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X 1화
"비비님 일어나세요, 저 출근해야 돼요."
눈을 떴을 때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새하얀 벽지 위에는 별자리 모양으로 야광별 스티커들이 가득 붙어 있었다. K와 술을 마신 포장마차는 기억나는데 그 후의 시간은 별 하나 없는 캄캄한 밤하늘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어쨌든 천장을 보며 내가 K 집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K는 이제 막 샤워를 마쳤는지 벌거벗은 몸으로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분주하게 움직였다. 움푹 들어간 그의 척추기립금을 보며 역시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그에게 왜 연애를 안 하느냐 물었고 그는 이상한 사람들에게 엮이기 싫어서라고 말했다. 그는 신이 되고 싶어 했다. 좀 더 완벽한 사람이 되기 위해 매일 육체와 정신을 수련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방 벽은 온통 책으로 덮여있다. 책장이 모자라 침대 밑에도 책상 밑에도 책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책들은 대부분 과학서적이나 경제서적이었다. 옆방은 옷방이라지만 발 디딜 틈이 없이 운동기구들이 가득했다. 덤벨이나 벤치프레스는 기본이고 홈쇼핑 채널에서만 보았던 희한한 기구들도 많았다. 방문 틈으로 보이는 K는 벌써 자신만의 슈트(그는 늘 셔츠와 정장도 맞춰 입는다)를 입고 투명한 물이 담긴 글라스에 발포 비타민 정을 집어 넣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기포를 보며 내 위장도 끓어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속이 쓰리다. 어제 포장마차에서 콜라를 너무 많이 마셔서인가(나는 술을 못 먹는다) 아니면... 요리가 취미인 그의 주방엔 수입 주방용품들이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마치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듯한 윤이나는 그 프라이팬으로 계란 프라이라도 해주면 고맙겠는데 아쉽게도 K는 아침을 먹지 않는다. 간밤에 물을 꺼내려 그의 냉장고를 열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가 먹다 남긴, 락앤락에 조심스럽게 담겨있는 케이크 조각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빨리 안 먹으면 쉬 어버릴 텐데... 혹시 지금 먹어도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다. 그의 집은 비상 아지트이기에 난 이곳에서 무조건 순응해야 한다. 즉 주는 대로만 받아먹어야 한다. 그나저나 이번 달은 어디서 지내야 할까?
나는 말라 비틀어진 내 몸에 성수동 쓰레기 수거장에서 득템 했던 체크무늬 남방을 걸쳤다. 사이즈가 커서 어깨가 흘러내린다. 검정 면 바지는 대치동 옷 수거함에서 꺼내 온 건데 여자 옷이지만 허리에 딱 맞다. 부들부들한 옷감이 명품 브랜드임이 틀림없다.
" 안 씻으세요?"
K는 책상 위의 가죽 서류가방을 챙기며 내게 물었다. 난 괜찮다고 말하며 나의 에코백에서 물티슈를 꺼냈다. 지하철 출구에서 어느 교회 신자가 나눠준 걸 받아온 것이다. 얼굴을 닦을 때마다 풍겨오는 지독한 소독약 냄새가 싫었지만 오전에 강의가 있어서 빨리 나가 봐야 하는 K에게 민폐를 끼칠 수 없어 물티슈로 대충 몸을 닦았다. 먼지 털이로 바지를 훑는 그를 앞질러 성큼성큼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내 운동화 뒤꿈치가 슬리퍼처럼 접혀있었다. 옆면에 악어 마크가 그려있는데 진짜 운동화 모양이 납작 엎드린 악어 같다. 오래전에 주운 것인데 사이즈가 10 정도 작아 그동안 꺾어 신었다.
나와 K는 그의 집 앞 사거리에서 헤어졌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이 오늘 잘 때는 있어요라고 물었다. 나도 언제나 그렇듯이 모르겠어요, 혹시 갈 때 없으면 연락해도 될까요 말했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이 no ploblem, Bomb boy 마지막 인사를 하고 뒤돌아 걸어갔다.
no ploblem, Bomb boy
그가 내게 Bomb boy(폭탄소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세가지 때문이다. 첫째 내 이름이 비비여서, 둘째 미국유학파 출신인 K 말로는 미국에서 거지를 Bomb이라 부른다고 한다. 셋째, 나의 머리카락이 폭탄처럼 크고 둥글어서이다. 흔히 '아프로 스타일'이라 불리는 이 머리는 곱슬이 심한 흑인들의 자연 머리이다. 국내에서는 튀기 좋아하는 힙합계 친구들이 많이 하고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머리를 많이 기른다음 미용실에 가서 파마로 뻥튀기 하면 된다. 단점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과 자주 머리를 감으면 죽는다는 것이다. 다행히 내 머리는 천성적인 자연머리라 머리를 감아도 말리고 나면 원상태 그대로다. 푸들처럼 말이다.
