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의 천하통일 비책
군사학에서 천재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누굴까? 서양사에서는 한니발, 나폴레옹 등이 있을 것이다. 동양사에는 한신, 이순신 등이 떠오른다. 하지만 동양 군사학의 천재에는 워낙 독보적인 존재가 한 명 존재한다. 이 사람의 출신인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까지 상당한 인기를 끄는 사람이다. 현재까지도 전략가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단연 이 사람이다. 오늘날에도 머리가 좋은 사람들의 별명을 지을 때 항상 이 사람을 빗대서 표현한다.
바로 동양 최고의 전략가이자 소설 '삼국지연의'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제갈량이다.
이 중에서도 이번에 소개할 이야기는 제갈량이 촉나라 재상으로 6년간 진행했던 북벌에 관한 이야기다.
제갈량의 북벌 전략은 전쟁사를 논하는 데 있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제갈량이 북벌 당시 상대해야 했던 국가는 위나라였다. 당시 정세를 보면 위나라는 중국 중심부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강대국이었으며 촉나라는 진령산맥 넘어 파촉에 위치한 상대적 약소국이었다. 제갈량은 약소국 위치에서도 놀라운 성과를 발휘하며 위나라를 위협했다. 소설 삼국지의 기간 중에서도 가장 군사적, 전략적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바로 북벌 시기다.
두 번째로, 드라마적인 요소다. 제갈량이 모셨던 유비가 죽고 그의 아들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리고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로 향했다는 점. 유비가 끝내 이루지 못한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홀로 남아 싸운 점. 자신이 유비에게 직접 언급한 ‘천하삼분지계’의 마지막 마침표. 그리고 위나라에서 제갈량을 막기 위해 나온 사마의와의 라이벌리. 이런 점들이 역사적 사실에 더욱 재미를 더해준다.
북벌에 대해 소개하기 전 이해를 위한 기초 역사 순서에 대해 알아보자.
189년 9월 22일: 십상시의 난 발생. 동탁의 정권 장악 및 중앙 지배권력 약화, 군웅할거 시작.
한나라 말기 지배층과 귀족의 부패와 황건적의 난으로 한나라 황실의 권력이 크게 악화되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한 황제 영제는 정치에 크게 관심이 없었고, 환관 중심의 정치가 시작된다. 보다 못한 대장군 하진은 원소, 조조를 비롯한 청류파 인사들을 동원해 십상시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계획하는데, 밀고자가 나와 오히려 하진이 목숨을 잃는다. 화가 난 청류파 인사들이 십상시까지 제거하자 중앙 권력을 공석이 되는데, 그 틈을 병주자사 동탁이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입성해 권력을 차지한다. 동시에 중앙 권력이 약화되고 전국 각지의 군웅들이 군대를 이끌고 세력 확보에 중점을 두기 시작한다.
195년 8월 경: 헌제의 탈출 수도 장안성 탈출 사건, 조조의 권력 장악
동탁과 그 뒤를 이은 이각, 곽사의 폭정을 참다못한 한 황제 헌제가 수도 장안성을 버리고 도주한다. 소식을 들은 대표적 반동탁 인사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헌제를 구출하고 이각, 곽사 군대를 몰아낸다. 이후 승상에 오른 조조는 중앙 권력을 이용해 지방 세력들을 정복해나간다. 207년경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원소의 세력을 흡수하여 양자강 이남과 서량 지방을 제외한 중국 전토를 자신의 세력권 안에 두는 데 성공한다.
208년 11월 경: 적벽대전 발발. 조조의 천하통일 야욕 저지
형주와 동오 지방의 지배권을 위해 조조의 대규모 병력이 양쯔강 이남 지역에 주둔한다. 형주의 유비와 동오의 손권이 연합하여 조조의 대군을 적벽에서 저지한다. 조조는 천하통일의 문턱 앞에서 좌절하고 잠시 후퇴하고 중앙 권력 강화를 위해 위왕에 오른다. 그 사이 형주의 유비는 진령산맥 이남의 서촉 지방의 지배권을 확보한다.
