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클래미식회 ㅣ 박정현

by 한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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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otr, Ilyitch Tchaikovsky](1840~1893)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을 가져온 작곡가.

보트킨스크 태생인 러시아의 작곡가. 광산기사와 음악을 좋아하는 프랑스계의 모친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매우 음악을 좋아하고, 또 이상할 정도로 음에 대해 민감했다. 1848년에 그의 집안이페테르부르크에 이사하자, 그곳에서 체계 있는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1848년에 부친의 의사대로 법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1859년 19세) 에는법무성의 서기로 근무했다,

하지만 음악에대한 열정을 끊을 수 없었던 차이코프스키는 마침 러시아 음악협회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개설하여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입학이 허용되었던 ‘음악교실’에 1861년(21세) 에입학하여 니콜라이 차렘바에게 이론을 배우게 된다. 이 음악교실은1862년에 정식으로 음악원으로 승격되고, 차이코프스키는 그 이듬해인 1863년(23세)에 법무성을그만두고 정식 학생으로 등록한다. 이후 차렘바에게 이론 수업을 계속해서 받으면서 음악원의 원장이던 안톤루빈스타인에게서도 작곡 지도를 받았다. 그외에 플루트와 오르간 수업도 병행했다.

음악원을 졸업한차이코프스키는 1866년(26세)에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설립한 모스크바 음악원의 이론 선생으로 임용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난다. 이후 차이코프스키는 1878년(38세)에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직을 사임할 때까지 주옥같은 걸작들을 양산하게 된다.특히 1875년(35세)을 기점으로 해서 그의 주요 오케스트라 작품들, 피아노 협주곡 제1번(1874~75), 교향곡 제3번(1875), 〈백조의 호수〉(1875~76), 교향적 환상곡 〈프란체스카라 리미니〉(1876),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로코코 풍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1876), 교향곡 제4번(1877~78),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1877~78), 바이올린 협주곡(1878) 등을 홍수처럼 쏟아낸다. 이 시기는 그의 전생애를 통틀어걸작이 가장 풍성하게 양산된 때였다.

차이코프스키가수학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작풍은 서구화를 지향했기 때문에 차이코프스키 역시 이러한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에는 전통적인 러시아 민속적 선율이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예를들어, 그의 제2번 교향곡의 2악장과 4악장에서 우크라이나 민요가 주제로 사용되었으며, 제4번 교향곡의 피날레에서도 ‘들꽃 속에 서 있는 자작나무’라는러시아 민요가 제2주제로 삽입된다. 그리고 그의 바이올린협주곡의 주제 역시 러시아 민속음악의 영향이 느껴지며,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의 양끝 악장에서도 우크라이나 민요를 다시 채용하고 있다

차이코프스키는음악원에서 훈련받은 견고한 작곡기법의 토대 위에 러시아 음악의 유산을 자연스럽게 펼치고 있으며, 이러한전문성과 예술적 우아함이 그의 음악을 5인조의 음악과 구별되도록 만들고 있다. 5인조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독일적’이라고 비난했지만, 그의음악에서는 분명히 러시아적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제1번교향곡 일명 〈겨울날의 환상〉부터 제6번 〈비창〉까지, 현을위한 세레나데(다장조), 스승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죽음을추모하기 위해 쓴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이라는 제목의 피아노 트리오, 특히 그의 무용조곡들이 그러하다. 물론 그의 음악적 폭은 러시아의 민요와 아마추어리즘의 그것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다.

