 스크리아빈의 교향곡 제4번 <법열의 시>와 경쟁하여 글린카 상을 수상했다.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은 그의 첫 미국 순회연주를 위해 특별히 작곡된 것으로, 1909년 11월 28일 발터 담로슈가 지휘하는 뉴욕 심포니와 협연한 미국 데뷔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작품 가운데 통일성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작품인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은 피아니스트의 뛰어난 기교를 요구하는 곡으로 마지막 악장은 그 어떤 피아노 협주곡보다 화려하다.
이 시기에 그는 미국에서 순회공연을 하며 필라델피아와 시카고에서는 지휘자로서도 성공을 거두었는데 자신의 최신 관현악곡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 작품들 가운데 교향곡 제2번이 가장 중요하다. 이 교향곡은 비록 과도한 낭만주의적 기법으로 흐르는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상투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깊은 정서와 매력적인 주제 선율이 돋보인다. 순회연주 동안 보스턴 심포니의 종신 지휘자 자리를 제안 받았지만 거절하고 1910년 2월 러시아로 돌아갔다. 라흐마니노프는 전세계적으로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로 입지를 굳혀간다.
ㄹ. 미국 망명 이후 : 주로 작곡보다는 연주자로 활동, 소수의 작품만 남김
그렇게 연주와 지휘에만 몰두하던 라흐마니노프는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정치적 혼란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가 그의 가족은 독실한 공화정 지지자로, 이런 영향을 받은 라흐마니노프는 죽을 때까지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선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라흐마니노프가 미국을 ‘자유의 땅’으로 생각하며 동경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미국 망명 전에 가족에게 이런 편지에 미국에 대해 이런 언급을 하였다.
이 정 떨어지는 나라에는 미국인들만 들끓는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일만 하려고 하는지, 비즈니스를 외치면서 사람을 들볶고 강행군시키는구나. 나는 지쳤다. 성격도 많이 나빠진 것 같구나.
망명 이 후 25년간 미국에서 살았지만 그는 능숙한 영어를 구사하지는 못했으며, 가족과 몇몇 친구들 속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였다. 늘 러시아와 러시아 사람들을 그리워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러시아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위한 공명판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외감은 이전의 그에게서 볼 수 있었던 왕성한 창작 능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라흐마니노프는 주로 피아니스트로 주로 활동하였다. 물론 그는 러시아에서도 종종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그것은 자신이 작곡한 곡을 연주하는 ‘작곡가’로서 연주에 가까웠다. 미국에서의 라흐마니노프는 자작곡뿐 아니라 베토벤과 슈베르트, 쇼팽과 그리그까지 연주해했다. 이렇듯 연주가로 활동하면서 창작에는 충분한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고 단 여섯곡의 작품만 남겼다. 이 시기에 <교향곡 제3번 a단조>(1936)와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1934), <피아노협주곡 제 4번>등이 있다. 그는 해마다 유럽에서 순회 연주를 하며 러시아로 돌아가려는 뜻을 비치기도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꿈을 실현하지 못한 채 1943년 3월 28일 세상을 떠난다.
2. 음악적 특징들
* 러시아 후기 낭만주의 전통을 잇는 마지막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는 차이콥스키의 영향을 받아 후기 낭만파에 속하는 작품을 주로 썼다. 그는 다양한 악곡 형식과 장르를 포괄하지만 슬라브적인 경향을 짙게 나타냈고, 풍부한 선율과 애수를 담은 서정성을 표현했다. 비록 거의 대부분이 20세기에 작곡되었지만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분명 19세기 음악어법에 속해 있으며 실제로 차이코프스키가 구체화한 전통의 마지막 주자였다. 낭만주의적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폭발적인 변화와 실험의 시대에도 아직 아름다운 선율을 쓰고 있었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러시아를 떠나기 전에 작곡되었고, 그의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에는 강렬한 그리움, 조국에 대한 향수가 절절히 배어 있다.