K는 지하철 방향으로 걸어갔고 난 그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딱히 갈 때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우린 정말 완전 정반대인 사람이다. 그는 키가 작고 나는 키가 크다. 그는 피부가 희고 난 동남아인처럼 까무잡잡하다. 그는 어깨가 넓고 근육질의 탄탄한 몸매를 가졌고 나는 어깨가 좁고 삐쩍 말랐다. 그는 강남 8 학군 출신으로 서울 태생이고 난 강원도 산골 출신으로 스무 살이 돼서야 난생 처음 서울에 올라왔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고 난 무교이다. 그는 숭고한 정신에 집착하고 나는 육체의 쾌락에 집착한다. 물리학과를 전공한 그는 과학을 신봉했고 농업생명과를 전공한 나는 자연을 신봉했다. 그의 삶엔 연애가 없고 나의 삶엔 연애만 있다. 그는 신이 되려 하고 난 병신이 되려 한다. 아니 이미 완전한 병신이다. 즉 내가 되려는 것에 이미 도달해 있다.
난 그의 동네에 있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영화를 보려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볼 돈은커녕 밥 사먹을 돈도 없다. 원래 가끔씩 공사장 청소 알바를 하지만 요즈음 몸이 안 좋아 쉬고 있다. 언젠가 K의 집을 청소해준 적이 있는데 그는 매우 놀라 했다. 그가 가끔씩 이용하는 파출부 아줌마보다 몇 배는 청소를 잘 한다고 칭찬해주었다. 그리고 그의 친구가 호주에서 청소일을 하는데 월 400만 원 정도 번다고 했다. 그 이후 나의 꿈은 언젠가 호주에 가서 부자로 사는 것이다. 지금은 비행기표를 살 돈이 없다. 하루하루 버티느라 돈을 모을 수 없다. 그 흔한 카드도 있을 리 없다. 만약 내가 카드가 있었다면 벌써 신용불량자가 되어 있겠지. 영화관 매표소 앞 테이블에서 빨간 줄무늬 스트로가 꽂아있는 커다란 음료수 컵을 발견했다. 플라스틱 뚜껑을 열어보니 콜라가 반 즈음 담겨있었다. 혹시 담배꽁초 같은 이물질이 들어있지 않나 스트로로 컵 안을 저어보았다. 깨끗하다. 스트로와 뚜껑을 버리고 콜라를 마셨다. 탄산이 미약하게 목구멍을 쓸었다. 아마 조조영화를 보러 온 사람이 깜빡하고 놓고 간 것 같다. 스마트폰을 꺼내 최근에 여자한테 받은 연락처가 몇 개 정도 있는지 뒤져 보았다. 그중 혼자 산다는 여자가 누구였는지 기억을 되짚었다. 이번 달에 머물 집을 찾아야 한다. 언제까지 K에게 민폐를 끼칠 수 없다. 9월 초에 만났던 여자와는 보름 만에 헤어졌다. 그녀의 남편이 중국으로 출장을 갔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돌아온 것이다. 이런 예상 밖의 상황이 언제나 짜증 난다. 그녀가 유난히 집착이 심해 난 좀처럼 그녀의 집에서 나올 수 없었다. 영화평론가가 직업인 그녀를 위해 같이 영화를 봐주고 그녀가 쓴 평론을 읽어줘야 했다. 그리고 밤마다 사랑을 나누느라 난 8월보다 더 말라갔다. 그녀와 봤던 영화 중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은 러시아 감독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란 영화였다. 마치 시간이 멈춰있는 듯한 장면이 나의 시간과 비슷했다. 난 요즈음 영화는 잘 보지 못한다. 내가 장면을 인식하기도 전에 다음 장면들이 빠르게 스쳐지나 간다. 그런데 '희생'은 내가 중간에 화장실을 갔다와도 똑같은 장면이 날 기다려주고 있었다. 난 그녀가 날 생각해서 플레이를 멈춤해 준 것인 줄 알고 '고맙다'라는 말을 했는데 그녀는 웃으며 롱테이크라고 했다. 롱테이크... 참 멋진 말이다. 나의 호흡과 느릿한 움직임이 롱테이크처럼 길어서 그녀는 내게 영어 이름을 BB라고 하지 말고 Mr.longtake로 바꾸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난 그녀에게 내 이름 비비가 BB가 아니라 非非라고 했다. 그녀는 예상한 대로 그게 무슨 뜻이냐 물었다. 나도 모르게 한 숨이 나왔다. (난 매달 만나는 여자들에게 내 이름의 의미를 가르쳐주는데 질려있었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가 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그녀는 머리가 좋아서 나의 그 한 마디에 내 이름의 의미를 단박에 알아차리고 배꼽 잡고 웃었다. 그녀에 눈가에 가득한 주름이 보기 좋게 보였다. 그녀는 내게 영어 이름을 다시 지어 주었다.
