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나를 몰랐으면 좋겠다.
아무도 나를 몰랐으면 좋겠다.
이 마음은, 사실 사라지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고 싶은 욕망에 더 가깝다.
내가 한 실수, 멍청한 말, 경솔했던 선택들이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지면 좋겠다는 생각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야”라는 조용한 항변이다. 그 항변은 변명이라기보다, 지금의 나와 그때의 나를 분리하고 싶은 마음이다.
“걔가 너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더라.”
이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내 안에 숨어 있던 가장 추한 얼굴을 알아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 문장은 정보 전달처럼 보이지만, 실은 관계의 중심을 잠시 내가 쥐고 싶었던 말이었다. 중립을 가장했지만, 나는 누군가의 말을 빌려 내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가장 아팠던 이유는, 내가 그렇게까지 불안했음을 알아차려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늘 나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었다. 적어도 남을 해치지는 않는 사람, 남의 자존감을 깎아내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걱정이라는 포장지로 덮인 질투, 배려처럼 보이는 말속에 숨은 비교, 무시하는 듯한 어조가 내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는 사실 앞에서, 그 믿음은 흔들렸다. 그 순간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죄책감보다 정체성의 붕괴였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어왔는데, 내가 믿어왔던 나보다 훨씬 못난 사람이라니.'
그때부터 나는 자꾸 과거를 지우고 싶어졌다. 모두가 나를 잊었으면 좋겠고, 내가 했던 말들도, 그 말이 남긴 여운도 함께 사라졌으면 했다. 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내가 지우고 싶었던 건 타인의 기억이 아니라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그 시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모습과 마주하는 불편함이 너무 컸다.
이간질은 잔인함의 증거라기보다, 불안의 언어다. 관계 안에서 밀려날까 봐, 덜 중요해질까 봐, 나 없이도 충분히 단단해 보이는 연결 앞에서 나는 서툰 방식으로 내 자리를 만들려 했다. 누군가를 깎아내려서가 아니라, 나를 조금이라도 끌어올리기 위해. 그건 비열한 계산이라기보다, 미숙한 생존 전략에 가까웠다.
중요한 건,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점이다.
내가 내뱉은 말들은 관계를 돕는 말이 아니라, 관계 위에 서려는 말이었다는 것을. 그 깨달음은 나를 무너뜨렸지만, 동시에 나를 멈추게 했다.
악한 사람이어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라, 자기 확신이 부족해서 그 말을 꺼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스스로의 자리를 믿지 못할 때, 사람은 타인의 관계를 흔들어 자기 자리를 확보하려 든다. 그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그 마음까지 부정하지는 않기로 했다. 부정은 반복을 낳고, 이해는 변화를 만든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이런 질문을 나에게 먼저 던진다.
“지금 이 말을 하면, 나는 잠깐 편해질까? 아니면 관계를 조금 더 왜곡시킬까?”
이 질문은 나를 완벽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적어도 같은 자리에 서게 두지는 않는다.
내 추악한 내면이 드러난 것 같아 흠칫 놀랐던 그 순간은, 사실 내가 나를 더 이상 속이지 않겠다고 결정한 순간이었다. 부끄러움은 성찰의 입구이고, 불편함은 성장의 증거다. 나는 여전히 실수할 수 있고, 여전히 불안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불안을 남의 자존감을 깎는 방식으로 처리하지 않으려 한다.
아무도 나를 몰랐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마음은 도망치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시 제대로 살고 싶어서 생긴 감정이라는 걸. 과거를 지우는 대신, 나는 선택한다. 이해하고, 책임지고, 다음 말을 조금 다르게 꺼내는 쪽을.
이 글은 나를 변명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나를 미화하기 위한 글도 아니다.
다만, 불안한 내가 어떤 선택을 해왔고, 이제는 어떤 선택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기록이다.
그리고 이 기록이 말해주는 건 하나다.
나는 변하고 싶어 한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글은 충분히 쓸 가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