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구(惡口)는 스스로를 태우는 불길과 같다

말이 사라진 뒤에도, 그 열기는 내 안에 남아 오래도록 마음을 그슬린다.

by 여운

가시로 나를 지키던 아이


나는 가난했고, 찌질했다. 내가 후지다는 사실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그 사실을 들킬까 봐 늘 긴장하고 살았다는 점이다. 가시를 세웠다. 형편없는 모습을 가리기 위해 말이 날카로워졌고, 표정이 굳어졌고, 먼저 찌르는 법을 배웠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말들로 나는 나를 지켰다. 그땐 몰랐다. 그것이 방어였는지, 공격이었는지. 다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더 작아질 것 같았다. 더 무시당할 것 같았고, 더 없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친구들 앞에서는 퉁명스럽고, 때로는 못되게 굴었고, 어른들 앞에서는 유난히 착한 아이였다. 가장 안전한 가면을 상황에 따라 골라 쓰는 법을, 나는 아주 일찍 배워버렸다.





착한 아이와 못된 아이 사이


어른들에게 잘 보이는 건 쉬웠다.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잘 듣고, 성적을 유지하면 됐다. 문제는 또래들 앞에서였다. 나는 그들처럼 자연스럽게 웃지 못했고, 부족함을 드러내는 법을 몰랐다. 그래서 대신 독한 말을 내뱉었다. 먼저 상처 주면 덜 다칠 거라고 생각했던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용기가 아니라 두려움이었고, 강함이 아니라 불안이었다. 어떻게 해야 좋은 사람이 되는지 몰랐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그저 ‘착하면 사랑받는다’는 공식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그래서 어른 앞에서는 착한 아이를 연기했고, 친구들 앞에서는 센 아이를 연기했다. 그렇게 나는 두 개의 얼굴로 자라났다. 그 둘 사이 어디에도 진짜 나는 없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부끄러움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그 시절의 말들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설거지를 하다 숟가락을 떨어뜨리며, 버스를 타다 창밖을 보며, 아무 이유 없이 얼굴이 화끈거린다.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갑자기 마음 한가운데가 뜨거워지듯 타오른다. 그때의 공기, 교실의 소음, 친구의 표정, 내가 던졌던 한마디의 톤까지 또렷하게 되살아난다. 마치 잊은 줄 알았던 장면이, 아무 예고 없이 마음속 서랍을 열고 튀어나오는 것처럼.


그때의 친구들은 아마 잊었을 것이다.(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해진다.) 누군가는 나를 스쳐 지나간 불편한 기억 정도로만 남겨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내가 뱉은 말, 내가 지은 표정, 내가 일부러 만들어냈던 거리. 나를 지키기 위해 세웠던 가시들이, 결국은 나 자신을 가장 많이 찔렀다는 사실까지. 그래서 아무 일 없는 일상 속에서도, 갑자기 마음이 움츠러들고, 손끝이 떨리고,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게 된다.


“악구(惡口)는 스스로를 태우는 불길과 같다”는 말이 왜 그렇게 오래 남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불은 상대를 아프게도 하지만, 가장 오랫동안 태우는 건 불을 품은 자기 자신이다. 남에게 던진 말이 사라진 뒤에도, 그 열기는 내 안에 남아 오래도록 마음을 그슬린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 불길의 잔열 속에서, 그때의 나를 떠올리며 고개를 숙인다. 너무 늦게, 너무 천천히, 하지만 분명히 깨닫고 있다. 그 시절의 말들이 남을 아프게 한 만큼, 나 자신도 오래도록 타들어 가고 있었다는 것을.





요즘 아이들, 그리고 요즘 어른들


요즘 아이들을 보면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갖고, 훨씬 많은 자극 속에서 산다. 비교는 더 빠르고, 평가도 더 즉각적이다. SNS, 단체 채팅방, 학원 성적표, 팔로워 수. 누군가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이미 ‘순위’와 ‘반응’이라는 언어에 익숙해진다. 말보다 이미지가 먼저 오고, 관계보다 평판이 먼저 도착한다. 마음을 주고받기 전에 스스로를 진열하고, 존재를 설명하기 전에 점수를 매기는 세상이다. 나의 가시는 가난에서 왔지만, 요즘 아이들의 가시는 결핍이 아니라 과잉에서 만들어지는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기준, 너무 빠른 비교, 너무 이른 서열화. 그 안에서 아이들은 너무 일찍 자신을 판단하는 법을 배우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먼저 무장을 한다. 말이 세지고, 표정이 굳고, 농담 속에 날이 선다. 웃고 있지만 마음은 늘 긴장 상태다.


