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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초 Aug 23. 2019

가혹한 집밥

20190823        

멈출 수 없는 기계였다. 아니 멈추면 안 되었다. 8명 식구의 삼시 세끼를 챙기는 것도 모자라서 학생이던 우리 6명의 점심 도시락, 고등학생이던 언니 둘의 저녁 도시락, 하숙생 3명의 점심·저녁 도시락, 선생님이던 아버지의 점심 도시락까지, 엄마는 하루에 15개의 도시락을 싸던 시기가 있었다.

급식 조리사이자 인간 식기세척기...

 

도시락과 반찬통을 꺼내고, 김칫국물이 물든 도시락 가방이나 보자기를 빨고, 도시락통들을 모두 분리해서 설거지통에 담고, 다음 날 쓸 수 있게 깨끗이 씻는 것까지 몽땅 엄마 혼자의 몫이었다.

기억 속의 엄마는 늘 부엌에 계셨다. TV를 보신다거나 낮잠을 잔다거나 하는 모습은 기억에 없다. 내가 눈 뜨기 전에 이미 부엌에 계셨고, 내가 잠들 때까지도 엄마는 집안 어딘가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내게 부엌이란 엄마가 안 보일 때 제일 먼저 찾게 되는 곳, 엄마가 있는 곳, 엄마만의 공간이었다. 


가끔은 어제 많이 남긴 반찬을 다시 담아주셨나 싶을 정도로 비슷한 반찬을 계속 싸주시기도 했다. 김치를 주된 반찬으로 감자채 볶음, 어묵볶음, 멸치볶음, 진미채 볶음, 아주 가끔 계란말이 한두 개... 한꺼번에 15명의 반찬을 준비해야 하는 엄마 입장에서 위의 반찬들은 재료값이 저렴하고, 만들었을 때 푸짐하며, 조리시간이 짧은 반찬들로 꼽혔을 가능성이 높다. 


반찬통엔 김치와 멸치, 김치와 진미채, 한 칸은 비워둔 채 그냥 김치만 들어있는 적도 있었다. 그땐 원망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너무 바쁘셨거나 힘든 날이었을 것 같다. 

반찬통의 넓은 오각형 공간엔 주로 김치가 담겼다. 김치에 의한, 김치를 위한, 김치만의 공간으로 어쩌다 볶은 김치나 짠지, 깍두기 등 다른 김치류로 변화를 주기는 했지만, 김치 아닌 다른 반찬이 넓은 칸에 들어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반면, 좁디좁은 삼각형의 공간은 반찬의 총량이 적거나 많이는 줄 수 없는 나름 귀한 반찬들의 자리로, 감자채 볶음, 멸치볶음, 가끔은 한두 개의 계란말이가 들어있기도 했다. 꽉꽉 눌러 담은 밥에 비하면 반찬은 늘 심각하게 부족했고, 삼각형 공간의 반찬은 두어 개 집어 먹으면 아쉬움만 남았다.


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어묵볶음을 만들 간장 졸이는 냄새가 마당 가득 퍼져있던 순간도 기억난다.

이 달짝지근한 냄새는 엄마가 지금 집 안에, 아니 부엌에 있다는 신호이고, 저녁 반찬에 대한 예고편이며, 저녁 먹을 시간을 점쳐볼 수 있게 하는 신호이기도 했다.    


초저녁에 언니들이랑  만화영화를 보고 있으면 부엌 쪽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 콩나물을 다듬어라, 수저를 놓아라, 김을 구워라, 밥을 퍼라, 국을 떠라, 상을 들여가라…

작업 순서에 따라 수시로 우리 중 한 사람을 호출하시는 엄마 덕에 그나마도 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이나마도 우리가 같이 하지 않았더라면 엄마 혼자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매일 먹는 김치나 반찬 외에도 된장 간장, 청국장, 딸기를 관으로 사다가 만든 잼, 아침부터 반죽을 하면 점심때가 훨씬 지나야 먹을 수 있었던 식빵, 흰 설탕을 묻힌 도넛까지 엄마는 마치 음식을 만들고 먹이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당신을 제외하면 전부 먹기만 하는 사람이고, 장보기에서 조리, 뒷정리까지 모든 과정을 혼자서 책임져야 했던 외로운 시간. 자식 입으로 음식 들어가는 거 보면 행복하다는 말을 나 또한 공감하고 경험했지만, 그것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힘듦과 외로움을 자식들 모르게 혼자서 삭이셨을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매일매일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내셨을 텐데도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래도 니들 끼고 살 때가 행복했지.”    

행복했다고 힘들지 않았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아이의 밥을 차리다가, 식당에서 남의 밥을 사 먹다가, 마트에서 포장된 반찬들을 집어 들다가 문득문득 그때 생각들이 난다. 

엄마는 ‘돌이켜보면 그때가 좋았다’고 말씀하시지만, 그즈음의 엄마의 인생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엄마의 젊은 날이 나와 내 자매들, 아버지, 그때 당시 하숙생이던 언니들의 인생에 다 스며들어버렸다.

아! 가혹한 집밥!!        



*윗글은 2018년 12월 6일에 쓴 저의 일기 ‘엄마의 인생이 스며든 날’을 재구성한 것으로, 두 글에는 같은 표현들이 있습니다.    


*사진: 최근에 책으로 묶은 엄마의 일기 중 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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