Mr. Nobody (미스터 노바디)
난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혹시 외국 사람이 이름을 물으면 미스터 노바디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녀와의 연애는 남편의 갑작스런 귀국으로 롱테이크가 되지 못했다.
우리의 마지막 데이트 장소는 그녀가 평소에 가고 싶었던 롯데월드였다. 남편이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결혼 후 한 번도 가지 못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는 롤러코스터를 좋아라 했지만 나는 회전목마를 좋아했다. 스피커에서 흐르는 달콤한 음악이 우리의 영화에 흐르는 듯했고, 쳇바퀴 돌지만 여전히 좁혀지지 않는 그녀와 내가 탄 말의 거리가 우리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어차피 사랑이란 인간이 만든 거대한 환상이다. 나와 K의 가장 큰 차이점은 K는 사랑을 믿고 난 사랑을 믿지 않는다. K는 여전히 회전목마를 탄 채, 자신이 영원히 사랑할 단 한 사람을 기다리지만... 난 아주 오래전에 회전목마에서 내려왔다.
영화가 끝났는지 상영관 문이 열리고 드문드문 몇 명의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난 그 무리 중 혼자 온 여자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한 여인이 눈에 띄었다. 민트색 블라우스에 회색 롱스커트를 입은 그녀는 무척 단아한 미인이었다. 그녀는 쓰레기통으로 다가가 자신의 에코백에서 빈 플라스틱 물통을 꺼내 버렸다. 그리고 여자 화장실로 걸어 들어갔다. 주변을 살펴보니 그녀와 함께 온 일행은 없는 듯 했다. 난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어떻게 말을 걸까? 말만 트면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데 바로 그 '첫 말'이 어렵다. K는 한 번도 길에서 여자에게 말을 걸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사람이 만나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인연 때문인데 그 인연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은 '반칙'이라고 했다. 심지어 천박하다는 말까지 했다. 그것은 마치 배우가 감독이 짜 놓은 각본에서 벗어나 자기 멋대로 연기하는 것과 마찮가지라고 했다. 난 그에게 물었었다. 그럼 당신에게 감독은 누구인가? 그는 단호하게 '신'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난 물었다. 그럼 당신은 '신이 쓴 각본'을 가지고 있는가? 나의 질문에 그는 그것이 '성경'이라고 했다. 그래서 난 물었다. 혹시 '성경'에는 지금 우리가 대화하고 있는 장면도 들어있냐고 말이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내가 앞으로 무슨 말을 할지도 다 나와있냐 물었다. 그는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그것은 그가 할말을 잃을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었다. 난 이후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결국 내가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화장실에서 아까 보았던 그녀가 나왔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정 머리를 두손으로 넘겨 질끈 묶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난 그녀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내려가는 에스칼레이터에 몸을 실었다. 난 그녀와 다섯 계단정도의 거리를 두고 에스칼레이터를 탔다. 우리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평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4층에서 1층까지 이동하면서 난 어제 포장마차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이 났다. 난 너무 졸려 자러가고 싶었지만 K는 날 놓아주지 않았다. 그때 난 후회하고 있었다. 내가 꺼낸 괜한 말이 내 발목을 잡은 것이다.
" 시간이 존재하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그럼 지금 나와 당신의 나이는 뭐죠? 우린 그 시간 때문에 아이에서 어른이 된거잖아요."
" 시간은 인간이 만든 관념일 뿐이죠. 과거와 미래는 지금 여기에 없습니다. 과거는 기억일 뿐이고 미래는 망상일 뿐이죠."
" 그런 말이 어딨어요? 그럼 우린 뭘 위해 살아가요? 미래에 대한 목표가 있기에 그곳으로 가려고 지금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거잖아요."
" 그래서 바로 망상이라는 거죠. K님은 교수가 되기 이전에 죽을 수도 있는거죠."
" 제가 죽는다고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술에 취한 그의 언성이 높아졌고 옆 자리에서 두 손을 맞잡고 있던 젊은 남녀가 우리를 쳐다보았다.
" 좀 만 목소리를 낮춰주세요. 취하셨어요. "
나의 말에 K는 깊게 한 숨을 내쉬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물수건으로 자신의 목을 닦았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결벽증이 있어 책을 본 후에도 손을 씻는 그였기에 술 취해 튀어나오는 그의 모순적 본능이 귀여워 보였다.
" K님, 저도 내일 아니 오늘 당장 사고로 죽을 수도 있어요. 아무도 미래를 예측할 없어요. 왜냐면 미래란 애초에 없으니까. 우린 그저 규칙적으로 변하고 있을 뿐이죠."
