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소하다

잉글리쉬

즉흥현상곡 ㅣ 신정훈

by 한공기
저는 글을 막 씁니다. 브레인스토밍하듯 손가락 가는대로 놔두는 식입니다.

스크린샷 2016-01-15 오후 4.46.44.png 호주 멜번의 청소부


작가 프로필 ㅣ 신정훈

현상을 쿨하게 응시하고 그것에 담긴 의미를 즉흥적인 글쓰기 과정으로 풀어내려 한다.




후덥지근한 공기에 눈이 떠진다. 멜버른의 1월은 더위와의 싸움으로 바쁜 달이다. 새벽부터 시비를 걸어오는 걸 보면 한 성깔 하는 친구다. 2시간 뒤엔 직원 분을 픽업하고, 깐깐한 유대인 아주머니 댁을 시작으로 청소를 해야 한다. 애매하게 더 잘 바에야 글이나 몇 자 더 적는 게 낫겠다 싶어, 꿈나라 재입장을 포기하고 랩탑을 켠다. 고개를 돌리니 파키스탄에서 온 나의 룸메이트 에센이 새근새근 자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몇 년간 근무를 했기 때문에 이 정도 더위는 우습다 말했던 그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거실에선 콜럼비아에서 온 유쾌한 친구 파비오의 선풍기 소리가 시끄럽게 들린다. 어제도 진탕 술을 마셔 더울테니 이해할 수밖에. 그러고 보니 불과 몇 년 전엔 상상도 하지 않던 그림 속에 내가 있다.


3년 전, 호주행 비행기가 타이페이 공항에 경유했다. 인천공항과 진작 작별을 고했고, 더는 한국말이 통용되지 않았다. 비행기 갈아타는 곳을 현지 직원에게 물어야 했다. 잘못된 영어를 쓰는 게 부끄러워, 머릿속에서 미리 완벽한 문장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문법책 한 권과 보낸 몇 개월의 시간은 실생활에서 쓸모가 없었다. 토익 시험 패턴을 철저히 분석해 학생을 고득점으로 인도할 책이라던데, 외국인 앞으로 인도할 생각은 없던 것 같았다. 탑승 구역이란 단어를 뭐지?. 스마트폰의 힘을 얻고 싶었으나 와이파이 탓에 실행 불가.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일단은 직원에게 다가갔다.

"excuse me. Where my air plane? I go to Australia."

말도 안 되는 문장을 알아들었는지 손짓으로 가야 할 곳을 일러줬다. 등줄기에 굵은 땀방울이 흘렀다. 끊임없이 마주할 공포였다.


친구가 소개해준 동갑내기 한국 남자가 공항으로 마중 나왔다. 차 조수석에 앉자 그는 이런저런 얘기를 꺼냈다. 피가 되고 살이 될 조언이니 새겨듣기로 했다. 호주에서 인사는 '그다이 마이트 (Good day, mate)' . 땡큐는 ’ta-' 라고 한단다. 이건 감사합니다를 '감'이라고 하는 거나 다름없다. 듣지도 보지도 못 한 발음과 표현이 이 나라와 나의 정신적 거리를 더 벌렸다. 미드나 할리우드 영화에서 듣던 말과 같은 언어인가 의구심이 들었다. 그 날 그 친구는 편의점 캐셔, 주차장에서 만난 행인과 무엇인가 말했고, 옆에 멍하니 서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짧은 첫인상으로 앞으로의 생활을 점쳐보았다. totally fucked다.



영어에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다. 심지어 한국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영포자였음에도 국민학교부터 대학까지 의무적으로 수업을 들어야 했다. 스스로 중요하지 않다 주창해도 소용없다. 군생을 거스를 수 없다. 그래서인가 모의고사 때마다 찍기로 일관했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배우리라 다짐했다. 그 계획이 첫발을 내딘 건 일본에서였다. 일본에서의 일상이 한국에서의 그것보다 더 재밌었다. 앞으로 직장을 갖고 가족들의 생계를 부양해야 할 곳은 여기란 확신이 생겼다. 그러려면 제대로 된 직장이 필요하고 일본 대학 학위가 필요했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목표로 했던 대학이 있었지만 가계 사정상 어렵다고 판단해 반 포기 상태였다. 그렇지만 자격요건은 충분했고, 일 년 간 일본에서 번 돈과 조금의 돈을 더 보탠다면 해 볼 만하다 판단했다. 그 돈을 벌기 위해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계획했고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났다. 당시 계획과 많은 부분 틀어져 이제 전혀 다른 이정표를 보고 걷고 있다. 영어가 생계에 필수적인 요소로 변했다.