* 압도적인 손가락, 두드러지는 피아노
라흐마니노프는 18세때 처음으로 작곡한 곡이 피아노협주곡 1번이었고,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떨친만큼 피아노는 그의 음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198cm에 이르는 키와 손가락을 손가락을 쫘악 폈을 때 손의 크기가 자그마치 30㎝에 달했다고 한다. 손으로 13도의 음정(피아노 건반 도~ 라까지)까지도 연주해 낼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듬직한 체구에서 나오는 정열적인 연주와 기교, 베토벤, 슈만, 쇼팽, 차이콥스키 등의 작품에 불어넣은 독자적인 해석. 그는 당대 가장 위대한 피아노 연주가 중 한 명으로 명성을 떨쳤다. 커다란 손으로 건반을 완전히 장악한 채 육중하고 화려한 연주를 선보였고, 콘서트홀의 청중은 그의 초인적 기교에 완전히 열광했다고 전해진다. 그에 대해서는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은 이렇게 평했다.
(라흐마니노프의) 황금색 비밀을 간직한 살아있는 피아노 음색은 가슴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화려하게 건반을 질주하는 그의 손가락과 흉내 내기 어려운 거대한 루바토에 홀려 시름을 잊고 빠져들었다.
그가 작곡한 피아노 작품들은 대개 유난히 컸던 그의 손을 기준으로 작곡되었기 때문인지 고도의 기교와 고난도의 훈련을 필요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피아니스트들에게 어려운 곡으로 악명이 높다. 10도 이상으로 손을 찢으며 건반을 4개 이상을 누르는 옥타브, 많은 음표들. 이걸 모두 물 흐르듯이 표현해야 한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기교를 자랑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는 과시하는 성격이 전혀 아니였고, 그의 연주를 들어보면 어려운 부분을 강조하기보다는 산만하게 들릴 정도로 간단하게 흘려보낸다.
3. 대표작을 들어보세요.
라흐마니노프는 네 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남겼다. 그 중 2번과 3번은 걸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ㄱ. 피아노 협주곡 2번 OP.18 (1901)
동영상https://youtu.be/FNyQz7SiPQY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 가운데서도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는 걸작이다. 교향곡 1번 초연 실패 이후 3년간의 우울증 치료 후 재기한 곡. 노다메 칸타빌레 치아키선배의 연주로 유명.
1악장 모데라토(moderato, 보통 빠르기로). - 11분
- 묵직하고 장중한 피아노 독주. 이어서 관현악이 첫번째 주제를 제시합니다. 마치 파도가 넘실대는 것 같은 가요적 선율이 뭉클하게 밀려온다. 그리고 잠시 후 피아노가 센티멘털하고 감미로운 두번째 주제를 노래한다.
2악장 아다지오 소스테누토(adasio sostenuto 느린 템포로, 음 하나하나를 충분히 눌러서 묵직하게) - 12분
- 깊은 슬픔을 머금은 듯 가슴이 아린 주제가 피아노, 목관악기, 현악기 사이를 천천히 누비고 지나간다. 중반부의 눈부신 피아노 테크닉도 인상적.
3악장은 알레그로 스케르찬도(Allegro scherzando 빠르고 경쾌하게) - 12분
- 앞의 두 악장에 비해 활달하고 힘이 넘친다. 현을 중심으로 약간 유머러스한 악상. 첫 주제를 피아노가 힘차게 연주하고 두번째 주제는 오보에와 비올라가 주도한다. 마지막 악장에서 현란하게 펼쳐지는 피아노 테크닉은 그야말로 ‘묘기’에 가깝다.
ㄴ. 교향곡 2번 E단조 OP.27 (1908)
동영상https://youtu.be/SvuitFzDxDg
1악장 라르고, 알레그로 모데라토 / 느리게, 조금 빠르게 - 19분
저현악기들의 느리고 우울한 울림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목관과 호른, 바이올린이 등장한다. 템포가 라르고에서 알레그로 모데라토로 전환되면서 바이올린이 첫 주제를 제시하고 그것이 점차 확장됐다가 애잔한 클라리넷 독주, 이어서 목관과 현악기가 어울려 서정적인 두번째 주제를 연주한다.
