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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BADA Sep 20. 2015

마지막 개화

소설사진 : 한 장의 사진으로 들려주는 조금 특별한 이야기 / 018






마지막 개화




바투 자른 머리 때문인지, 그녀는 얼핏 남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고운 선은 분명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의심치 않게 했다. 덕분에 레이디에게 실례하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따듯한 차를 그녀 앞에 내려놓으며 남자는 입을 열었다. 


“레이디······. 어······.”


“플로라 헤일로 센테리아 젠킨스 라고 해요.”


심지어 귀족이기도 했다.


“아. 레이디 젠킨스. 이 엉망진창인 마을에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냥 플로라라고 불러 주세요. 어반 마이스터. 그리고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다른 사람들과 같답니다.”


“하하하. 어반 마이스터라.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군요. 이런 곳을 관리 하는 입장에서는 루럴 마이스터가 더 어울릴 듯 합니다. 플로라 양.”


플로라는 씁쓸한 미소를 띠우며 조금 긍정했다. 하지만 위대한 도시의 설계자이자 건축자, 그리고 관리자였던 남자에 대한 호칭으로 루럴 마이스터는 농담이나 마찬가지다.


“폐하께, 섭섭하지 않으신가요?”


“제 이야기가 지금 이 자리의 주제가 될 줄은 몰랐군요. 플로라 양. 어차피 저는 쓸모가 다 되었습니다. 목숨이나마 건질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 지나간 일이고, 이곳에서의 일도 만족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도시, 지상의 낙원, 황제의 성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수도 카르디아카를 만든 사람에게는 유배와 같은 생활이겠지만 그의 얼굴에 아쉬운 빛은 없어보였다.


“그런데 플로라 양. 이 먼 곳을 혈혈단신으로 찾아 온 이유가 정녕 평화平花를 찾기 위해서 입니까?” 


플로라는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의 연약한 두 다리로 평생 한번 본 적 없는 미친 폭설을 뚫고 와야 했다. 그래서 이 위대한 남자를 상대하기에는 충분히 차분해지긴 어려운 상태였다. 그래서 일부러 그의 이야기를 먼저 시작한 것인데······. 


플로라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콜록, 콜록.”


오랜 시간 매섭도록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셔 기도가 수축할 때로 수축된 플로라는 따듯한 차 한 모금에 마치 사례가 들린 것처럼 기침을 해댔다. 


“이런 플로라양. 차가 너무 뜨거웠나 보군요. 그러고 보니 험한 길을 오셨을 텐데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했군요. 일단 몸 좀 녹이시고 쉬십시오. 라이징 시티에서 오신 손님인데,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라이징 시키는 어반 마이스터가 카르디아카를 스스로 부르는 애칭이었다. 카르디아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도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플로라는 자신의 연기가 제대로 먹혔는지는 확신 할 수 없었다. 그냥 저 사람 좋아 보이는 어반 마이스터가 자신을 배려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든 아니든, 플로라는 시간을 벌었고, 그 시간 동안 최대한 차분해 지기로 했다.          






“마음의 안식을 얻는 꽃을 구해 오라는 령은 태녀전하를 위한 것이지요.”


“네. 워낙 꽃을 좋아하셔서. 하지만 그 어떤 꽃으로도 심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이 촌부은 -루럴 마이스터 보다는 촌부란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해서 저는 저를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한 참 바쁜 시기를 보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왔었겠지요.”


“네. 씻을 수 없는 죄인은 물론, 역적의 가족, 내지는 개인의 영달을 꿈꾸는 자들까지. 이 오지를 수없이 드나들었지요.”


“······.”


“얼마 전까지는 말입니다.”


“겨울에는 찾기 힘든 곳이니깐요.”


“맞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무척 즐거웠던 참입니다.”


“죄송합니다. 마이스터.”


“아니요. 플로라 양. 복잡하고 시끄럽고, 난잡하기까지 한 불의의 방문은 유배 생활을 하는 저에겐 황명을 어지럽히는 일이지만 한 두 명의 예의를 아는 자의 방문은 도리어 기쁨입니다. 더욱이 이렇게 사람 구경하기 힘든 계절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지요.”


플로라의 눈에 이채가 스쳐갔다. 과연 그가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 줄까?


