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여유보다 더 어려운 건, 마음의 여유였다
나는 예전부터 ‘안목이 높은 사람’이 부러웠다. 같은 것을 보는데도 다르게 바라보고, 같은 공간에 있어도 분위기를 읽고, 상황에 맞는 선택을 자연스럽게 해내는 사람들. 누군가는 “그냥 센스지 뭐”라고 말하지만, 나는 늘 그 말이 조금 불공평하다고 느껴졌다. 마치 센스와 안목이 타고나는 것이라는 전제를 깔아놓고, 태어날 때부터 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이 ‘안목’이라는 단어가 단순한 미적 감각을 넘어 삶의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것을 알아보고, 선택하고, 누릴 수 있는 자신감. 그 세계 안에 당당히 서 있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그게 진짜 안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조금 생기고, 이제는 백화점에 가도 예전처럼 가격표를 보며 숨을 삼키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만은 여전히 예전의 나에 머물러 있을 때가 있다. 점원의 응대가 부담스럽고, 괜히 괜찮은 척해야 할 것 같은 기분. 고급스러운 공간에 서 있으면 “여기는 원래 이런 곳에 익숙한 사람들이 오는 거지, 나는 여전히 손님인 척하고 있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안목은 단지 ‘좋은 것을 아는 능력’이 아니라, ‘좋은 것을 누려도 된다고 자신을 허락하는 마음의 준거’라는 걸.
어쩌면 나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이런 걸 누릴 만큼의 사람은 아니야.”
“나는 이런 자리에 완전히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야.”
그래서 좋은 공간 앞에서, 아름답고 세련된 대상 앞에서, 나는 아직도 조금 쪼그라든다.
안목은 타고난 일부와, 길러지는 일부가 함께 만들어진다.
아이 때부터 좋은 것을 보고 자란 아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환경 안에서 자란 아이는 자연스럽게 ‘진짜 좋은 것’을 구별하는 감각이 자란다. 그건 단지 물건의 질을 아는 감각이 아니라, 삶의 질과 취향, 균형을 살피는 눈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환경에서 자라는 건 아니다.
나 역시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성인이 되어 ‘이제 나도 좀 안목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마음먹고 나서야 비로소 안목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이려 한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벽이 생긴다. 지갑보다는 마음의 벽.
나는 이제 돈으로 선택할 수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괜찮을까?”라고 묻고 있다.
나는 이제 경험을 살 수 있지만, 내면의 나는 아직 그 자리를 완전히 허락받지 못했다.
그때 문득, 아이들이 떠오른다.
나는 아이들에게 높은 안목을 물려주고 싶다.
좋은 것을 알아보고, 스스로 선택하고, 당당히 누리는 아이.
눈이 열려 있고, 감각이 깨어 있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낮추지 않는 아이.
그런데 엄마인 내가 여전히 주눅이 들어 있다면,
아이에게 진짜 안목이 자랄 수 있을까?
나는 요즘 안목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안목이란,
'좋은 것을 알아보는 눈 + 좋은 것을 누려도 된다는 자기 존중감 + 스스로 선택한 것을 지킬 수 있는 내적 기준'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건 사실 비싼 물건이나 고급스러운 경험이 아니다.
그건 수단일 뿐이고, 진짜는 ‘기준’이다.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떤 사람 옆에 설지,
어떤 공간을 좋아할지,
어떤 삶을 선택할지 결정할 때,
“세상이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것이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
누가 권한다고 따라가는 취향 말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취향.
그리고 그 선택 앞에서 위축되거나 변명하지 않는 당당함.
그게 진짜 안목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아이에게 안목을 물려주고 싶어서 좋은 곳을 보여주고, 좋은 것을 경험하게 하고, 더 나은 환경을 마련해주려 하지만, 정작 내가 쪼그라든다면 아이는 무엇을 배울까.
아이는 엄마의 말보다 엄마의 태도를 배운다.
엄마가 공간 앞에서 위축되는 걸 보면,
아이는 ‘저곳은 우리와 조금 거리가 있는 세계구나’ 하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이에게 안목을 물려주고 싶다면,
나는 먼저 나 자신을 허락해야 한다.
좋은 것을 누려도 되는 사람이라고,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이제는 더 넓은 세계에 발을 들여도 괜찮다고.
안목은 완성된 사람이 가져오는 결과가 아니라,
성장하고 싶은 사람이 선택하는 과정일지 모른다.
나는 여전히 배우는 중인 사람이고,
그러니 아이와 함께 자라나는 안목을 가지면 된다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건, 아이에게 완벽한 엄마가 필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계속 배우는 엄마, 계속 성장하려는 엄마, 세계 앞에서 위축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엄마, 그래도 다시 한 발 내딛는 엄마.
그런 엄마라면, 아이도 자연스럽게 배울 것이다.
안목은 위에서 떨어지는 유산이 아니라, 함께 걸으며 닦여가는 길이라는 걸.
나는 여전히 안목이 높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건,
“엄마는 원래 그런 세계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어”라는 모습이 아니라,
“엄마도 처음엔 어려웠지만, 그래도 배우고 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어”라는 서사일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보며, 아이도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좋은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고, 그걸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