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 반 철학 반 ㅣ 소크라테스 & 데카르트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정작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복의 본질은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숨어있습니다.
전 그것을 찾아주고 싶어요.
작가 프로필 ㅣ 한공기
웹진 '소소하다' 편집장
사소한 일상이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주는, 마음탐정 한공기 입니다.
오늘은 철학 스터디 두번째 시간입니다.
첫 시간에는 5명으로 시작했는데 오늘은 7명으로 인원이 늘어서 기쁩니다.
각자 자기 소개좀 부탁드릴게요.
- 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치고 있습니다.
- 그림동화 작가입니다. 서양화 작가이기도 합니다.
- 영화연출하는 사람입니다.
- 포토그래퍼입니다.
- 로봇발명가입니다.
- 일러스트 작가입니다.
Keyword: 무지의 지, 방법적 회의
스터디에서 했던 대화내용을 서술했습니다.
참가자 프라이버시를 위해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기억을 통해 정리한 것이라 실제와 다소 차이가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본문내용 정리
1.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 철학은 현대인에게 매우 공감하는 사고방식처럼 보일 것이다. 유연한 생각과 넓은 시야로 인도하니 말이다.
2. 상대주의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귀결되는데 과연 이 세상에는 절대적 '진리'가 없는 것일까?
3. '진리'가 없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정답을 찾고있다.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죽을 것인지, 국가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왜 일해야 하는지...'
4. 그런 질문 역시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다고 단정지어 버리면 우린 더이상 사고를 할 필요가 없어진다. 아무렇게 살아도, 아무렇게 죽어도 모두 괜찮은 것이 된다. 과연 그럴까?
5. 특히 민주주의 국가의 경우 절대적 기준이 없는 상대주의 철학은 위험을 불러일으킨다. 민주주의에서는 '다수결'의 원칙이 중시되어야 하지만 다수결이 유효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정의, 가치관, 신념이 명확하게 서 있어야 한다. 즉 스스로가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각자 명확한 기준이 없다면, 우리는 말만 그럴 듯하게 하는 선동적인 정치가에게 속을 것이고 민주주의는 무책임한 중우정치로 전락하게 된다.
6. 실제로 프로타고라스에게 상대주의 철학을 배운 정치가들은 보여주기식 언행을 잘 구사하며 민중의 인기를 얻는 기술을 습득했다. 그들은 결코 민중을 향해 진지한 정치이야기를 하려하지 않았다. 단지 듣기 좋은, 내용이 없는 캐치프레이즈를 반복하고 상대 정치힌을 험담하며 대중의 흥미를 끌었다.
7. 이런 중우정치 국가에 철퇴를 내리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소크라테스이다.
8.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거대한 말을 귀찮게 하는 등에'라 칭하고 정치가들에게 논쟁을 걸었다.
9. 당시 정치가들은 뛰어난 달변을 구사하는 최강의 논객이었기에 그들의 말빨에 당해낼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던 소크라테스는 교묘한 방법을 생각해낸다.
10. 그것은 나는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면서 상대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다.
11. 예를 들어 상대가 "우리가 OO해야만 정의를 지킬 것입니다."하면 소크라테스는 "지금 정의라고 하셨는데 정의란 무었입니까?" 묻고 상대방이 "그건 모두의 행복을 말하는 겁니다."하면 소크라테스는 "그럼 행복이란 무엇입니까?"하고 질문을 계속 이어갔다. 그렇게 하다보면 상대방은 어느새 말문이 막혀버린다.
12. 소크라테스가 이런 방식을 택한 이유는 상대주의 철학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가치인 진리가 분명히 있고 우린 그것을 추구해야만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상대주의 사상에 경도된 세계를 전복하고자 홀로 분투하며 상대주의를 신봉하는 정치가들에게 싸움을 걸었다.
13. 그렇다고 소크라테스는 "진리는 OO한 것이다!"라고 확정적인 정의를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말을 했다."정말로 올바른 것 , 진정한 선이란 무엇일까? 뛰어난 정치가들은 그것을 마치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웅변으로 떠들어댔지만 실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네. 물론 나도 전혀 알지 못하네. 그럼 대체 진정한 선이란 무엇일까?"