1876년(36세)에 파리를 방문한 차이코프스키는 비제의 〈카르멘〉을 보고 크게 감동받았으며, 이어서제1회 ‘바이로이트 축제’를 참관해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 초연을 듣게 되었다. 이즈음에 차이코프스키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원장인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소개를 통해 평소부터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경도되어 있던 부유한 철도 경영인의 미망인 폰 메크 부인(N. F. von Meck)과의 이상한 교제를시작하게 된다. 이 두 사람은 이후 서로 신뢰하는 벗으로서 편지만을 주고받으며 단 한 차례도 만나지않는다. 이것은 폰 메크 부인의 요구조건이자 차이코프스키의 입장에서도 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묘한 관계는 약14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코프스키에게 매년 6천 루불을 연금 형식으로지급했다. 이러한 경제적 후원에 힘입어 차이코프스키는1878년부터는교수직을 사임하고 창작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한편, 차이코프스키는 그 전 해인 1877년(37세)에 당시 28세인음악원의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의 목숨을 건 열렬한 구애를 받아들여 결혼하지만,결혼생활은 몇 주만에 파탄에 이르고 만다. 내성적이고 수줍은 성격의 차이코프스키는 오직 음악에만 정열을 쏟았으며, 그녀는 남편의 생활에 대해 이해심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의동성애적 성향 역시 이 파탄에 적잖은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심한 노이로제에 시달리며 한때 자살까지기도한 차이코프스키는 결혼생활 3개월이 채 못 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도망치고, 이어 심신의 요양을 위해 유럽으로 향한다. 그녀는 계속해서 차이코프스키를쫓아다니면서 괴롭혔고, 1881년에 그녀가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자 차이코프스키는 겨우 그녀로부터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차이코프스키와 폰 메크 부인과의 관계는1890년(50세)까지 자그만치 1204통에 이르는 서신 교환을 하다가 갑자기 끝을 맺게 되는데, 그이유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로써 폰 메크 부인의 경제적 후원은 중단되었지만, 차이코프스키는 그 사이에 작곡가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확보했기 때문에 생활에 별다른 지장은 받지 않았다. 작곡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은 점차 증가했으며, 1887년(47세)부터는 지휘자로서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차이코프스키는 오히려 경제적으로 곤란한 그의 친구, 친척및 음악인들을 도와줄 수 있었다.

차이코프스키는종교음악, 오페라와 무용곡, 교향곡과 교향시 또는 서곡을비롯한 관현악곡, 실내악과 독주곡, 가곡과 피아노 음악 등의전 장르에서 모든 형식을 구사하며 중요한 작품들을 남겼다. 러시아의 후배 작곡가들, 특히 그의 제자인 타네예프 혹은 쇼스타코비치나 스트라빈스키에 끼친 그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1893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자신의 대표적 교향곡 제6번의 초연을 직접 지휘하고 난 9일 후, 한 귀족의 조카와의 동성애 관계가 알려지면서 비소를 마시고자살하고 만다(이것은 최근의 연구에서 밝혀진 사실인데, 그이전에는 사인이 콜레라의 전염이었다고 알려졌었다). 모스크바 주변의 클린에 위치한 그의 집은 지금 박물관이되었으며, 그의 작품들은 그가 존경하던 바흐와 모차르트의 작품과 함께 전세계에서 연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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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악4중주 1번 "안단테 칸타빌레"(느리고노래하듯이) 러시아의 민요(1872년 32세)

톨스토이가 공연관람후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후에 차이코프스키는 "그때만큼 작곡가로서 기뻤던 적은 없었다." 라고회상한다.

https://youtu.be/vZIcLZnve_g


피아노협주곡 1번 (1875년 35세)

이곡의 가장 큰 주제는 러시아 낭만주의를 지탱하는 "향수" 이다

이 곡을 피아니스트인 니콜라이 루빈슈타인 에게 헌정하지만 니콜라이는 혹평을 하며 싫어한다.

차이코프스키는 매우 분노하며 "한음도 고치지 않고 출판하겠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스 폰 뷜로의 지휘로 이 곡이 초연 되는데 성공한다.

https://youtu.be/AJuFMTHDl1Y


현악4중주 3번이 아주 유명하다.

"파리에서의눈물" (장송곡)

차이코프스키가 파리에 놀러 갔을때 여기서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친구는페르디난드 라우프.(현악4중주 1,2번을 연주했던 바이올리스트) 그래서 친구를 위해 작곡했다

이곡의 악보에 페르디난드 라우프의 이름을 집어 넣었다고 전해진다..



