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지 못한 물건이 만드는 위험과 관리비
아이의 열이 오르던 어느 아침이었다. 약상자를 열었는데 해열제가 여러 개 있었다. 그런데 어느 것도 선뜻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언제 개봉했는지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집에 갖춰둔 상비약의 ‘양’이 안전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오히려 판단할 시간을 늘리고 선택을 망설이게 만들 뿐이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약이 아니라, 지금 써도 되는 정확한 약이었다.
요즘 부모들은 늘 대비한다. 혹시 모를 상황을 생각해 약을 쟁여두고, 언젠가 쓸 것 같은 장난감과 교구를 들인다. 이 사회는 ‘미리 준비하는 부모’를 책임감 있는 부모로 칭찬한다. 하지만 과잉된 대비는 비용을 숨긴다. 유통기한이 지난 약, 고장 난 장난감, 오염된 물놀이 용품은 더 이상 자산이 아니다. 관리되지 않는 대비품은 안전을 높이기보다 위험을 쌓는다. 대비와 과잉 대비의 차이는 결국 관리 가능성에 있다.
버리는 일을 미루는 이유는 늘 비슷하다. 아깝고, 바쁘고, 마음이 불편하다. 하지만 아이가 있는 집에서 미루는 선택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비용의 문제로 돌아온다. 이 비용은 가계부에 적히지 않는다. 대신 사고 예방 비용, 스트레스 비용, 판단 피로라는 형태로 쌓인다. 경제적으로 보면 명확하다. 유지비가 기능을 넘어서는 순간, 폐기는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래서 정리는 감정이 아니라 기준의 문제다. 기준이 없으면 모든 물건이 애매해진다. ‘지금 안전한가’, ‘지금 쓰이는가’, ‘지금 관리되고 있는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물건은 공통된 특징을 가진다. 즉시 효용은 없고, 관리 부담만 남는다. 냉장고 속 정체불명의 소스, 현관에 쌓인 무료 사은품, 짝 잃은 양말과 작아진 신발이 그렇다. 이때의 비움은 손해가 아니라 손실을 멈추는 것이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