“아직 태녀전하의 심병이 나았다는 가음佳音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저에게도 아직은 기회가 있지 않나하고 무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껄껄걸. 괜찮습니다. 시커멓고 울퉁불퉁한 사내들만 찾아오다가 플로라 양과 같이 예의를 아는 레이디가 방문하시니 저는 즐겁기까지 합니다. 헌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플로라 양은 폐하께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그 유명한 마이스터의 질문. 평화平花를 얻으려는 자들이라면 누구나 겪었다는 바로 그 질문. 그리고 아직 태녀의 심병이 낫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마이스터의 질문에 정답을 내놓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플로라는 어제 어반 마이스터와의 대화를 피하길 원했다. 소문으로만 듣고 알고 있던 그를 직접 보고 느껴보지 않은 이상 잘못된 대답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문과는 달리 어반 마이스터는 상대를 보자마자 그 소원의 진정성을 밝혀내어 옳고 그름을 따져 상대를 물리치는 그런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플로라는 조금 안심을 했다. 그리고 진심을 이야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그것도 일종의 노림수일지도 모른다. 위대한 도시를 설계하고 만들었으며 철저하게 관리하던 자의 세심하고 꼼꼼한 계략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여지 것 이곳을 방문은 수많은 사람들이 평화는 구경도 못하고 돌아 올 수 있었을까? 그래서 플로라는 여전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37년의 난을 여전히 기억하십니까?”


어반 마이스터의 눈에 이채가 스쳐지나갔다. 어떻게 그것을 잊을 수 있었겠는가. 거의 성공할 뻔한 반역이었고, 그 때문에 어반 마이스터는 유배를 오게 되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진짜 평화平花가 있었다면 저도 그 꽃의 덕을 좀 보고 싶을 지경입니다.”


그리고 어반 마이스터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플로라는 경악으로 두 눈을 크게 떴다.


“평화平花가······. 없다고요?”


어반 마이스터는 자신 앞에 놓인 투박한 찻잔을 들어 올려 입가로 가져갔다. 입술이나 살짝 적셨을까? 다시 탁자로 내려온 찻잔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지그시 바라보던 어반 마이스터는 혀로 입술을 한번 훔치고는 대답했다.


“폐하의 령이 있은 후 수많은 사람이 이 오지를 찾아왔습니다. 그런 게 있었으면 벌서 누군가 꺾어 갔겠지요. 플로라 양.”


어반 마이스터의 말엔 진심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믿질 못하겠다. 만약 평화平花가 없었다면 과연 그 많은 -간절함을 가진- 사람들이 죽음도 무릅쓰고 이 오지를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플로라의 표정엔 그런 의구심이 가득히 드러났다. 그 표정을 본 어반 마이스터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플로라에게 말했다. 


“플로라 양.”


“네······. 마이스터.”          

   

“솔직히 말 해 보겠습니다.”


플로라는 갈망에 찬 눈으로 어반 마이스터를 바라봤다.


“평화平花가 있었다면, 그리고 그 꽃이 어디에 있는지 제가 알았다면 저 역시 그 꽃을 꺾어서 폐하께 진상을 하였을 겁니다. 비록 담과 철창은 없지만 저도 영어의 몸인지라 말입니다.”


“아!”


그제야 플로라는 어반 마이스터의 말이 진심이었음으로 알 수 있었다. 사실이 그랬다. 그렇지 않은가? 어반 마이스터 역시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죄인이었다. 그가 만약 평화平花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면 당연히 그도 그 꽃을 꺾어 황제에게 진상을 했을 것이고, 자신의 자식이나 다름없는, 그토록 사랑하는 위대한 도시 카르디아카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 전 플로라 양은 37년의 난을 기억하냐고 물었습니다. 왜지요?”


잠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던 플로라는 어반 마이스터의 물음에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37년의 난 때 도망갔던 반역자 테슬라가 지난 달 잡혔습니다.”


“정말입니까!?”


어반 마이스터는 테슬라가 잡혔다는 플로라의 말에 반색했다. 어찌 기쁘기 아니하겠는가. 자신이 유배를 온 이유도 테슬라란 작자가 위대한 도시의 허점을 노리고 황궁까지 무혈입성한 일 때문이었다. 때문에 어반 마이스터는 위대한 도시를 설계하고 만들었으며 관리를 해 오던 책임을 물어 오지 중의 오지인 이곳 검은산에 유배를 오게 된 것이다. 


“그렇습니다. 마이스터. 그리고 37년의 난 때 반란군의 더블원 센츄리온이었던 제 약혼자는 생포되었습니다. 하지만 테슬라를 추포하지 못한 상황에서 반락군의 고급 장교를 처형 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테슬라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선 가장 필요한 존재였으니까요. 그리고 제 약혼자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진 고문에도, 같이 잡혀온 가족들의 죽음에도 그는 절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목숨을 유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테슬라가 잡혔군요.”


플로라의 눈에 순간 물기가 가득해졌다.


“조만간 대대적인 공개처형이 있을 겁니다······.”


