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누나들이 엄마 이야기를 엄청 잘 들었어! 왜냐고? 엄마는 무서운 선생님이었거든! 그러니까 너희도 조심해~!!"
"히익-"
아이들에게 유치원 선생님은 신과 같은 존재다, 아이돌 같은 존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엄마말은 죽어라 안 듣고 반항을 하면서, 선생님의 한마디에 모든 것이 해결되는 아이러니. 종교 수준이다.
머리도 못 감고 눈곱도 못 뗀 채로 헐레벌떡 출근을 하여도 우리 선생님이 제일 예쁘다는 어마한 팬심.
지나가다 작은 꽃 한 송이 발견하면 님 생각에 고사리손으로 꺾어다 조공을 하고, 소풍날이면 자기 음료수 보다 선생님 커피를 먼저 챙긴다는 아이들의 지고지순한 사랑. 그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선생님이 바로 엄마라고!
"진짜? 엄마도 선생님이었어?"
"그래! 엄마도 선생님이었어! 너네! 어! 다람쥐반, 달오름반 선생님들처럼!"
"그런데 왜 지금은 선생님 아니야?"
"그거야! 너희들을 키워야 하니까 그렇지..."
"그렇구나, 그런데 진짜 선생님이었어?"
"진짜라니까!"
지금 너희들은 샤랄라 치마를 입은 긴 생머리 선생님들과 후줄근한 티셔츠를 입고 머리도 감지 않은 엄마를 비교하며 의심하고 있겠지.
그래, 나도 비교가 되는데 너희는 오죽하겠니. 목소리도 천사 같은 선생님과 오전을 보내다가 집에 오는 순간 얼마나 큰 온도차를 느끼는지, 나도 안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 궁금한 것들을 와다다다 물어보는 아이들이 귀여웠다.
선생님은 엄마 아빠도 없고 유치원에서 살고 응가도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엄마랑 똑같은 사람이었다니! 그래, 똑같은 '사람'이란다.
어린아이들은 선생님을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이 아닌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선생님이 유치원에서 사는 게 아니라 따로 집이 있다는 것에 놀라고, 자기들처럼 엄마 아빠가 있다는 사실에 또 놀란다. 말하자면 한 도 끝도 없다. 그냥 동화 속의 캐릭터처럼 생각한다.
나도 한 때 아이들과 부모님들께 사랑받는 선생님이었는데. 선생님으로 불렸던 시간보다 '엄마'로 불린 시간이 훨씬 길다는 사실에 조금 조급해진다. 엄마라는 이름 하나 가지고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니.
ADHD를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교사생활을 했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당하게 답하겠다. 선생님이 될 자격을 얻었으니 교사생활을 한 것이라고. ADHD를 가지고 있어서 힘들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괜찮았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ADHD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으니까. 심지어 나 조차도! 유치원 교사생활은 힘들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다. 전국에 있는 모든 선생님들이 힘들다. 나는 그저 아이들과 씨름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많은 선생님들 중 한 명이었다.
물론 꼼꼼한 선생님은 아니었다. 실수도 많이 했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고 당황스러운 실수들. 그래도 나는 잘 지냈다. 동료교사들과도 잘 지냈고, 그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았다. 아이들은 나를 좋아했고, 부모님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은 편이었다.
나는 평범했다. 정말이다. 아무도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나와 ADHD를 연관 짓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었다.
내가 스스로 ADHD라는 것을 눈치채기 전까지는 말이다. 딱 한 명, 나만 속일 수 있었다면 완벽했을 텐데. 어쨌든, 내가 ADHD진단을 받은 것은 유치원을 그만두고 7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였으니까. 그때는 더더욱 알 수가 없었겠지. 아직도 내가 ADHD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많은 사람들이 물어보았다. 유치원에 다시 돌아갈 것이냐고. 그 질문에는 명쾌하게 대답을 못하겠다. 나는 왜 유치원에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일까. 이유를 말하라면 100가지 정도는 말할 수 있겠다.
내 눈에는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 유치원은 출근 시간이 빠르고, 퇴근 시간도 늦다. 웬만한 직장인 야근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늦게 끝나는 날도 많다. 친구들 하나 없는 텅 빈 유치원에서 선생님과 둘이 엄마가 오길 기다리던 아이들을 못 봤으면 모를까. 아이들이 엄마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는 줄 알고 있는데, 내 아이들을 그렇게 기다리게 만들 수는 없다.