K는 자신 앞에 놓인 잔 속의 맥주를 말없이 들이켰다. 그리고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이론적으론...맞는 말이예요. 하지만 전 미래가 있다고 믿고 싶어요. 그렇지 않으면 돈도 얼마 못 받고 지겹게 매달리는 이 놈의 강사짓도 의미가 없어지잖아요. "
그는 자신의 이마를 나의 앙상한 어깨에 비며대며 중얼거렸다. 우린 규칙적으로 변할뿐이다...우린 규칙적으로 변할 뿐이다. 멋진 말이네요...기분이 묘했다. 내가 평생을 걸쳐 깨달은 진리가 누군가의 술주정으로 전락해버렸다. 어차피 그는 술이 깨자마자 다 잊어버릴 것이다. 진리는 물위로 머리를 빼꼼히 내밀었다가 손을 뻗으면 무의식의 심연속으로 도망쳐버린다. 그래서 빨리 낚아채 튀겨 먹거나 구워 먹어야 한다. 소화가 되어야 내 삶에 적용되고 행동으로 옮겨진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인과의 다섯계단 거리도 언젠가 반드시 변하고 만다. 난 그 진리의 수레바퀴에 몸을 맡길 뿐이다.
1층에 도착한 그녀는 건물 뒤편으로 이어지는 문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가 사라질까 두려워 나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유리문을 박차고 건물 밖을 살펴보니 그녀는 화단 쪽에 담배를 피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녀쪽으로 갔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졌다. 그녀는 나의 어눌한 행동을 관찰하다가 고개를 돌려 담배연기를 뿜었다. 박하향기가 은은하게 풍겼고 멘솔을 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 벌써 그녀에 대해 세 가지를 알고있다. 첫째 혼자 조조영화를 보는 여자, 둘째 담배를 피는 여자, 셋째 멘솔을 좋아하는 여자. 그 세가지 사실만으로 난 그녀에 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조조 영화를 혼자 보는 여자란... 독립적 성격의 소유자이다. 혼자 살 가능성이 많다. 스스로 만족을 채우는데 익숙하다. 출근해야할 직장에 다니지 않고 있다. 부지런하다. 예술에 대해 관심이 있다. 외롭다. 남자친구가 없다.
담배를 피는 여자란...리버럴해서 자유를 추구한다. 페미니스트적인 성향이 있다.
멘솔을 좋아하는 여자란...중독에 약하다.
그녀 옆에 서서 라이터를 찾는 척 하며 곁눈질로 그녀를 살폈다. 검정색 머리에 검정 단화. 그녀는 타인의 삶에 관여하는 것도 관여받는 것도 싫어하는 성격이며 고집이 좀 있는 편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 저 죄송하지만 불좀 빌릴 수 있을까요?"
그녀는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담배를 입에 문 채 자신의 에코백에 손을 넣어 주섬주섬 뒤졌다. 연기가 눈에 들어가서인지 미간을 살짝 찌뿌린 그녀의 모습이 매혹적으로 보였다. 이 여자한테 뺨을 맞아도 왠지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가방에 뭐가 많이 있는지 그녀는 쉽게 라이터를 찾지 못했고 그녀는 이내 포기하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내게 건냈다. 그걸로 붙이세요, 못찾겠네요. 터프하다. 그리고 성격이 급하다. 사유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 나와 비슷한 과이다. 붉은 립스틱이 묻은 그녀의 담배를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그리고 그녀의 불씨가 내 것으로 옮겨졌다. 피가 확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에게 담배를 건내며 말을 걸었다.
" 영화 재밌어요? 사실 그 영화를 보려고 왔다가 시간을 놓쳐서 밖에 있었거든요. "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 담배를 깊게 빨고 내 뱉으며 혹시 절 따라오셨나요라고 물었다.
" 아 네...사실은 그 영화가 너무 궁금했는데 감상평을 듣고 싶었어요. 인터넷에 나온 평들은 워낙 홍보성이 많아서 믿지 않거든요. 배급사에서 알바를 쓴다는 얘기도 들었고..."
난 당황하지 않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녀의 오른 쪽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필터에 가까워진 담뱃불을 손가락으로 튕겨내었다. 난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순간 정적이 흘렀고 분위기가 뻘쭘해졌다. 낯선 여자에게 말을 걸면 상대방이 놀라거나 어색해하지 않냐고 묻던 K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 천박한 짓을 왜 하냐며 날 범죄자 취급하던 그의 눈에는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때 그때 달라요. 그때 그때? 네 그때 그때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나의 대답에 실망했는지 K는 입을 삐죽거리며 시선을 읽고 있던 책으로 돌렸다. 한 줄 정도 읽었나? 그는 금새 다시 나를 보았다. 아니 그럼 도대체 무슨 말을 해요? 무슨 말? 그러니까 처음 보는 여자한테 무슨 말을 건내냐고요. 난 머리가 하애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