14.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진리에 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다며 무지를 드러냈고 함께 진리에 대해 생각해보자며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15. 소크라테스의 이런 고백이 '무지의 지'라는 말로 알려졌고 이는 무지의 자각이야 말로 진정한 진리로 향하는 열정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16.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부터 우린 진리를 찾는 모험을 떠나게 된다.
17.우린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무관심한 채 각자 자신만의 쾌락을 쫓아 살아가지만, 실제 우리는 무엇 하나 진리를 알지 못하고 깜깜한 어둠의 동굴을 터벅터벅 걷고있다. 그래서 자신의 눈앞에서 엄청나게 경이로운 일이 펼쳐지고 있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냥 지루하게 매일을 반복하며 살아갈 것이다.
18. 오히려 "나는 무지하다. 그래서 오늘 벌어질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모든 것들이 새로운 세계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매순간이 흥미진진하고 호기심이 생길정도로 궁금하게 느껴질 것이다. 동시에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되면서 진리를 찾으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19.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울렸고 순식간에 많은 제자들이 모였다. 일약 스타 철학가로 명성을 떨치게 되자 그를 미워하는 정치가들은 그를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죄'로 재판에 불려나가게 하고 사형선고를 받게했다.
20. 소크라테스의 사형집행 기간에 상당한 집행유예가 부여되어 언제라도 도망칠 수 있었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죽음의 공포를 눈앞에 두고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진리, 우리가 추구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결국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21. 바로 그 순간, 한 인간이 진리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그 순간, 세상은 상대주의 사상에서 점점 반대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22. 청년들은 소크라테스가 지키고자 했던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고 그것을 찾기위한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23. 그중 젊은 날의 철학자 플라톤도 있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주장한 절대적인 이상이 있음을 믿었고 이데아론으로 발전시킨다. 플라톤은 아칻데메이아라는 대학의 근원이 되는 교육기관을 만들고 진리를 탐구하는 학생들을 양성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1. 죽음까지도 불사하며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했던 소크라테스 이후로 많은 철학자들이 진리를 찾으려 노력했지만 그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동안 역사는 그리스도교가 서양을 지배하는 중세시대로 돌입하고 "인간은 이성만으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신앙심이 필요합니다."라는 방향으로 사상이 나아갔다.
2. 그러나 르네상스나 종교개혁이 일어나 교회의 권위가 차례로 약해지며 과학이나 수학같은 학문이 발전하기 시작하고 인간의 이성을 찬양하는 근대시대로 진입했다.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면서 '신앙'에서 '이성' 중심으로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게되었다.
3. 완전한 이성을 통해 진리를 손에 넣고자했던 철학자 데카르트는 자신만의 좌표쳬계를 고안하며 진리에 다가갔다.
4. 데카르트는 공리라 부르는 '절대적인 기초명제'를 정하고 거기서부터 논리적인 절차로 정리를 알아갔다.
5. 데카르트는 모호한 철학도 명확한 수학처럼 '누구나 올바르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확실한 것'을 우선 제1원리로 설정하고 논리적인 절차로 결론을 도출함으로써 철학체계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6. 그렇다면 공리는 어떻게 찾으면 좋을까? 제1원리르 발견하는 작업은 매우 진중하게 이뤄줘야만 한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그로부터 시작된 정리도 모두다 틀리게 되는 것이다. 철학의 기반으로서 제1원리를 설정하는 명제는 '정말로 확실하고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진리'영야만 한다.
7. 데카르트는 진리를 직접 찾으려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의심하는 전략을 내세웠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했다. 심지어 눈앞의 현실조차도 자신이 어쩌면 꿈을 꾸고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의심하기까지 했다. 그는 우리의 논리마저도 착각하게 만드는 '악의에 찬 악령'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8.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 절대 의심할 수 없는 단 하나를 찾았다. 그것은 다름아닌 '의심하는 나' 바로 자신인 것이다.