차이코프스키는 유독 현악 4중주를 좋아했다.

"만약내 생애에 있어 진정으로 감동이 깃든, 나라는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온 무언가를 악보를 옮겼다면 그것은현악 사중주 일 것이다."

나제시다 폰 메크 부인 과의 본격적인 편지 시작 (1876년 36세)

나제시다 폰 메크 부인(Nadjeshda von Meck) 이 부호의 미망인은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사랑하여, 1876년부터 14년간에 걸쳐 그를 경제적으로 원조하였으나 두 사람의 교제는 서신왕래만으로 그치고 평생 서로 직접 만난 적은없었다. Glinka Museum, Moskva.


이때 작곡한 곡

백조의 호수 (1877년 37세)

조카들을 위해 구상했던 작은 발레. 바그너의 '반지' 비제의 '카르멘'에 영향을 받아 만든곡

차이코프스키 3대발레곡 중의 하나

(백조의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하지만 이곡은 흥행에는 참패한다. 혹평을 받는다 실망한 차이코프스키는 12년이나 지난후에 발레곡을만든다. 이 곡은 사망후에 인정받는다.

이 곳은 현재 러시아의 발레를 최정상으로 끌어올렸다는평가를 받는다.

백조의 호수가 없었다면 볼쇼이발레단 같은 발레단은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https://youtu.be/wZaboVf5jdI


차이콥스키와 아내 안토니나 이바노브나 밀라코바(Antonina Ivanovna Milakova)차이콥스키는 1877년(37세) 7월 6일에 음악원의 제자였던이 여성과 결혼했으나 1주일간의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 별거생활로 들어가, 그대로 이혼해 버리는 불행한 사태를 초래하였다. 차이콥스키는 그책임을 느끼어 한때 몹시 건강이 나빠져 있었다. Glinka Museum, Moskva.

헤어짐과 돌아옴을 반복하다가 결국 자살시도

비가 오는날 숲속에서 호숫가에서 얼어죽음을 시도. 하지만다시 살아 돌아와 영영 헤어졌다.


이혼후 나제시다 폰 메크 부인 의 본격적인 지원이 시작 (1년에 6000루블)

이때에 작곡한 최고의 걸작 1877년 37세

교향곡 4번 (차이코프스키의교향곡 중 가장 변화가 많고 열정적인 곡으로 고뇌하여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으며 독특한 선율과 구성이 특징이다.)

https://youtu.be/miiHAFsYyEY

바이롤린 협주곡

https://youtu.be/qoxWQW_BpGI


유명한 헝가리의 바이올린 연주자 에게 헌정한다. (레오폴드 아우어)

하지만 역시 않좋아 한다. 혹평을 한다.

그래서 후에 브로드스키 라는 연주자가 이곡을 좋아했고 결국 이 사람에게 헌정한다.


현을 위한 세레나데 1881년 42세

현악기들이연주하는 교향곡

https://youtu.be/PAeXRJtxbrQ


차이코프스키의 마지막 곡

비창 교향곡 1893년 53세

12일만에 작곡한 교향곡 6번 곡 전체에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감정이 강하게 나타나 있으며 자신의 지휘로 초연됨

https://youtu.be/iSWeDgCXQDU

1893년 53세에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질이 두려워 동생이 보는 앞에서 비소를 물에 타 마시고 자살한다.

(교과서에는 콜레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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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과 함께 들어보고 싶은 곡은

호두까기 인형 1892년 52세

첼레스타 라는 신악기를 도입함

다른 작곡가들에게는 이 악기를 알리지 말것이라고 차이코프스키는 말한다.

(림스키 코르사코프, 글라주노프 - 당시 라이벌)

이 발레곡은 미스캐스팅으로 실패한다.

https://youtu.be/uGq5b7reg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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