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별일 없는 하루가 좋다

by 여운

아침에 눈을 뜨고 나서 제일 먼저 휴대폰을 켜고 스케줄표를 확인한다. 오늘 무슨 일이 있지? 일정이 있나, 처리해야 할 일이 있나, 혹시 빠뜨린 건 없나. 머릿속으로 하루를 훑어보다가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벌써 지루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없이 하루가 끝나면 하루를 알차게 보내지 않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제 다르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오늘 별일 없네. 다행이다.


어제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아이는 무사히 등원했고, 빨래는 무사히 끝났고, 저녁도 무난하게 지나갔다. 특별한 성과도 없고, 기억에 남을 이벤트도 없었지만 하루가 그럭저럭 지나갔다. 그리고 그날 밤은 마음이 편했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원하던 일상은 사실 이런 날이었다는 걸.


요즘은 다들 바쁘다. 바쁜 게 기본값이다. SNS를 열어보면 더 바빠진다. 누군가는 여행을 가고, 누군가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누군가는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 보고 있으면 나도 뭔가 해야 할 것 같고, 이대로 있으면 뒤처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괜히 일을 만든다. 안 해도 될 정리를 하고, 굳이 안 사도 될 걸 사고, 별일 없는 하루를 견디지 못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진짜 힘들었던 순간은 대부분 ‘별일이 많았던 날’이었다. 갑자기 일이 생기고, 계획이 틀어지고, 감정이 격해지는 날들. 반대로 별일 없는 날은 기억에 잘 남지 않지만, 몸은 훨씬 덜 지친다. 그러니까 행복을 ‘좋은 일이 많은 상태’로 정의하면 인생은 불안해진다. 금방 끝나버리니까.


행복을 “아무 일 없는 상태”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별일 없이 하루가 흘러가는 것. 계획한 대로 대충 돌아가고, 크게 어긋난 일 없이 끝나는 것. 이 기준으로 보면 생각보다 자주 행복하다.


이 상태는 그냥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냥 가만히 있다고 유지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아무 일 없게 만들기 위해서 해야 할 것들이 넘쳐난다. 장도 보고, 반찬도 만들고, 청소도 하고, 아이들 숙제도 챙기고, 남편과의 관계도 유지하기 위해 신경 써야 한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이 말은 일상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이미 충분히 바쁘고, 더 애쓰는 건 부담스럽다. 그래서 자꾸 미루고, 가끔은 그냥 지쳐버린다. 그렇다면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어떨까. 더 잘하려고 하기보다 현상을 유지하는 쪽으로.


완벽한 하루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대신 크게 흔들리지 않는 하루를 보내는 것. 아무 일 없는 하루를 하나씩 쌓아가는 것. 그게 결국 가장 현실적이고 오래가는 방식이지 않을까.


그래서 요즘 나의 목표는 단순하다. 특별한 하루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무사히 지나가는 것.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고, 그래서 더 충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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