9. 그래서 나는 의심한다(생각한다)고로 존재한다는 공리를 발견하였다.
자 토론을 시작해보겠습니다. 먼저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고싶어요. 과연 '진리'란 무엇일까요?
-글쎄요, 과연 그것이 있는 것일까요? 진리가 있다는 우리의 착각아닐까요?
- 허허 무덤속에 있는 소크라테스가 벌떡 일어날 말씀이시네요. (하하하)
제가 첫시간에 여러분께 한가지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토론이 책과 함께 순방향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까지 내용을 보면 결국 진리는 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진리가 없다고 말씀하시면 우린 여전히 계속 제자리를 돌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있다고 치고 과연 그 진리가 무엇일까 생각해보자는 것이죠.
- 절대 의심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아닐까요?
- 절대적인 하나의 기준?
- 신이라고 말해야 하나?
- 도가도비상도란 말이 있잖아요. 진리를 인간의 언어로 규정하는 순간 진리가 아니게 된다고...있기 있지만 그만큼 우리가 완벽하게 인식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요.
- 저에게는 있어도 없어도 크게 상관없는 것 같아요.
- 저는 반드시 있었으면 좋겠어요. 만약 진리가 없다면 삶이 너무 의미없어지잖아요.
전 개인적으로 진리를 완벽하게 믿습니다. 어쩌면 제 삶이 결국 진리를 찾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진리는 일종의 인간의 관념유희라 생각해요. 인간의 이성은 발달되어있기 때문에 끝없이 더 높은 수준의 관념을 도출시키죠. 철학 외의 다른 분야에서도 보다 순수하게 완벽한 것을 지향하는 것은 똑같거든요.
- 지적설계론이 떠올랐어요. 기독교에서는 엄청나게 지적인 존재가 모든 것을 탄생시켰다고 하잖아요. 여기서 그 지라는 것이 이성의 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그럼 신은 이성이 가장 발달한 존재가 되겠군요.
- 그럼 인간은 점점 이성이 발달되어가고 있으니 점점 진리에 다가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여러분 그렇다면 '이성'이란 뭘까요?
- 감성의 반대말?
- 서양의 발전역사를 보면 끊임없는 이성능력의 개발입니다. 서양에서는 자연의 반대말을 문화(문명)이라고 해요. Nature- Culture, 즉 인류의 문명은 이성의 발전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달라요. 동양은 '자연'의 반대말을 문화라 하지않고 '부자연'이라고 합니다. 즉 자연을 이성의 반대편에 두지 않는 것이죠. 오히려 자연을 등한시하면 순리에 역행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쵸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데 왜 인간은 그리도 자연을 파괴하며 모든 것을 소유하려 할까요?
-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원시시대때만 해도 자연의 변화에 두려워하던 존재가 이제는 자연을 통제하고 소유하려니 말이죠.
- 저는 이성이 인간에게 유익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갈수록 도구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죠.
잠깐만요, 여기서 스톱! 그런데 우리가 지금 말하는 이성이 마치 내 자신과 동떨어진 '인류의 이성'인 것 같아요. 전 여러분께 돌직구로 질문하고 싶어요. 자신은 과연 이성적인 사람인가요?
- 예술을 하는 저로서 감성이 풍부한 것은 사실이예요. 하지만 일반적으로 감성적이다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이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 그것이 착각이라고 봅니다. 예술활동도 굉장히 논리적인 체계가 있어야 완성이 되거든요. 감성이 있으면 이성이 부족하고 감성이 부족하면 이성적이고 그런 이분법적인 판단은 안했으면 해요.
동의합니다. 제가 미학을 공부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 예술을 뜻하는 'art'라는 단어는 '기술'이라는 뜻이예요. 기술은 예술을 기초하는 이성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술이 학문의 영역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단순하게 필(feel)로만 하는 것이라면 우린 예술교육을 할 수 없는 것이죠. 여기 베이스기타를 치시는 분도 있는데 기타를 친다는 것도 기술적인 부분이 분명 기초가 되지 않을까요?
