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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당 Aug 04. 2024

태국에서 배운 인간관계

#치앙마이 일년살기

치앙마이 생활의 끝이 보이는 요즘이다. 


한국회사와의 채용협상은 내일 정도 확실히 결정이 될 모양새다. 서울 그것도 강남에서의 출퇴근을 상상하다가 며칠간은 스트레스에 절여져 있기도 했다. 그래도 '이것이 정녕 마지막이라면 이런 상태로 지낼 수는 없어'라며 다시 정신을 차리고 뭐라도 하려고 밖으로 나선다. 


사실 나는 알고 있다. 걱정만큼 쓸데없는 것은 없다고. 최악의 경우를 상상해 봤자 대부분은 발생하지 않을 일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게 된다. 


그러나 내가 입사하게 될지도 모르는 회사에서 같이 일하게 될 팀장이 이전 직장에서 같이 일한 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행동에 나섰다. 팀장으로 내가 믿을만한 분은 아니라는 판단에 채용 책임자 분께 면담을 신청해 솔직히 말씀드렸다. 사실 거의 채용 거절 의사나 마찬가지였는데 이 분께서 신속하게 다른 포지션의 자리를 제안하셔서 해당 내용으로 논의가 진행 중이다. 


반드시 이 회사에 취업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으니 대화에 오히려 부담이 적다. 사실 취업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인생에 대한 욕심이 줄었다. 어떤 높은 단계의 무언가를 쟁취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아, 뭔가 정신적인 깨달음 같은 것은 이루고 싶기는 하지만 그것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저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내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최대의 목표가 되었다.


치앙마이를 떠날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치앙마이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나에게 편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무에타이 체육관 사람들, 종종 가는 단골집, 내가 머물고 있는 콘도의 관리자 등등과 그 어떤 불편함도 없고 사이도 무척이나 좋다. 


내가 다니는 무에타이 체육관은 외국인보다 태국인의 숫자가 더 많은 곳이다. 치앙마이 시내 쪽의 체육관들은 대부분 외국인 관광객이 손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곳은 특이하게 그 반대다. 아마도 월 단위 결제 시 금액이 그렇게 비싸지 않은 것이 한몫을 하는 것 같다. 


덕분에 부담스럽게 따로 약속을 잡아서 만나지 않아도 많은 태국인들을 접할 수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내가 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체육관에 나가는지라 나는 나름 그들의 인정 같은 것을 받은 것 같다. 수업을 위해 장비를 챙기고 있으면 그걸 도와주기도 하고 주차된 오토바이를 끌고 나가려는데 공간이 너무 비좁아서 낑낑거리자 나를 도우러 달려 나와주기도 했다. 물론 후자의 경우는 처음 본 사이라도 도와주긴 할 것이다. 그래도 여성 두 명이 달려 나와서 '츄아이ช่วย(돕다는 의미의 태국어)'를 외치며 돕는 모습은 꽤나 마음이 따뜻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닌가. 


밥집이나 카페 등 자주 가는 단골집 사장님들은 내 얼굴만 봐도 자동으로 메뉴를 내어주신다. 거의 늘 아침을 먹는 카우만까이(닭고기 덮밥) 집은 '카우만까이 점보 사이즈'가 내 시그니쳐 메뉴이며 그거 말고 메뉴를 바꿀 일은 없어서 굳이 다른 메뉴를 주문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뭐 AI 첨단 안면 인식 시스템 같은 것이 없어도 얼굴만 들이밀면 자동으로 메뉴가 나오는 수준이 되었다. 


콘도의 경우 문화적 차이로 인해 관리자와 세입자가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은데 다행히 나는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 관리자 분들에게 뭔가 요청을 하면 길면 일주일씩 걸리지만 나는 그려려니 하고 기다리는 편이다. 한 곳에 오래 머물기도 했고 관리자분들을 자극하는 행동을 하는 편도 아닌지라 나도 그들에게서 알게 모르게 약간씩 편의를 제공받기도 했다. 원래 월 단위 계약만 되는 곳인데 내가 나갈 때는 주단위로 계약해서 내가 원하는 날짜에 나갈 수 있도록 해주신다고 한다. 


