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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별행자 Oct 20. 2021

나는 33살, 내 안의 내면아이는 6살

  내가 내면아이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교회에서였다. 그때 나는 남편과의 갈등으로 너무나 힘들었고 심리상담도 한번 받아봤으나 비용이 부담돼 그만둔 상태였다. 그러던 찰나에 교회를 가게 되었다. 신앙도 없었고 교회는 청소년 때 잠깐 다닌 게 다였지만, 이번에는 절실하게 종교의 힘을 받아보고자 다니게 되었다. 교회에서 주최하는 “부부학교” 프로그램도 참가했고 양육이라는 프로그램도 참가하면서 내 내적인 상처에 대해 인지했다. 교회에서 만나신 분이 추천해주신 “내 마음속에 울고 있는 내가 있어요”라는 책을 읽으면서 내 안에 내가 인지하지 못한 나의 고통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물론 그냥 듣기에도 나의 유년시절은 불우했으나, 서른 살이 넘고 이미 아이를 둘이나 낳은 나는 과거를 훌훌 털어버렸다고 생각했다. 불우한 유년시절에 관계된 나의 아빠와, 새엄마와도 왕래를 잘하며 지내지 않는가.  그런데 책을 통해 읽은 내면적인 아픔에 대한 이야기는 놀라웠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세 살 이전의 기억들도 의식은 망각했을지라도 그 고통과 느낌은 무의식에 남아 변형돼 지금의 나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내 안의 어떤 고통들이 변형돼 지금의 내 가정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남편과 나의 갈등이 아닌 나의 내면에서 울부짖고 있을지도 모르는 나에게로.         

      

한때 우리 자신이었던 어린아이는 일생 동안 우리 내면에서 살고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내면아이란 무엇일까. 나의 내면에 혹은 나의 어린 시절에 가장 본능적이며 순수했던 핵심 자아, 나의 타고난 인격이다. 나의 무의식을 가장 충실히 비춰주고 있는 아이다. 그놈의 무의식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일까. 그놈의 무의식은 뭐길래 나도 모르게 나를 조종하고 있나 알고 싶어졌다. 무의식을 설명할 때 흔히 사용되는 사진은 커다란 빙산 사진이다. 커다란 빙산의 일부분만이 수면 위로 솟아있고 수면 밑에는 아주 거대한 빙산이 잠겨있는 사진이다. 우리가 인지하고 의식하고 있는 부분은 저 빙산처럼 아주 일부분만 수면 위로 드러나 있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수면 밑의 저 거대한 부분이 나의 무의식이라는 것이다. 나의 거대한 부분을 모른다니, 나는 얼마나 내가 모르는 녀석에게 나를 휘둘리고 있나. 무의식은 왜 어두컴컴한 수면 밑에서 내 의식도 모르게 은밀하게 나를 조종하나.


  무의식은 본능적인 욕구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욕구와 감정이 무의식이다. 인간은 세상에 보호자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연약한 아기로 태어난다. 따라서 생존을 위해 필요한 욕구를 찾는다. 그 욕구가 충족되느냐에 따라 '즐겁'거나 '불쾌'한 감정을 느낀다. 발달과정에 맞는 때에 따라 필요한 욕구들이 다르게 있다. 생존을 위해 보호자에게 본능적으로 사랑을 받고, 관심을 받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는 작업을 계속해서 주고받는다. 그 욕구와 감정들을 적절히 다루는 방법을 상호작용을 하면서 배워나간다. '적절히' 다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 욕구와 감정은 억압되고 무의식 속에 남아 상처가 된다. '적절히'라는 것은 이성적인 논리로 이해되기보다는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데다 아이의 기질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주관적이다. 이 '불쾌'했던 경험은 나의 무의식과 신체 곳곳에 고스란히 자국을 남기고 상처를 남긴다. 그렇게 내 내면에는 비합리적이거나 비논리적인 "내면아이"가 웅크리고 있다. 신체의 나이와 동떨어져 시간이 멈춘 채로. 내 안의 "내면아이"에게 물어보았다.


