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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공기 Apr 01. 2018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소소하다 ㅣ 곽정빈

연구원


가장 큰 영향을 받았고 또 좋아하는 책이 헤르만헤쎄의 데미안입니다. 그래서인지 평소 인간 본연의 양면성을 사랑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말을 곧 잘하곤 합니다.


작가프로필 ㅣ 곽정빈

저는 3년간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지난 1년간 세계여행을 다녔습니다. 하지만 두 눈을 황홀하게 채우는 수많은 풍경들보다도 여태껏 가져보지 못했던 무지막지한 혼자만의 시간을 대면해야 했던 것이 가장 큰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시간들을 글을 쓰면서 채워 왔습니다. 글을 쓸 때 비로소나 나 스스로가 나 다워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희미해져만 갔던 나의 자아가 글을 쓰면서 뚜렷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시작된 제 인생의 2막에서 지속적이고 전문적으로 글을 써나가고자 합니다.





 


 

#1. 

팟캐스트 [지대넓얕]의 진행자. 이제는 어느덧 밀리언 셀러 작가로 불리게 된 채사장의 북 콘서트를 다녀왔다. 평소에 [지대넓얕]을 즐겨 들었고, 그래서 채사장을 오프에서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예매를 하고 강연에 참석했다. 


 

북 콘서트는 채사장의 신간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를 홍보하고 독자들과 질의응답을 하는 자리였다. 책은 자아를 둘러싼 '관계'에 대한 작가의 철학서로, 명확한 논증에 의한 것이 아닌 관념적 접근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에 독자에겐 다소 난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마침 나는 북 콘서트를 가기 전에 책을 미리 읽어봤었고, 평소 채사장의 책과 [지대넓얕]을 반복해 꾸준히 들었던 터라 책에서 사용하는 관념을 이해하고 흐름을 따라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단 한 가지 강연이 끝난 이후에도 이해하기 쉽지 않았던 내용은 바로 '죽음'의 의미에 대한 것이었다. 채사장은 '관계'를 말하고 있는 이 책에서 '죽음'은 바로 '부재와의 관계'라고 명명했다. 있지 않음과의 관계라... 존재하지 않는 대상과 어떻게 관계를 논할 수 있다는 말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의미는 모호했고 머리는 지끈거렸다. 작가에게 괜한 의심을 던졌다. 그냥 죽음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싶은데 관계라는 책의 구성에 억지로 끼워 맞춘 거 아냐? 하지만 채사장이 그간 그의 방송과 저서들에서 누누이 언급해온 죽음. 그가 말하고자 하는 죽음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지 점점 궁금해졌다. 


 

강연 중간 채사장은 20부작 드라마를 차용해서 이에 대한 설명을 시도했다. 이를테면 우리는 드라마 중간중간에 나오는 인물의 행동과 발생하는 갖가지 사건들의 의미를 그 순간에는 완벽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아무런 인과 관계없이 우발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건들은 낱낱이 쪼개진 개념일 뿐이라는 것인데, 그 개별적인 파편들은 드라마의 끝에 와서야 일련의 의미를 가지게 되고, 비로소 그 관계가 해명이 되며, 존재의 이유가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죽음 [] 통해 우리는 비로소  

우리 '삶의 의미' 이해할  있는 것입니다" 


 

채사장은 이어서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저 너머에 있을 '죽음'을 끊임없이 현재로 당겨오는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당겨온다' 


 

집에 돌아와 며칠 동안 그 표현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죽음을 당겨온다. 그것은 아마도 언젠가 발생할 죽음을 인지하려 노력하는 것. 그리고 그 죽음은 바로 부재와의 관계. 즉 결국 소멸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관계하는 중에서도 항시 관계의 끊어짐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 문장을 이리저리 바꾸어가며 생각을 전개하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었다. 


 


 

#2. 

불과 몇 달전에 회사 경영위기로 인해 연구소에 대대적인 권고사직이 진행됐다.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인원 감축이 일어났고, 패색이 짙은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당사자들은 하나둘 사직서를 제출했다. 다만 아직 졸업을 하지 않고 군 복무 중인 두 아들을 둔 A 부장은 몇 차례의 밀고 당기기 끝에 퇴사 일을 세 달 연기하는데 성공했다. 