태국분들과의 관계에서 갈등을 겪지 않은 이유는 사전에 태국 문화에 대해 조금은 공부를 했고 그걸 잘 따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가 경험한 태국에서 잘 지내는 인간관계의 비법(?)은 다음과 같다. 


1. 즐거운 감정 말고는 표현을 자제할 것

한국에서 하던 식으로 성급하게 씩씩거리며 화를 내면 태국분들은 이것을 모욕적이라고 판단해 순식간에 마음의 문을 닫고 자신이 그 어떤 손해를 봐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호텔에 숙박하면서 선베드에 누워서 매니저에게 이것 저것 가져다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것이 늦어져서 '왜 늦어졌냐,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아느냐'라고 언성을 높이면 그 때부터는 매니저의 눈빛이 돌변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문제가 생겨서 지적하면 상대 태국인은 자신의 탓이 아님을 강조하고 항변할텐데 이걸두고 '아니다 이건 네 잘못이다'라고 물고 늘어지면 이후에는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당할 것이 분명하다. 총을...맞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느낀 태국분들은 분명 순종적이고 소극적이지만 그들이 지닌 선을 넘어버리면 그 때부터는 호전적인 파이터로 각성한다.


행정처리가 되었건, 어떤 서비스를 받는 상황이 되었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일단은 화를 내지 말자. 아무리 화가 나고 억울한 상황이 있어도 일단은 증거를 수집하고 조용히 경찰에 신고하는 등의 대응을 하는 것이 낫다.


2. 극단적으로 돌려 말할 것

1번과 연관된 것일 수도 있는데 직접적인 비난의 표현은 전혀 소용이 없다. 서비스 업계에서는 말을 돌려서 말하는 '쿠션언어'라는 것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쿠션언어보다도 더 한 단계 높게 들어가야 한다. 태국분들은 '크랭짜이'라고 해서 타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문화를 갖고 있다. 상대를 비난하는 대신 '이런 일이 있어서 나의 마음이 너무 힘들고 불편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를 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이런 표현을 통해서 원래 환불이 안 되는 데 환불을 받은 적이... 있기도 하다. 


3. 맞장구 쳐주기

태국분들의 사고방식은 우리와 다를 때가 많다. 굉장히 보여주기식 문화가 강하다. 무에타이를 함께 다니는 태국인 친구 중에는 자신은 태국 맥주를 마시면 소화가 안 되고 외국 맥주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친구도 있다. 이게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태도라고 했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이해가 되었다. 이럴 때 '뭐 굳이 비싼 맥주를 마시냐, 싼 것도 충분하다'라고 답변하느니 '아, 그래 네 말이 맞아. 나도 동의해'라고 말을 해주는 것이 상대와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는 길이다. 한국이라면 내가 하는 말을 360도로 돌려 까기 당하는 경우가 흔한데 태국에서 그러면 당장 왕따 확정이다.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싶다면 아마 이렇게 말을 하는 게 나을 것이다. 


'오, 맞아 네가 말한 외국브랜드의 맥주를 나도 좋아해. 훨씬 더 부드럽지. 내 생각에는 태국 맥주 브랜드의 품질도 좋아서 많은 한국 관광객들은 태국 브랜드의 맥주를 좋아하기도 해. 한국 맥주는 별로 맛이 없는데 태국은 맥주 브랜드의 선택지가 넓어서 너무 부러워'


물론 이런 것들을 잘 숙지하고 있어도 문제가 생길 확률은 높다. 나를 외국인이라고 생각해서 기꺼이 등을 처먹으려는 태국인들도 부지기수다. 외국인에게는 돈을 더 받아도 된다는 인식이 팽배한 곳이 태국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위의 내용을 원칙으로 삼고 의사결정을 하니 태국 생활 일 년 동안 크게 문제될 일은 없었다.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할 때랑 별반 다른 상황이 아니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직장 상사를 대한다고 생각하고 태국인들을 대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태국에서 백수였지만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을 대비하고 있던 것일까.


누군가는 이래서 태국인들이 답답하고 태국생활이 싫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한국에서 너무 경쟁적이고 직설적이고 공격적인 상황을 오래 접해서 그런지 정 반대인 태국에서 내 온 몸의 독기를 뺀 느낌이라 꽤나 편안함을 느꼈다. 


이런 생각들을 하는 것을 보니 정말 치앙마이를 떠날 때가 되긴 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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