"얘, 넌 몇 살이야?"  


내 안의 내면아이가 대답했다.



 "여섯 살."  




  나의 내면아이는 6살 즈음이다. 장애인인 새엄마와 같이 살게 되었던 나이.     

  나의 친엄마는 내가 37개월이 되던 때에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고 다리를 절룩거리던 4급 장애인인 아빠는 엄마를 간통죄로 고소했다. 그 후 엄마를 만난 건 내가 40개월쯤이었다. 얼굴은 기억나진 않지만 차가운 느낌의 구치소에서 높은 철창 안의 엄마를 본 기억이 친엄마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다. 8~90년대에 가난하고 국민학교 졸업밖에 못한 데다 불구였던 아빠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사지가 멀쩡한 여자와 결혼해서 고맙다며 시어머니마저 저를 대우해줬더니 배은망덕하게 바람이 나 집을 나갔다는 거였다. 아빠는 친엄마에게 내 친권을 빼앗고 징역살이를 보낸 후, 내가 엄마를 기억하지 못하도록 했다. 엄마가 나온 인화사진에다 검정 매직으로 얼굴을 새까맣게 색칠했다. 그 걸로도 모자라 얼마 후엔 내가 얼굴이 색칠된 여자에 대해 의문도 갖지 못하도록 전부 없애버렸다.     

  아빠는 사지가 멀쩡하지 않아도 되니 집에 진득이 붙어있을 수 있는 여자가 좋겠다며 장애인인 여자와 선을 봤다. 아빠와 마찬가지로 다리가 장애가 있는 노처녀였다. 안짱다리로 다리가 휘어 4급 판정을 받은 노처녀와 아빠는 재혼했다. 엄마가 집 나간 지 2년 만이었다.              

 

  새엄마는 수녀로 살려고 생각했다가 아빠를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새엄마는 장애로 인해 상처를 받으며 살았다고 했다. 그래서 같이 상처가 있는 사람끼리 (엄마에게 버림받은 6살 난 나) 서로 마음을 보듬어주며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단다. 그래서 성실한 아빠보다도 나를 보며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장애인인 데다 딸까지 딸린 남자와 결혼하는 게 자기 부모님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말 일인데도 말이다. 감사했다. 엄마가 장애인이어도 괜찮겠냐는 물음에 밝게 "네~~!"라고 대답한 내가 예뻐 보여 결혼 결심을 했다고 했다.     

  아빠가 재혼하던 결혼식 당일날. 결혼사진에 나는 없었다. 새엄마 왈. 처녀가 애가 딸린 장애인인 남자에게 시집가는 모습을 보면 돈 때문에 결혼했다느니 온갖 뒷말이 나오는 게 싫었다고 했다. 나는 여섯 살 때 새엄마에게 서슴없이 "엄마"라고 부르며 새로 결합된 가정에 적응했다. 물론 여기까지의 이야기들은 아빠와 새엄마가 나를 양육하면서 나에게 해준 이야기를 내 의견은 배제하고 옮긴 것이다. 나는 기억이 잘 나지 않기 때문에 적어도 믿었다. 이 사실들을. 내가 30살이 될 때까지나. 계속해서 바뀔 나의 관점은 어린아이의 믿음이 얼마나 비논리적으로 굳건해지는지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배경들 때문인지 내 내면에는 여섯 살 난 여자아이가 늘 그곳에 서있다. 외롭고 쓸쓸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표정을 하고 있는 아이가 서 있다. 나는 왜 아직도 여섯 살이지? 무엇 때문에 내 내면아이는 그 시간에 멈춰 살고 있을까. 내가 받은 어떤 상처들이 나를 자꾸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몰아가는 걸까. 내면아이를 더 알아가기 위해 기나긴 배움과 직면의 시간들이 수없이 있었고, 있는 중이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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