 

사실 A 부장이 평소에 맡았던 업무는 극히 제한적인 업무였다. 큰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 별다른 어려움이 없고 단순 반복적인 일. 간단히 말하면 임금도 더 싸고 머리 회전이 빠른 젊은 직원으로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솔직히 그런 업무로 여태껏 부장 직함을 달고 남아있었다는 것이 더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서 A 부장이 권고사직의 대상이 된 것은 누구에게라도 충분히 납득할만한 일이었다. 


 

어찌 됐건 A 부장은 어렵사리 연장한 세 달의 유예기간 동안 구직활동에 전념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50이 가까운 나이에 일반적인 기업체에서 요구하는 역할은 다방면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식견을 가진 관리직일 테지만, A 부장이 가진 이력과 지식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니 말이다. 


 

그렇게 두 달여의 시간이 지나고 퇴직까지 한 달이 남은 시점에서 A 부장은 기어코 내 맞은편 자리의 B 대리에게 조용히 일과 후 일대일 튜터링을 부탁했다. 컨버터 개발과 관련한 기초 이론을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다. 십수 년이나 차이 나는 한참이나 아래인 후임 직원에게 부탁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었을까? 그리고 당연히 본인도 한 달의 시간 동안 과연 없던 전문지식이 별안간 생겨날 거라 기대치는 않았을 것이다. A 부장은 파르르 떨리며 힘없이 버티고 있는 마지막 남은 한 올의 끈에 기대한 것이다. 


 

끈은 오래지 않아 끊어질 것이다. 


 

#3. 

책의 내용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A 부장은 조금이라도 일찍 현실을 자각하고 자기개발을 했어야만 했던 걸까?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설령 운 좋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오게 될지라도 A 부장(그리고 아마 우리 모두)의 결과는 결국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관계를 맺은 모든 것은 결국엔 끊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이들은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본인 스스로에게만은 공고했던 자신만의 왕국. 지난 30년의 직장생활을 오롯이 증명하는 부장이라는 직급과 전문 직종의 책임 연구원이라는 자존심. 하지만 그 관계의 끝에 임박해서야 A 부장은 비로소 그간 움켜쥐어온 것은 공허한 체면과 자존심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제서야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A 부장은 곧 알게 될 것이다. 관계의 끊어짐은 또 다른 관계의 시작이라는 것을. A 부장은 곧 새로운 직장을, 새로운 관계를 다시 맺게 될 것이다. 


 


 

#4. 

북 콘서트 마지막 질의응답시간에 죽음을 당겨오는 방법에 대해 묻고자 손을 들었지만 다른 질문자에 밀려 질문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 내 질문에 대한 채사장의 답변은 절대 구체적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가 다른 관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끝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현실을 사는 것에 너무 익숙한 건지도 모른다. 당연한 일이다. 내 직장과 재산, 내 가족, 사랑하는 연인, 나와 관계 맺는 그 모든 것들을 상실한다는데 마땅히 수긍하고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결국 인정해야만 한다. 맺어진 모든 것과의 관계에는 당연히 끝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끝을 애써 부인하고 마주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다. 


 

끝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나에게 찾아올지 모르는 일이다. 그것은 미리 알 수도 없으며, 심지어 내가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닌 건지도 모른다. 관계는 서로 다른 두 대상 간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관계의 끝을 유보할 수 있을지언정 결코 막을 수는 없다. 


 

물론 두려울 것이다. 상실은 너무도 아프고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그 끝을 마주하고 선 자리에서 비로소 우리는 이 관계의 의미를, 내 삶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그곳에서 또 새로운 관계가 이어져 나갈 것이라는 것을 강한 확신 속에서 기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눈을 감고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는 낙엽을 생각한다. 짙은 녹음을 풍기던 찬란한 여름날의 기억. 영원할 수 없음에 아름다웠던 수많은 찰나의 순간들. 그 시간의 무게가 겹겹이 쌓여 잎은 여물어 떨어지는 것이리라. 혹독한 이 겨울을 나고 나면 또 새로운 잎을 피울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우리는 언젠가 또 만날 것이다. 억겁의 시간을 돌고 돌아 무수한 우주의 소멸과 생성이 반복된 어느 한 시점에 나는 너로, 너는 또 나로 그렇게 우리가 다시 관계를 맺게 될 그날을 기대한다. 그때에는 지금보다 한층 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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