행사가 있으면 주말에도 나가야 한다. 다른 집 아이들 돌보느라 내 새끼들 행사에는 참여도 못한다. 연차? 그런 것 없다. 대신 방학이 있지 않느냐고? 그냥 연차 다 끌어 모아서 쓰는 것과 다름없다.
아파도 유치원에서 쓰러져야 한다. 아이들이 집에 가기 전까지는 아픈 척도 못한다. 집에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들이 아파도 달려갈 수 없다. 사원 하나 없어도 잘 돌아가는 직장들이 많지만, 유치원은 선생님이 없으면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이 엄마 잃은 병아리들 마냥 슬퍼한다.
그리고 직장인들의 유일한 버팀목 점심시간? 유치원에선 전쟁시간이다. 아이들 배식 끝나고 이제 한 입 먹어 볼까 하면 제일 먼저 받은 아이가 더 먹고 싶다고 온다.
음식을 더 주고 다시 앉으면 또 다 먹었다고 줄줄이 검사를 받으러 온다. 얼마 남지 않은 반찬을 마구 욱여넣고 있으면화장실에서 "선생님~ 응가 다했어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입에 있는 음식을 삼키지도 못한 채 뒤처리를 도와주고 나면, 먹기 싫은 반찬 때문에 세상 무너진 표정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 여기까지 하고. 어쨌든 다시 돌아가기엔 큰 용기가 필요하다. 홀몸이어도힘든 일인데, 내 새끼들을 두고 일할 생각 하니 정신이 아득하다.
얼마 전 다시 유치원으로 돌아간, 나처럼 아들 둘을 키우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죽겠단다. 정신없이 아이들을 보내고 출근을 하고 또 아이들을 만난다. 퇴근을 하면 새끼들을 만나고 저녁밥을 차리는데, 배달을 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단다. 생각만 해도 지친다.
서론이 길었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아직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도 유치원 교사였던 내가 좋았기에, 매일선생님 사랑해요라고 편지를 써오는 아이들이 좋았기에.
내가 유치원에 돌아가지 않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ADHD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ADHD진단을 받으면 교사를 할 수 없는가? 아니다. 할 수 있다. 자격증이 있으니까. 그리고 범죄자가 아니니까.
그렇다면 ADHD진단을 받은 사실을 알려도 교사생활을 할 수 있는가? 글쎄다. 바로 이 부분이 내가 불편한 부분이다. 내가 원장이라면 ADHD를 가지고 있는 교사를 채용할 것인가? 부모들이 ADHD성향을 가진 선생님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믿을 수 있을까?
내 아이의 선생님이 ADHD진단을 받았다면 나 또한 아무런 색안경 없이 선생님을 바라볼 수 있는가? 모르겠다. 세상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단,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ADHD가 아니어도 교사로서 자질이 부족한 선생님들이 있다는 것, ADHD 성향이 있어도 정말 열심히 하는 선생님들이 있다는 것이다. 진단명으로만 판단하면 안 된다. 개인의 인성과 능력이, 교육자로서의 신념이 얼마나 바르고 훌륭한지로 판단해야 한다.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선생님들이 있겠는가. ADHD는 물론이고 우울한 선생님도, 불안한 선생님도 있다. 다들 어려움이 하나씩 있다. 그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이기에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뿐이다.
ADHD진단 사실을 밝히지 않는 것은 괜찮은가? 그것은 개인의 자유. 의무사항이 아니다. 분명 진단받은 사실을 말하지 못한 사람도, 진단을 받으면 불이익이 올까 진단을 받지 않은 사람도, 자신이 ADHD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렇게 이 세상은 굴러간다.
이러한 고민은 교사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일터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든 사람들의 고민이리라. 나의 ADHD성향을 알려야 하는지 숨겨야 하는지 수 없이 고민하고, 갈등을 한다.
그런데 왜 숨겨야 하는가? 진단을 받았다고 나라는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아니, 변한다. 더 좋게! 더 훌륭하게!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고, 진단을 받고 노력을 하는 사람들인데 칭찬을 해주진 못할망정 부정적인 시선을 보낸다니! 진단사실을 숨기게 만드는 이 사회가 너무나 개탄스럽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직장에진단 사실을 말하는 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ADHD'라는 네 글자가 가지고 올 후폭풍을 감당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이니까. 나에게 별로 관심도 없으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소문만 무성하게 키우고, 바로 색안경을 집어드는 사람들이 있기에, '치료받고 있다', '더 잘할 수 있다'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단명 때문에 승진의 기회라도 놓치면 어찌하겠는가. 참 안타깝다. ADHD진단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누군가가 '진단받은 사실을 직장에 오픈해도 되냐'고 물으면 뜯어말린다. 강점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작은 약점이라도 알려지면 밀려나게 되는 경쟁사회니까.