- 그렇다면 이성이란 개념적으로 생각하는 능력 아닐까요? 감각적인 것과는 상대적이라 말할 수 있겠네요.
흔히 '직관은 점이고 논리는 선'이라는 말이 있어요. 즉 직관이란 순간에 발현되는 것이고 논리는 몇개의 점을 통과하며 순차적이고 인과적으로 논리를 쌓는 과정이죠.
- 전 영화를 보면서 많이 우는 편이지만(하하하) 사실 매우 이성적인 인간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방금 이성에 관해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나오네요.
-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이성이라고 생각하는, 정치적인 판단 즉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는 것은 '이성'이라고 할 수 없겠네요.
- 네 사기치는 사람을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 하하하(일동)
- 그쵸, 사기를 치고 자신을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이성이라기보다 본능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요?
- 그렇다면 이성이란 본능을 제어하면서 보다 합리적이고 선한것을 향해가는 능력이라 할 수 있겠네요.
- 듣다보니 얼마 전 제가 했던 착각이 떠오르네요. 전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실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감성과 이성의 공존에서 감성에 치우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자꾸 판단의 오류를 반복하더라구요. 제 딴의 이성적인 판단조차도 감성의 합리화가 아니었나 싶어요.
솔직히 전 우리 모두가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성'하면 '감성'의 반대말이고 감성을 배제하면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 이분법적 판단이 언어의 한계인 듯 합니다. 우린 여기서 공부하고 토론을 하며 진정한 '이성'의 의미를 깨닫고 있습니다. 감성-이성의 구도에서 벗어나 본연의 '이성'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의 경험없이는 도달할 수 없겠는 것이죠. 여기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라는 것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정치적인 사고가 아니라 무엇이 더 옳은 것인가 탐구하는 진리(선)를 쫓는 사고입니다. 즉 계산을 잘 하는 머리가 이성이 아니라 철학을 잘 하는 머리가 이성이겠죠?
- 그 말씀을 들으니 다시 한번 소크라테스의 말이 떠오릅니다. 당시의 정치가들의 '이성'은 공기님 말씀처럼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머리였을 것 같아요. 소크라테스는 "아 저런 것이 진짜 이성이 아니다." 안타까워하셨고 그 본연의 이성을 분리하고 찾고자... 노력했을 것 입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왜 '무지의 지'를 말했을까요?
- 지금 여기 우리도 '이성'을 논하면서 착각하고 있었던 것들을 많이 발견했잖아요. 그래서 그것들을 하나 하나 제거하며 진짜 이성이 뭔가 발견해가고 있잖아요. 이렇듯 인간은 스스로에게 속고있는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본인은 이성적인 판단을 했다고 믿지만 알고보면 감정이 개입되어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죠. 아까 건우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자신이 이성적인 판단을 했다는 착각...그래서 우린 끝까지 '나는 모른다'라는 입장을 고수해야 진짜 이성의 길로 나아가지 않을까요?
- 맞아요. 그 이성이라는 것이, 이성의 끝인 '진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소크라테스가 그것을 위해 죽었다면 정말 그것이 있겠구나! 나도 한번즈음 진리를 찾아봐야겠다...깨닫게 될 것 같습니다.
- 사실 전 매우 교만해서 다른 사람 말을 잘 듣지 않았던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의 문제를 인식하면서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했어요. 그것이 바로 <나는 무조건 틀렸다>라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점점 다른 사람 말에 귀기울이게 되더라구요.
전 소크라테스가 질문했던 것이 단지 정치가들을 조롱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금 우리가 하는 것처럼 서로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생각을 하게되잖아요. 즉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말할 수 없었지만 진리를 찾는 과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방안에 틀어박혀 자기 혼자 발견하고 우쭐대는 것이 아니라 거리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함께 찾고싶었던 것 아닐까요?
- 그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와 데카르트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네요. 둘 다 진리가 무엇인지 밝히지는 못했지만 방법적인 제시를 해주니까요.
