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인생연습 ㅣ 김은지
저는 스토리 중독자예요. 어렸을 때는 만화랑 소설에(주로 만화에) 빠져서 살았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영화에 빠져 살고 있어요. 스스로 이야기에 중독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제가 음악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작가 프로필 ㅣ 김은지
그냥 평범한 대학원생이에요. 회사에 다니다가 학교로 돌아간 거라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보다 나이가 많은 만학도예요. 처음엔 회사생활이 싫어서 도망치다시피 학교에 들어왔는데 다니다 보니 어느새 좋아져서 계속 학계에 남으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국제정치를 전공으로 하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꼰대 같은 면이 있어요. 위트 있고 매력 넘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지난 주말에 미용실에 갔다.
15년 만의 한파 중에서도 가장 추웠다는 일요일에, 오후 약속을 마치고 추워 죽겠는 발걸음을 총총대며 도착했다. 너무 추워서 그냥 집에 갈까 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예약시간이 다가오자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제 와서 내가 예약을 취소하면 다른 손님 받을 기회를 놓치게 만든 거잖아. 머리도 엉망이니 일단 가자.' 내가 갑인 입장에서도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모습이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총총댔었다.
그래놓고도 예약시간보다 5분이나 늦게 도착했고 화장실서 어영부영 대느라 자리에 늦게 앉았다. 내 담당 디자이너는 먼저 온 사람들 머리를 보고 있었다. 가볍게 상담을 하고 손질을 받으려는데 디자이너는 다른 사람에게 가버렸고 앳된 얼굴의 여자 스탭이 다가왔다. 그녀가 방금 막 감고 온 머리를 빗겨주는데, 잘 빗기지 않자 마구잡이로 내 머리를 쥐어뜯는 느낌이 들어 살짝 언짢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스탭 중에도 초보인 게 티가 났다. 그날 나를 담당한 스탭이 처음부터 마무리까지 같이 하기 때문에 오늘 작업이 험난할 거 같아 짜증이 나려고도 했다. 같은 돈을 내고 서비스를 받으니까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숙련된 사람에게 서비스를 받고 싶었다.
그녀의 빗질이 끝나고 이제 시술을 시작해야 하는데 그녀는 디자이너를 부를 생각도 않고 나를 20분 정도 앉혀 놓았다. 머리는 아무 조치도 없이 부스스 말라갔다. 아니다. 솔직히 20분은 아니고 한 10분쯤 된 것 같다. 그래도 화가 났다. 티는 안 냈다. '이 정도로 화를 내면 모범시민이 아니지.'라고 또 괜히 속으로 뿌듯했다.
앞머리에 중화제를 바르려고 샴푸실에 눕자 담당 스탭이 물을 틀었다. 그러자 화장실에서 나오던 남자 스탭이 성큼성큼 다가와서
"물을 왜 뿌려. 중화제는 물 닿으면 안 돼."
라고 했다. 화가 치밀었다. 나를 기다리게 하는 것도 좋고, 내 머리털을 몇 가닥쯤 잡아 뜯어도 상관없었지만 내 머리를 망치는 건 안된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보다 한참이나 작은 그녀를 한 대 쥐어박으며 소리치고 싶었다.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나는 이 정도로는 화내지 않아.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스스로 다독이면서..
그녀는 물에 적신 수건을 내 목 뒤로 가져다 대면서
"목 뒤에 수건 좀 대드려구.."
라고 자신 없게 말했다.
'맙소사! 지금 목이 중요해?? 머리에나 신경 써!'라고 말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진상을 피우는 내 모습이 머리에 그려졌다.
내 마음을 읽듯 그녀의 동료가
"중화할 땐 절대 물이 닿으면 안 돼. 앞머리라도 조심해야 돼."
라고 말하며 그녀를 나무랐다.
마음속으로 그에게 동조하며 남자의 한층 싸가지없는 말투는 무시했다.
'그래, 그래. 프로라면 머리에 대한 지식이 저렇게 풍부해야지.'라고 은근 마음속으로 편도 들었다.
그녀는 의기소침해서 내 목 뒤에 수건을 대어주고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2분도 안돼서 살짝 잠이 들 만큼 편했는데, 속으로 '그럼 뭐해. 머리가 중요해. 망치기만 해봐.' 단단히 벼뤘다.
한 10분쯤 지나 그녀가 머리를 헹궈주며,
"물 온도 괜찮으세요? 지금 제가 손이 너무 차가워서 온도가 잘 안 느껴지는데 너무 차갑거나 너무 뜨거우면 말씀해 주세요."라고 사근히 말했을 때, 나는 너무 미안해졌다.
이 추운 날에 한 시간에만도 수 십 번씩 손을 적시면서 그녀는 자신의 손보다는 내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스물셋, 넷 정도 되어 보이는 그녀의 친절과 다정다감함을 나는 같잖은 잣대로 판단하려고 했다. '돈 받으면 다 프로야. 프로는 자기 일에 엄격해야지.'라고 이상한 프로의 기준을 내세웠다.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위로하면서 내가 그녀를 이해하고 참아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런 내 마음까지 그녀에게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이제 막 길에 들어선 누군가가 능숙하지 못하다고 열을 내며 내가 꼴사납다고 욕한 사람들처럼 생각했고, 그러면서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위안했다. 어떤 전문가라도 초보자인 시절이 있을 것이다. 그 기간의 길이는 다를지언정 누군가가 그 시간을 참아줬고, 같이 보내주어서 전문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일 텐데 그런 당연한 것도 생각지 못하고 소비자의 권리 따위나 운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합리적인 나는 괜찮은 사람이지.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뿌듯해하면서..
사실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에 다소 집착하는 면이 있다. 좋은 사람 콤플렉스의 확장판쯤 되는 것 같은데 가능하면 진상 짓을 피하고 최대한 사람들에게 진실하게 대하며 욕은 안 먹으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진짜 괜찮은 사람은 나 같은 사람은 아닐 것 같다. 살면서 몇몇 "진짜" 괜찮은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들은 진심으로 대하되 계산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런 존재였다. 당연히 진상 떨 일이 없었고 대부분 사람들이 그/그녀들을 좋아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중화제 하나에 자리를 박차고 진상을 떨고 싶은 인간이 되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은 노력보다는 천성인 것 같고 보고 자란 것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보고 자란 것이야 그렇다 쳐도, 내가 생각하는 나의 천성은 절대 괜찮은 사람이 아니다. 억지로 참지 않으면 다른 사람 충고를 듣고 있기 힘들고, 내가 안 풀릴 때 누군가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기도 어렵다. 진심으로 위로를 건네며 맘 속의 얘길하다간 그 자리에서 칼부림을 부를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면을 덧대고 덧대면서 호호거리고, 가면 뒤의 마음을 꺼내지 않는 것으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지켜냈다고 생각했는데, 그 얄팍한 마음을 들켜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환경이 중요하다고 부모님 탓을 해본다거나 천성이 글렀으니 다 관두자거나 할 생각은 없다. 분노했으나 마음 밖으로 내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노력을 지속해 보려고 한다.
"전 괜찮은데, 이렇게 추운 날 자꾸 손에 물이 닿아서 어떡해요. 쉬는 시간에 핸드크림 자주자주 발라요."
진심이 삐죽 나온 나름 괜찮은 한마디를 건네면서 화났던 마음을 풀고, 불안한 그녀의 마음을 달랬다. 마음이 풀어진 그녀의 신세한탄을 들으며 살짝 후회했으나, 덕지덕지 덧댄 가면에 다시 한 겹을 덧대면서 다시 한 번 괜찮은 사람이고 싶은 마음에 힘을 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