어반 마이스터는 플로라가 처한 상황을 알 수 있었다. 평화平花를 구해오면 어떤 소원도 들어 준다는 황제의 령이 있었으니, 반역자의 수괴까지는 아닌 그녀의 약혼자는, 플로라가 그 꽃을 진상하면 충분히 사면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정녕. 평화平花는 없습니까······?”


어반 마이스터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제와는 달리 폭설과 매서운 바람이 그쳤다. 밤 새 별과 달이 보일 정도로 청정했던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던 때는 플로라가 어반 마이스터가 살고 있는 오지를 떠나려 할 때였다.


“하늘을 보니, 하루 더 있다 가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플로라 양.”


“아니요. 전 매서운 바람과 폭설로 길도 끊긴 이곳을 찾아 왔습니다. 저 정도 먹구름이면 감사할 따름이죠. 빨리 위대한 도시로 돌아가 제 약혼녀의 구명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반 마이스터는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플로라는 그 미소에 어떤 의미가 있음을 짐작했다. 


“아니요. 플로라 양. 내일쯤 제가 보여 드릴 것이 있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다음 날.


어정쩡한 먹구름은 밤새 폭설 대신 포근한 함박눈을 한참 쏟아 부었다. 마치 플로라를 위로라도 하고 있는 양, 소곤소곤 폭신폭신하게도 내리는 함박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늦게 잠이 든 플로라는 어반 마이스터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마치 봄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 겨울의 추위가 없었다면 따사로운 봄이라 생각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날이 개었습니다. 해가 좋긴 하지만 밖은 여전히 춥습니다.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저를 따라오세요. 플로라 양.”


플로라는 의아함과 묘한 기대감을 안고 어반 마이스터를 따라나섰다. 그의 말처럼 햇살은 따듯했지만 기온은 매우 낮았다. 다행인 것은 그 둘이 꽤나 조화롭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플로라는 두꺼운 외투를 벗어도 될 것만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어반 마이스터는 플로라를 이끌고 한 시간이 넘게 아랫마을을 향해 걸어갔다. 플로라는 어반 마이스터를 따라가는 것만 해도 힘이 부칠 지결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마을 입구에 도착했고, 둘은 안쪽 깊숙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플로라는 그를 따라가면서 이상한 것을 느꼈다. 


“마을 주민들은······?”


“여름에도 사람이 살기 힘든 이곳은 1년에 딱 1개월만 주민들이 들어옵니다. 주민이라고도 십여 명이 전부지만 말입니다. 오래 전 3일 전쟁이 터지기 전에는 이곳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고 합니다만······. 여하튼, 검은 산에는 귀한 약초들이 많으니 어떻게든 사람의 발길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푹푹 빠지는 눈들을 헤치며 두 사람은 주민이 떠난 거의 폐허가 된 마을을 가로 질렀다. 다행인 것은 해가 머리위로 올라갈수록 바닥에 쌓인 눈들이 녹고 있다는 것이다. 


"다 왔습니다.“


그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어느 집의 바깥이었다. 담도 없이 몇 집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지만, 건축양식이 독특했다. 


“3년 전쟁 이전에 사람들이 살았던 집들입니다.”


어반 마이스터가 입을 열었다. 


“80여 년 전 전 세계가 딱 3일 만에 불바다가 되었다던 그 전쟁에서 우연찮게 이 집들은 살아남았다더군요. 그리고 귀한 약초를 찾는 주민들이 이 오지를 찾았을 때 잠시 몸을 의탁하는 건물들입니다.”


플로라는 이채로운 눈으로 그 집들을 바라봤다. 80년이 넘은 허름해 보이는 집. 어떻게 보아도 백년을 버틸 수 있는 그런 집들이 아니다. 심지어 3년 전쟁을 겪었던 것을 감안하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놀랍군요. 3년 전쟁을 격고도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어반 마이스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사람이 살기 때문이지요.”


“네?”


“물론 이 집들도 3년 전쟁으로 인해 대부분 파괴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1년에 딱 1개월이지만 이곳에 들어와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지요. 그들은 집을 새로 짓는 것보다는 이 집들을 수리하여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오지에서 집을 지을 재료는 살아있는 나무 밖에는 없지요. 그러니 쓰러진 집이라도 수리해서 사용 할 수밖에요.”


플로라는 이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반 마이스터가 자신을 이곳까지 데리고 온 이유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플로라 양. 저기 저 마른풀이 보입니까?”


어반 마이스터가 가리키는 곳에는 한때는 소담한 꽃을 피웠을 법한 일군의 풀들이 포근하게 대지를 덮은 하얀 눈 위로 아슬아슬하게 서있었다. 한 폭의 그림과 같은 모습. 심지어 어제 내린 함박눈이 마른 풀의 머리위로 소복이 내려 앉아 얼핏 목화를 보고 있는 듯 했다.