그렇네요, 그럼 이제 데카르트 얘기좀 해볼까요? 데카르트의 키워드는 '의심'인 것 같아요. 여러분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의심이란 우리가 속고있는 환영을 인식하는 과정이 아닐까요?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을 다시 한번 재검증하는?
- 그 말씀을 들으니 이전에 읽었던 마루야마 겐지 작가가 쓴 책 <인생따위 엿이나 먹어라>라는 책이 떠오릅니다. 그 책을 보면 마루야마 겐지는 데카르트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가지고 있는 관념을 의심해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든지, '부모에 대한 효'라든지...
- 전 관념보다는 제 자신에 대해 많이 의심하는 편입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나는 온전한가? 그런 의심...
- 전 그 의심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자신을 너무나 과신하니까요.
- 예전에 봤던 영화가 떠오르네요. 실베스타스탤론이 나오는 감옥영화인데 스탤론이 어떤 남자를 응징하면서 그런 말을 해요.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하는 타락한 인간!"
- 아...왠지 저도 실버스타스탤론한테 맞을 듯. 저도 제 자신을 믿지 못해서...
아마 데카르트 역시도 자기 자신을 믿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최후에 내린 절대적인 공리가 고작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 잖아요. 그 말은 믿지 못하니까 의심하는 것이고 오직 의심할 때 온전하게 자신이 존재한다는 말이죠.
- 맞아요. 저도 제 아내에게 자식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도...정말 내가 사랑하나? 의문이 든 적이 많았거든요. 제가 잘못된게 아니군요. 오히려 그런 의심을 하는 것이 정상인 것 같습니다.
- 저는 감정은 파도와도 같다고 생각해요. 시시때때로 변하는...그래서 그것은 신뢰성이 없어요. 그럼에도 우리가 감정에 휘둘리는 이유는 개인에게 매우 절대적이거든요. 마치 태풍에 속수무책으로 휩쓸리는 것처럼. 남녀의 사랑도 감정의 파도이고 그 안에 빠져있으면 완전하게 믿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숱한 연애싸움이 있을 수 밖에 없죠. 서로 속았으니까. 사실은 상대방이 속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속인 것 아닐까요?
- 어쨋든 데카르트 형님처럼 스스로를 응시하는 태도는 참 좋은 것 같아요.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은 끝까지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거잖아요.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를 보지않고 타인을 보며 판단합니다. 네가 틀렸다! 하면서...전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지 않다보면 인간은 쉽게 타락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결국 '자신을 의심하는 것'은 '자신을 믿는 것'과 동일하다고 봅니다. 자신을 의심한다는 것은 자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니까요. 자 시간이 다되어서 우리 각자 오늘 어땠는지 나누고 마무리할까요?
- 정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요즘 제가 너무 외부에 의존했던 것을 깨달았어요. 한때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가족이나 친구도 완전히 절 도울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이제 나는 온전히 내 자신과 만나서 스스로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시간이 그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깨닫게 만들었어요.
-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모든 인간의 개별적인 작품을 인정하게 되면서 인간은 사조에서 해방되게 되었죠. 결국 삶이란 각자가 자신과 싸우는 시간의 예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의심과 믿음이 있겠죠. 이 모임을 여러분과 함께하면서 내 개인의 자신과의 전투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사람이 많아지니 참 좋네요. 풍성한 나무에 다양한 열매가 맺는 기분이 듭니다. 다양한 생각이 모이니 다양한 토론이 이뤄져서 좋습니다. 앞으로도 기대됩니다.
- 개인적으로 데카르트에 매우 관심이 많았는데 오늘 만나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어쩌면 근대철학의 시초시잖아요. 이성적으로만 생각하는 데카르트처럼 살고싶어요. 저도 데카르트처럼 묘비에 <영원히 살려고 한 바보가 오늘 죽다>를 남기고 싶습니다.
긴 시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크라테스처럼 데카르트처럼 우리 모두 항상 겸손하게 자신을 의심하며 존재하는 철학도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