그리고 가만히 보면, 어른들도 다르지 않다. 회사의 성과표, 연봉, 집, 차, 아이의 성적, 팔로워 수, 남들과 비교되는 삶의 속도. 우리는 아이들에게 비교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정작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를 줄 세운다. 아이들은 어른의 세계를 축소판으로 배운다. 그러니 아이들의 가시도, 어른들의 가시도 결국 같은 뿌리에서 자란다. 다만 표현되는 시기와 모양이 다를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 다른 이유로, 같은 방식으로 상처를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린이는 너무 일찍 방어를 배우고, 어른은 너무 늦게 내려놓는 법을 배운다. 그래서 세대는 다르지만, 마음의 긴장은 닮아 있다.





내가 이제 와서 알게 된 것


어릴 때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착하고, 인정받고,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감정을 어떻게 말로 풀어야 하는지, 불안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부끄러움과 열등감을 어떻게 안고 가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다. 울고 싶을 때 울어도 되는지, 화가 날 때 어떻게 표현해야 상처를 덜 남기는지,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으면서 성장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가장 쉬운 방법을 택했다. 공격하고, 가면을 쓰고, 강한 척하는 것. 상처받지 않기 위해 먼저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나를 지켰다.


이제야 조금씩 세상의 이치를 배워간다. 좋은 사람이라는 건, 완벽하게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늘 바르고 고운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어두움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못난 마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차리고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이 성장이라는 것. 나쁜 생각이 들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 생각에 끌려가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이 어른이라는 것. 감정이 없어서 평온한 게 아니라, 감정이 있어도 그것에 삼켜지지 않는 힘이 생긴 상태가 성숙이라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과거의 나를 부끄러워만 하며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나를 이해하는 것이 앞으로의 나를 바꾸는 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가시 돋친 말 뒤에는 늘 겁이 있었고, 공격적인 표정 뒤에는 늘 불안이 있었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나는 나 자신에게 조금 부드러워질 수 있었다.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건, 갑자기 성격이 바뀌는 일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바라보는 연습이라는 걸, 나는 아주 늦게, 그러나 분명하게 배우고 있다.





아직도 배우는 중인 나에게


나는 여전히 어리석고 찌질한 어른이다. 여전히 순간적으로 날이 서고, 여전히 마음속에서 비교하고, 여전히 스스로를 방어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예전보다 부드러워졌다고는 해도, 상처받을까 봐 미리 벽을 세우는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은, 그걸 모른 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전처럼 “괜찮아, 별일 아니야”라며 덮어두지 않고, 내 안에서 가시가 솟아오르는 순간을 알아차리는 시간이 짧아졌다. 내 안에 남아 있는 그 가시를 보며, 이제는 이렇게 말해준다. “그땐 네가 너무 작고 무서웠구나.” 그 아이를 혼내는 대신, 이해해 주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이 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상처받지 않는 방법만 급하게 배워버린 아이였으니까. 그래서 그 아이를 혼내기보다, 천천히 등을 두드려 주듯 마음속으로 달래본다. 그래도 괜찮다고, 이제는 조금씩 다른 선택을 배워가고 있다고.


언젠가 우연히 그 시절의 친구들을 다시 만나게되는 장면을 그려본다. 한걸음에 달려가 정말로 두 손을 꼭 잡고 말하고 싶다. 그땐 몰라서 그랬다고, 다정해지고 싶었는데 방법을 몰랐다고, 사실은 잘 지내고 싶었다고. 서툴고 겁 많았던 아이의 마음을 솔직하게 꺼내 보이며,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늦었지만 고맙다고 전하고 싶다.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어도, 적어도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고, 그렇게 조심스럽게 고백하고 싶다.





불길을 끄는 법


불은 불로 끌 수 없고, 가시는 가시로 뽑히지 않는다. 더 센 말로 맞서고, 더 날카로운 태도로 방어한다고 해서 상처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의 나는, 누군가의 말이 유난히 따갑게 느껴질 때 예전처럼 즉각 반응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 말 뒤에 있을지도 모를 사정을 먼저 떠올린다. 마음에 여유가 없나 보다, 오늘 많이 지쳤나 보다, 어쩌면 스스로를 지키느라 가시를 세우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화가 조금 누그러진다. 상대의 말이 더 이상 나를 향한 공격으로만 들리지 않고, 그 사람 안에서 타오르고 있는 작은 불길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불길이 결국 가장 먼저 태우는 것은, 그 말을 뱉는 사람 자신이라는 것을 안 언젠가 나처럼, 그도 설거지를 하다 문득 얼굴이 뜨거워지고, 버스를 타다 이유 없이 마음이 저려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불을 불로 끄지 않기로 한다. 차갑게 맞받아치기보다, 속으로 한 번 더 말해본다. “지금 많이 힘든가 보다.” 이해는 상대를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나를 지키는 선택이기도 하다. 과거의 부끄러움 덕분에 얻은 가장 큰 선물은, 날카로운 말 뒤에 숨은 두려움을 조금은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시선을 갖게 되자, 불길은 더 이상 번지지 않고, 조용히 잦아든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불길을 끄는 법을 연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