진단을 받기 전에도 나는 교사생활을 했고, 별 탈 없이 아이들을 무사히 졸업시켰다. 최선을 다했다. 그런 내가 갑자기 달라진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나는 더 훌륭한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들 둘을 키우며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엄마로서 부모님들의 마음이 어떤지 잘 알고 있다. 얼마나 노련한 선생님이 되겠는가?
그리고 나는 1년 넘게 약물치료를 받았고, 계속 받고 있기에 업무처리 능력도 이전보다 훨씬 좋다. 그런데 ADHD라는 진단서, 종이 한 장 때문에 이런 선생님을 놓친다고? 그건 참 안타까운 일인 것이다.
나는 나의 ADHD진단을 숨길 생각이 추호도 없다. 내가 가진, 나의 일부인 ADHD성향을 부끄러워하며 숨길 이유도 없고, ADHD진단 사실을 밝히고 나서 혹여나 채용이 되지 않을까 봐 간절히 호소하고, 거절 당해 여기저기 면접을 보러 다닐 이유도 없다. 나는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최선을 다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나를 사랑한다.
그래서 지금은 돌아갈 생각이 없다. 하고 싶은 일도 생겼다. ADHD진단을 받고 잠시 무너졌지만 새로운 꿈이 생겼다. 나의 약점 속에서 강점을 발견했다. ADHD는 내 무기가 되었다.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도 좋지만, 더 넓은 세상에서 아이들을 만날 것이다. 진단서라는 종이 한 장 때문에 부정적인 시선을 받는, 편견과 오해 속에 고개를 숙이며 걷는 아이들의 어깨를 펴 줄 것이다.
"어머니~ 우리 00 이가 유치원에서 정말 잘 지내요~"라고 말하는 평범한 교사도 좋지만, "어머니 많이 힘드시죠, 그 마음 이해합니다. 우리 아이 특별한 아이예요. 믿어주세요. 잘할 수 있어요"라는 말로 흔들리는 부모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응원하고 싶다.
그래서 글을 쓴다. 구독자 51명인 유튜브 채널도 가지고 있다. 동네방네 아니지, 외국에 거주하시는 구독자분도 계시더라. 온 세상에 외친다. ADHD아이를 키우는 성인 ADHD엄마라고.
사실 유튜브를 하고, 글을 쓰며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과연 이 엄마의 만행들을 어찌 받아들일지 알 수 없다는 것, 그것 딱 하나 마음에 걸린다. 세상 당당한 엄마 따라서 당당하게 걸을지, 여기저기 떠들어 댔다고 원망하며 숨어 버릴지.
아들아 그것은 너의 선택이지만, 엄마는 네가 당당했으면 좋겠다. 아직은 ADHD가 뭔지도 모르는 너지만, 네가 언젠가 이 모든 사실을 자세히 알게 됐을 때 상처받지 않게, 부끄럽지 않게 훌륭한 엄마가 될게. '엄마가 내 엄마여서 좋아'라고 말했던 그 마음 변치 않게 최선을 다할게.
엄마가 누구라고? 옛날에는 유치원 선생님이었지만, 지금은 글을 쓰는 사람이야. 세상에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야.
엄마가 쓴 글을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읽은 것 보았지? 엄마가 좀 더 힘내서 만 명이, 십만 명이, 백만 명이 엄마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할 거야.
우리 잘 생긴 아들! 엄마가 나중에책 출간하면 홍보모델 해줄 거지?
사랑한다. 내 보물.
전국에 계신 ADHD진단을 받은, 선생님과 예비 선생님들께 전합니다. 당당해지세요. 그리고 자신을 믿으세요. 세상의 편견 때문에 꿈을 포기하지 마세요.
넘치는 에너지를, 추진력을, 몰입을, 자유로움을 아이들에게 전해주세요. 평범하지 않을 수 있지만, 특별한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혹시나 이 글을 읽고 계신다면 마음속으로 하이파이브 한번 해요.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