2악장 모데라토 / 보통 빠르게 - 9분
리드미컬한 전개가 돋보이는 스케르초풍의 악장. 템포가 모데라토로 전환되면서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악구들이 잠시 펼쳐진다. 그러다가 다시 경쾌한 리듬을 타고 음악이 점점 빨라진다. 잠시 멈추는 듯하다가 다시 고조된다. 서정적인 악구들도 다시 한번 얼굴을 비춘다. 다시 템포가 점점 빨라졌다가 마지막에 금관악기들이 코랄풍의 연주로 방점을 찍는다. 관현악의 색채가 매우 화려할 뿐 아니라 생기가 넘치는 악장.
3악장 아다지오 / 느리게 - 14분
아다지오로 흘러가는 3악장은 <교향곡 2번>에서도 가장 애청되는 악장. 바이올린이 리드하는 선율이 인상적. 이어서 클라리넷이 긴 호흡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4악장 알레그로 비바체 / 빠르고 힘차게 - 13분
다소 소란스러운 듯 행진곡 풍으로 전개되는 활기 넘치는 마무리.
ㄷ. 피아노 협주곡 3번
동영상https://youtu.be/1TJvJXyWDYw
영화 Shine에서 유명한 곡. 첫주제에서 이미 이 작품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다. 큰 스케일로 폭넓은 감정 표현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아름답고 유려한 주제가 돋보인다. 미국 순회공연을 위해 작곡한 곡으로, 1909년 뉴욕에서 초연되었다.
4. 함께 듣고 싶은 곡
같이 들어볼 곡은 라흐마니노프가 1901년에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g단조입니다. 일반적으로 첼로소나타로 불려지나, 이는 라흐마니노프의 의도와는 맞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라흐마니노프는 단순히 반주로써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적인 성부로서 피아노파트를 작곡했습니다. 초연은 1901년 12월 15일 모스크바에서 본인의 연주로 이뤄졌습니다. 3년간의 침체기 이후 발표한 곡으로, 피아노 협주곡 2번의 대성공에 비해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아름다운 곡입니다. 총 네 개의 악장으로 되어있습니다.
1악장 : 느리게 / 조금 빠르게 Lento. Allegro moderato
2악장 : 빠르고 활기차게 Allegro scherzando
3악장 : 느리게 Andante
4악장 : 생동감 있고 빠르게 Allegro mosso
그 중 3악장 안단테를 함께 들어보고 싶습니다.
자기 주장을 세우며 남과 대립하는 걸 피했고 남의 충고나 비난엔 크게 상처받았던 소심남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라흐마니노프는 1897년 초연됐던 ‘교향곡 1번’이 혹평을 받자 오랫동안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고요. 또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웃 사람에게 귀한 꿀을 선물하려고 나섰지만, 꿀단지를 문 앞에 두고 돌아왔습니다. 이유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폐가 될 것 같아서였다고 하네요. 그의 성격에서 보여주듯이 성격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발산하고 취하기보다는 어딘가 억압된 측면이 많이 보입니다. 라흐마니노프는 미국 망명 이후 조국을 그리워하면서도 평생 등지고 살았는데 이 때문에 평론가들은 그의 음악에서 조국에 대한 향수, 그리움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에는 내 손에 닿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한 어떤 애수가 녹아있는 듯합니다. 그것이 아름답게, 천천히 혹은 격정적으로 그려집니다. 이처럼 저는 그리워하는 대상이 조국이던, 사랑하는 연인이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든, 이상향이든, 혹은 이루고 싶은 꿈이든 간에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대상이 달라질지언정 지금 당장 손에 쥐어가질 수 없는 것을 애타게 찾는 그 격정적이고도 비극적인 마음은 특정 부류의 사람에게 나타나는 인간적 본성이 아닐까 합니다. 현재에서 끊임없이 결핍을 느끼는 사람들말입니다. 우리는 애초에 어딘가로부터 떨어져나와, 태어날때부터 무엇인가를 그리워 해야만 하는 숙명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그 대상과 관련된 특정한 사연이 있어서가 아니라, 저는 그리워하는 마음을 향유하기 위해서 대상을 만들어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간사한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또 다시 무엇인가를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술에서 주요한 재료가 되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므로, 교묘한 축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자료 :
존버로우즈, 클래식의 세계, 21세기 북스
문학수, 내 인생의 클래식 101
김수영,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우울과 슬픔을 위로해주는 까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