221년 7월 : 이릉대전 발발. 위-촉-오 삼국의 성립
형주 공방전 도중 유비의 동생 관우가 오나라의 포로로 잡혀 목숨을 잃게 되자. 촉나라의 유비는 이에 대한 복수심으로 오나라에 대한 대대적 원정을 준비한다. 비슷한 시기에 위나라의 조조가 죽고 그의 아들 조비가 헌제로부터 선양을 통해 위나라 초대 황제에 오른다. 유비 역시 이에 대항하여 촉한 황제에 오른다. 촉나라 대군이 오나라 정복을 위해 출전했으나 이릉에서 대패한다. 촉나라 승상 제갈량의 노력으로 양국은 다시 우호관계를 다져 위 VS 촉-오 동맹 구도를 성립시킨다. 곧이어 223년 초나라 초대 황제 유비가 사망한다.
여기까지가 제갈량의 북벌 이전에 알아두면 좋은 역사적 사실이다. 아마 삼국지를 단 한 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너무 익숙한 이야기일 것이다. 상당한 압축을 통해 설명한 정보다.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는 매우 각별했다. 이는 아마 대부분의 한국인들의 너무 잘 아는 사실일 것이다. 유비는 군웅할거 시기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중국 전역을 돌아다니는 행락객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 힘이 되어준 것이 제갈량이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형주를 기반으로 서촉 지방을 차지하고 동오의 손권과 손을 잡아 조조를 정복하는 천하삼분 지계 전략을 언급해주었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를 언급한 이유는 유비가 독자적으로 세력을 구축해 조조에게 대항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제갈량이 유비의 세력에 합류한 207년경은 조조의 세력이 정점에 오른 상태였다. 당시 조조는 원소의 세력을 이제 막 흡수하고 서량과 장강 이남의 지역을 제외한 모든 세력을 흡수하는 데 성공한다. 당시 서량과 장강 이남의 지역은 중구의 변방과도 같은 곳이었기에 중요한 지역은 조조가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유비는 제갈량의 계책을 적극적으로 채택하여 형주 지방에 기반을 세운 후 동오의 손권과 손을 잡아 조조의 남정을 적벽에서 저지시킨다. 조조의 군대가 적벽에서의 패전에 허덕이는 사이 군대를 이끌고 서촉을 정벌하여 제갈량의 삼분지계를 성공시킨다. 이후 관우의 형주 공방전 패배로 위나라와 오나라에게 형주 지방을 잃게 된다. 다행히 수비하기 용이한 서촉에 기반을 다진 유비는 오나라와 다시 연합하고 위나라를 견제하는 전략을 택한다. 다만 제갈량이 판을 완성하자마자 유비는 이릉대전의 패배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이제 촉나라의 기둥은 제갈량 혼자 남은 것이다. 물론, 유비의 아들이자 촉나라 2대 황제 유선이 있었으나 그는 천하통일을 이룩할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다. 촉나라 승상 제갈량은 우선 유비, 관우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한 곳곳의 반란을 잠재워야 했다. 반란 세력 중 가장 큰 세력은 월수군과 익주군의 고정, 옹개의 난이었다. 이들은 남만의 지도자 맹획과 연합하여 촉나라를 위협했다. 제갈량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내려가 고정과 옹개를 죽이고 맹획에게 항복을 받아내 반란을 잠재우는 데 성공한다.
남만을 손에 넣자 이제 후방의 위협도 사라졌다. 이제 자신이 세운 천하삼분지계에 대한 마침표를 찍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향한다. 제갈량의 북벌이 시작되었다.
P.S.
최대한 정사 삼국지를 기반해 작성했으나 서기 200년대의 자료가 희박해 작가의 해석과 '삼국지연의'의 스토리를 포함되었습니다.
당대 인물들에 대한 이미지 자료가 희박하여 '코에이(KOEI)'사에서 개발한 '게임 삼국지' 시리즈의 이미지를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