영어는 어렵다. 지금까지 어려웠고 앞으로도 계속 어려울 것이다. 호주의 몇몇 대도시에는 커다란 한인 커뮤니티가 있다. 특히 브리즈번은 그런 성향이 짙다. 호주 생활의 첫 발을 내디뎠던 브리즈번에서의 경험은 많은 걸 시사했다. 2, 3 개월 신세 졌던 초밥집 한인 사장님은 20년 가까운 세월을 타국에서 보냈다. 자식도 둘이나 낳고, 강한 유대감을 가진 한인 교회 커뮤니티에서 일원으로 말이다. 그의 삶은 너무 바빠 영어가 끼어들 자리가 거의 없다. 한국 방송을 보고 가게에 나와 한국인 스탭들과 일을 하며, 직원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한 뒤 교회에 나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한인들과 친목을 다진다. 그는 일한다고 해도 좀처럼 고객들과 상대하는 위치에 가지 않는다. 일주일에 두 번 전화로 핫푸드 업체에 오더를 내려야 한다. 대부분 다른 사람이 하지만 급한 경우엔 그가 수화기를 든다. 상담사가 하는 대부분의 말을 무시하며 그냥 품목과 수량을 말할 뿐이다. 사정이 생겨 며칠이 지연된다느니 특정 품목의 재고가 없어 다른 브랜드의 동일한 제품을 보낼 거라는 수화기 너머 들리는 말에 그가 할 수 있는 두 가지 대응은 sorry와 ok다. 그는 영어를 배울 필요를 못 느꼈고 생활에 전혀 불편함이 없어 보였다. 그는 외국 속 한국에 산다. 이 정도면 사는 데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배움은 끝이 난다. 안 선생님의 포기하는 순간 거기서 게임은 끝이라고 하는 말은 농구를 떠나 모든 곳에 통용된다.


전에 몇 번 인터넷에서 고등학교 수능 외국어 영역 문제를 봤다. 왜 이렇게 어렵냐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 힘든 문제를 잘 풀고, 좋은 대학에 입학해 높은 토익 점수를 가진 친구들이 한 해 몇만 명씩 호주 땅을 밟는다. 그렇지만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쭈뼛거리며 사람들과 말하길 두려워한다. 그리고 한국사람들과 어울리며 초밥집 사장님처럼 작은 한국에서 일 년 동안 일을 하고 큰 한국으로 돌아간다. 어렸을 때 조금 다른 방향으로 영어를 접했다면, 누군가 틀려도 괜찮다고 자신감으로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게 자연스러운 방식임을 깨닫게 했다면, 아마 좀 더 빠르게 영어와 익숙해졌을 텐데. 아직도 영어는 중요한 화두다. 그래서 끝없이 가정하고 생각한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일본에서 일할 때의 몇 배나 되는 돈을 번다. 남에게 조언을 할 때 항상 조심스러운데, 가끔 직원들에게 주제넘게 몇 마디 건넨다. '좋은 기회니 시간 날 때 공부하세요.' 아마 스스로 보고 느낀 게 많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시간이 흘렀다. 현지인들과 부대끼며 살아온 탓에, 일정 수준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됐다. 나는 청소로 돈을 벌고 있는데, 2, 30 명의 고객을 관리하고 있다. 일반 집부터 400명 이상의 직원이 일하는 기업 오피스까지, 규모는 다양하다. 업무 특성상 매일 고객들과의 의사소통이 필요하다. 매일 하는 고객들과의 전화통화지만 아직도 수화기 앞에서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다행히 하는 일에 관련된 용어는 한정되어 있고, 지겹도록 사용하기 때문에 큰 무리는 없다. 그러나 대화 중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재차 물어보는 수고가 필요하다. 사업에서 고객들과 친밀하고 편한 관계가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데, 혹여 부족한 영어 실력에 그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을까 우려한다. 제대로 그들의 말을 캐치하지 못 한다면 일에 있어 빠진 부분이 생길 것이고, 그건 계약 취소로 이어진다. 고정 고객 한 명을 잡기 위해 귀찮은 과정을 겪어야 하기 때문에 지금도 영어 지문을 몇 번씩 반복해 읽는다.



아직도 가끔 타이베이에서의 일이 생각난다. 그 후 3년 동안 모자란 영어를 메우기 위해 꾸준히 시간을 투자했다.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삶이 시스템의 영향을 받았다. 사회를 떠나 독립된 존재로서의 나를 상상할 수 없다. 삶의 존속과 그 안에서 좀 더 나은 모습으로 있기 위해, 사회가 제시하는 몇 가지 선택지에 마킹을 해 왔던 게 아닐까. 많은 이가 공무원이 되기 위한 선택지에 체크를 한 것처럼, 넉넉하지 못 한 가정환경에서 좀 더 배우고 고상하게 살기 위해 영어란 항목에 체크를 한 것이다.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키워야 한다. 직원들 관리하는 매니저를 둬야 하고, 직책에 걸맞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학교 강의를 온전히 듣기 위한 영어 실력도 마찬가지다. 주어진 상황에서 선택을 이어갈 뿐이다. 영어를 대하는 초밥집 사장님, 워홀러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에 동화돼 정체된 삶을 택할까 무서웠다. 그렇지만 역시 한국은 하나로 충분하다. 호주에선 호주를 살아야 할 것 같다. 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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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http://chrminsta.tumbl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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