“평화입니다.”


“······!”


플로라의 두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고, 어반 마이스터는 예의 그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평화平花가 아니라 평화平和입니다.”


잠시 두 눈에 이채를 띠며 어반 마이스터의 말을 듣던 플로라는 급격히 심란해 졌다.


“네?”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평화平花가 없다고 믿지 않습니다. 물론 속세의 소문으로 나도는 그런 마법과 같은 꽃이 실재 한다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 꽃을 보십시오. 일 년에 한번, 개인의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딱 한 달을 기거할 곳에 집을 세우고, 청소를 하고 꽃을 심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미련 없이 떠나고 다시 시간이 흐른 뒤 이곳을 찾아 집을 고치고, 청소를 하고 다시 꽃을 심습니다. 플로라 양. 

더욱이 사람의 노력에 자연은 이미 꽃을 피울 수 없는 저 마른 풀에도 하얗고 탐스러운 눈꽃을 피우게 하지요. 아쉬움을 위로하는 마지막 개화. 저는 그것이 평화平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지막 개화 ㅣ 2013, 미발표 ㅣ F2.8, S 1/400, ISO 160ㅣ 프린트 사이즈 미지정 ㅣ Original Print. 1/? ㅣ Estate Print ∞







그날, 플로라는 허름한 집 벽 아래 하얀 눈꽃을 피워낸 이름 모를 꽃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그래서 어반 마이스터는 조용히 자신의 유배지로 돌아왔다. 이튿날,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플로라는 어반마이스터가 유배를 보내고 있는 오두막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아마 그대로 위대한 도시로 떠났을 것이다. 이후 플로라가 어떻게 행동 할지는 어반 마이스터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어반 마이스터가 암시한대로 그녀가 평화平和를 찾았다면 약혼자의 일을 슬픔으로 받아 드렸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분노로서 자기 자신을 좀먹어 갔을 것이다.


어반 마이스터는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집어 들었다. 아직 한모금도 마시지 않은 찻물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외투를 잘 챙겨 입은 어반 마이스터는 곧장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그제 플로라를 데리고 내려갔던 반대방향으로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그쪽은 검은 산의 약초꾼들도 찾지 않은 곳이었다. 워낙 험할뿐더러 곳곳에 독을 품은 늪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한 때 유배를 온 뒤 어반 마이스터는 차라리 죽을 생각을 하고 이곳을 찾았던 적이 있었던 곳이다.


한 3시간쯤 검은 산을 올랐다. 한발 한발이 거침이 없었다. 위대한 도시를 설계하고 건설했으며 관리를 하던 어반 마이스터의 기억력은 일반인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처음 이곳을 찾았던 때와 한발자국도 다르지 않게 걸어갔다. 


그리고 어반 마이스터는 평화平花앞에 설 수 있었다. 평화가 있는 곳은 눈으로도 덥혀있지 않았다. 아니, 눈이 내리긴 했어도 평화平花의 영향력으로 들어서면 그대로 녹아 생명수가 되어 버린다. 때문에 이 엄동설한에도 평화平花의 주위로 온갖 희귀한 식물들이 자라나 있었다. 그리고 평화平花는 어반 마이스터의 방문에 환한 빛을 뿌리며 반겨왔다. 


어반 마이스터는 수많은 사람들이 평화平花를 찾아 이 검은 산으로 들어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일전에 죽기 위해 이곳을 헤매다가 발겨한 평화平花로 인해 어반 마이스터는 구원을 얻었다. 그리고 황제에 대한 원망이나 복수심, 자신을 갈아먹는 이성의 좀과 같은 불안감을 모두 떨쳐낼 수 있었다. 평화平花는 바로 평화平和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온갖 잡다한 이유와 사심을 가지고 평화平花를 찾아 이곳으로 왔고, 어반 마이스터는 그때마다 평화平花를 잃을까봐 걱정을 했다. 그 때문에 자신을 죽음으로까지 몰고가던 예전의 불안함이 다시 엄습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마다 어반 마이스터는 평화平花를 찾아왔다. 그리고 다시 평화平和를 얻었다.

한참동안 평화平花를 보고 모든 불안감을 내려놓은 어반 마이스터는 검은 산을 내려오기 전에 위대한 도시가 있는 방향을 향해 나지막이 읖조렸다.      


“플로라 양. 당신이 만약 이 평화平花를 보았다면 아마, 당신의 약혼자의 일은 모두 잊고 이곳에 남으려 했을 것이오. 그러니, 부디, 나를 원망하지는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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