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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별행자 May 31. 2023

근원적 두려움을 놓아버림

나는 내 안의 불순물들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또 다른 두려움이 휩싸여있었다.


좀처럼 알 수 없는 불순물이 자꾸 나를 자극하는 바람에 사명이란 이름으로 상처란 이름으로 분노를 발산하고 있었다. 나는 왜 자꾸 판단과 분별을 하고 있는가? 상처 입은 영혼의 치유를 위해 이것이 필요하다 저것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왜 화를 내고 분노하고 있는가? 에 대해 깊이 침잠했다.



부처님과 예수님은 무지한 자들에 대해 비난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인자하셨다. 그런데 나는 한낱 알게 된 지식으로 남을 분별하는 잣대로 삼으며 화를 정당화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오만할까? 나는 예수님도 부처님도 아닌데 나에 대한 이상이 대체 무엇이길래 내면의 혼란 속에 빠져있을까?



마이클 싱어의 상처받지 않는 영혼을 읽으며 고요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과거의 나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 생존을 위해 내 에고를 위해 한 평만큼의 울타리를 지어놓고 스스로 들어가 있었다. 미움받지 않고 공격받지 않기 위해, 쓸모 있는 인간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러다 내면을 공부하고 심리학을 공부하여 NLP를 공부하면서 내가 내 편이 되어주기로 결심했다. 또 나처럼 가정에서 정신적, 신체적 학대를 받은 이들, 또 상처받은 이들을 돕겠노라 생각했다. 그들을 돕기 위해 또 열심히 공부했다. 석사를 수료했고 심리학사를 취득하고 자격증을 따고 정신분석으로 석박사 과정을 입학했다. 나를 옥죄던 한 평의 작은 감옥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감옥을 단지 넓힌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감옥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더 큰 감옥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경계를 새로 짓고 있었다. 당장 내 눈앞에 울타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대공원크기의 감옥이라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이론을 학문적 틀 안에서 정립하고자 애썼다. 정립하고자 애쓴 것은 공격받지 않기 위함이었다. 공격받지 않겠다는 것은 내가 공격하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나는 경계 안에서 경계밖을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아. 그렇구나. 난 또 '분열'의 상태이구나.



그렇다면 왜 또 경계를 넓혀서 나는 큰 감옥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했을까? 그것은 나를 나약하게 보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약하기 때문에 보호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왜 보호하려고 할까? 있는 그대로의 나는 수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가 너무 초라하기 때문에 공격받을 것이고 수용받기 위해서 경계지음에 속해야 하고 경계지음에 속한다는 것은 내 것과 내 것이 아님을 분별한다는 이야기겠구나.



그러자 왜 나의 직감을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애쓰냐고, 왜 사이비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느냐는 NLP사부님의 말이 생각났다. 나의 직감이 설명되기를 바랐던 나는 무엇을 두려워했을까? 인간으로서 실수하고 불완전한 것을 두려워하는 나약함이었다. '~~ 이 되어선 안돼'라는 기준은 '~~ 이 되면 ~~ 해도 돼'라는 이원성을 불러온다.


내 분별로 나를 지키고 타인을 분별하겠다는 두려움을 놓아버리자. 놓아버리자 마음먹으니 명분을 찾는 분노가 녹아내렸다.  비가 오면 비가 온 것이지 화가 날 일은 아닌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관성으로 나는 또 순간순간 나를 보호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알아차리는 나'를 잃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에도 사랑이 전부임을 기억하고 사랑을 깨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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